황혼빛이 비스듬히 밀려들어 바닥 위로 종인과 나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왁자지껄하던 온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간 자리에 단둘만 남겨지자, 공기마저 굳어버린 듯 기이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문득 우리 모두가 가버린 후 이 공간에 혼자 남아있을 영우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 혼자 남았을 때에도 자신을 보러 와준 친구들에게서 얻었던 위로가 남아 있을까?
오히려 영우에게 온전히 혼자라는 외로운 현실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더 깊은 단절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 위로들이 오히려 독처럼 쓴 맛으로 돌변할까 두려웠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종인과 강 쪽으로 이어진 농로를 걸어 산책했다.
종인과 내가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영우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순오 누나와 영우 매형은 내실을 오가며 탁자에 빈 그릇과 반찬을 날라다 저녁 상을 차리고 있었다.
순오 누나가 종인과 나를 보며 말했다.
"앉아. 거의 다 됐어"
"네"
종인이 영우 옆에 앉았다.
나는 맞은 편에 앉으며 영우에게 말했다.
"흥경이 집에 있을까?"
영우가 대답했다.
"전화 해봐. 집에 있겠다. 토요일 마나님 보러 의정부 올라 갔다가 일요일에는 다시 내려오거든...출근 여기서 해"
나는 핸드폰을 꺼내 흥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흥경이 전화를 받았다.
"남해냐? "
"의정부 집이야?"
"아냐. 신답리야"
"잤냐? 목소리가 왜 그래?"
"깜박 잠들었었네? 넌 어디야?"
"영우네야. 밥먹으러 와. 추어탕 끓였어."
"밭에 왔구나? 알았어. 지금 갈께"
잠시 후 흥경이가 오토바이를 타구 나타났다.
순오 누나와 매형이 흥경을 반갑게 맞이했다.
종인과 나도 흥경과 악수를 나누었다.
탕이 조금 더 끓어야 한다며 순오 누나가 탁자에 앉자 영우 매형도 반찬 그릇을 담아왔던 쟁반을 탁자 빈곳에 내려놓고 따라서 앉았다.
흥경은 좀 피곤한 얼굴이었다.
주말에 조합 행사에 참석했다가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 아직 그 피로가 남았다고 말했다.
새벽에 집에 들어갔는데 깰까봐 와이프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어있는 아들방에 들어가 잤다고 했다.
식탁에 걷옷을 벗어 두지 않았으면 자신이 집에 들어 온 사실을 와이프가 몰랐을거라고 말해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흥경은 아직 연천군농업협동조합 상임이사 직에 재직 중이다.
나는 이 친구가 조합장 까지 엮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조합장은 선출직이라 실력과 노력만으로 오를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작년 연말에 있었던 초등학교 동창 모임으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고향 인근에서 동창 모임을 갖은건 십수년 만 이었다.
몇 몇을 제외한 동창 대부분이 타지에 나가 살고있기 때문에 기회를 빌어 고향의 향수를 느껴보자는 취지였다.
아직 시골에 친청 식구들이 있는 여자 친구들은 일찍 내려와 쉬다가 시간에 맞추어 모임 장소로 나왔다.
이 날 모임에 영우도 참석했다
이 모임 이후 영우가 암 진단을 받았으므로, 나는 "그때 영우가 술을 덜 마셔서 면역력이 떨어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논리로 암 발생 원인을 분석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영우나 순오 누나, 영우 매형, 또 듣고 있는 종인과 흥경, 심지어 이야기를 하는 나 자신도 그 말에 진지한 무게를 싣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유치한 분석이 "그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영우가 이렇게 되어 너무 아쉽다"라는 먹먹한 아쉬움이 단박에 읽히는 어조였기 때문이었다.
영우 매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처남이 세상을 참 잘 살았구나 싶습니다. 곁에 이렇게 정다운 친구들이 늘 있어 주니, 가족으로서 항상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그 말에 나는 쑥수러워서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매형, 너무 특별하게 보시는 군요? 우린 특별히 영우가 아파서 모인 게 아니라, 원래 늘 이랬어요.
20대 때까지만 해도 영우네 사랑방이 우리 아지트였는걸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린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영우의 투병 이후 사방에서 밀려들던 연민과 동정의 시선에 지쳐있던 순오 누나는, 예전과 다름없이 영우를 대하는 친구들의 우정을 느끼고 감동한 것 같았다.
순오 누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영우 매형이 내려놓은 쟁반을 집어 들었다.
"저녁 차릴께."
순오 누나가 내실로 들어갔다.
매형도 순오 누나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며 뒤따라 들어갔다.
우리는 곧 추어탕을 먹었다.
다 먹고 나자 영우 매형이 고무장갑을 끼고 식기에 세제를 묻혀 닦기 시작했다.
내가 미안한 마음에 우리가 하겠다고 수저를 뺏으려 하자, 매형은 손사래를 치며 극구 우리를 말렸다.
설거지가 끝나자 순오 누나 부부도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어느새 해가 떨어져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붉으스름한 황혼빛이 마당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다음 주에 올게. 밥 거르지 말고, 약 잘 챙겨 먹고……."
순오 누나가 결국 눈시울이 붉어진 채 영우에게 말했다.
"알았어. 걱정 마."
영우는 담담하게 웃으며 스타리아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타는 순오 누나를 부축했다.
순오 누나는 차 앞까지 와서 배웅하는 종인을 바라보며 와줘서 고맙다고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영우 매형도 열린 운전석 창문 너머로 고개를 숙여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곧 순오 누나 부부가 탄 차는 붉은 미등을 켜고 농로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종인과 나도 영우와 흥경에게게 작별을 고했다.
영우와 흥경이가 승용차에 오르는 우리를 마당 입구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차를 몰아 얼마쯤 농로를 빠져나갔을까, 백미러 속으로 멀어지던 영우의 제작소는 이내 더는 보이지 않았다.
흥경이는 영우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가 마을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도 지나고 나면, 방금 전까지 뜨끈한 추어탕을 먹으며 웃고 떠들던 공간의 온기는 차갑게 식어버릴 것이다.
주방 싱크대 위에는 영우 매형이 정갈하게 엎어놓은 물기 찬 그릇들이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가고 있을 터였다.
친구들은 저마다의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이제 영우는 홀로 이 어두워진 공간에서 긴 밤을 맞이해야 한다.
그 고요 속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병마를 온전히 혼자서 받아내야 하는 고통과, 지독하게 외로운 현실이 날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달리는 차창 밖, 영우가 홀로 남겨졌을 벌판을 향해 마음속으로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어이~친구. 꼭 이겨내시게.'
첫댓글 마음이 훈훈해 집니다~🙄
영우 친구가 병마와 싸우는데 고향 친구들이 곁에 있어 큰 힘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