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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동초등학교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유랑아제
임천서원(臨川書院)
김성일(金誠一)이 1593년(선조 26) 4월 29일 진주(晋州)공관에서 수명을 다하고 14년 뒤인 선조 40년(1607)에 선생의 학덕과 공훈을 기려 일향의 선비들이 선생의 상자지향(桑梓之鄕)에 조두지소(俎豆之所)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 따라 당시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와 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임하현(臨河縣) 서쪽에 옛 서당에다 사묘(祀廟)를 세우고 향사했다. 1618년(광해군 10)에 ‘임천’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을 때 영남유림들이 훼철 반대를 상소하였다가 이문직(李文稷), 유기호(柳基鎬) 등 14명이 귀양가게 되었다. 그 뒤 1908년에 복원하였다.
1)김성일(金誠一, 1538~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안동 임하현 천전리에서 김 진(璡)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6년(명종 11) 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서경≫, ≪역학계몽(易學啓蒙)≫, ≪심경≫, ≪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다시 도산(陶山)에 돌아와 수학하였다. 퇴계로부터 “행실이 고상하고 학문이 정수하여 내가 본 중에 그와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평을 들었으며, 요순(堯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 80자를 손수 쓴 병명(屛銘)을 받았다. 그 마지막에 “박문약례(博聞約禮) 두 가지를 모두 지극하게 하였으니 도통연원의 바른 맥을 이었도다(淵源正脈).”라고 주자를 칭송하는 말로 끝맺고 있다. 이 병명을 두고 후학들은 도통(道統) 전수(傳授)의 징표로 이해했다. 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572년에는 「노릉복위 육신복작 종친서용소(魯陵復位 六臣復爵 宗親敍用疏)」를 올려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 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했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후일 종계를 바로 잡은 것은 이때의 성과였다. 사헌부장령이 되어서 왕의 면전에서 과감하게 간하며 고관들의 잘못을 피하지 않고 지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전상호(殿上虎)라 불렀다. 1579년 및 이듬해에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로 함흥ㆍ삼수ㆍ길주ㆍ종성ㆍ온성ㆍ경원 등 함경도 각지의 성지와 군기를 검열하고 창고의 곡식을 조사하는 등 국방실태를 점검 하였다. 군사들에게 옷을 나누어 주며 위무하였고, 백성들의 폐막을 포함한 변경의 문제점을 상소 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 순무어사가 되어서는 족징⦁인징 등의 군역 상의 문제점, 무비 해이의 폐단, 방납의 문제점 등 일곱 가지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그 해결책을 건의하였다. 특히 공납제에 대하여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방납에 따른 폐단을 시정할 것과 아울러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할 것을 주청하였다. 같은 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3년여 동안 재직하면서 목민의 이상 실천에 힘썼으며 오랫동안 끌어온 송사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나주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 : 지금의 경현서원)을 세워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 등 동방오현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케 하였다. 나주에 목사로 있으면서 ≪성학십도(聖學十圖)≫, ≪계산잡영(溪山雜詠)≫,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퇴계선생자성록(退溪先生自省錄)≫ 등 퇴계선생의 주요 저작을 간행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어서는 왜인의 서계(書契 :조선과 일본 사이에 주고받던 외교문서)의 패만한 내용을 고치도록 목숨을 걸고 주창하여 일부 반영시켰으며, 외교상의 의전, 격식, 절차에 나라의 명예와 체통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조선국연혁고이>와 <조선국풍속고이>를 지어서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주체성(主體性)을 선양하였다.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정세를 보고할 때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전쟁 발발의 소문으로 온 나라의 흉흉해진 민심을 진정시키고자 “일본이 반드시 침입할 정황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나, 나중에 왕과 비변사 등 소수의 국방 최고책임자들에게는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한 일본 사신의 말을 보고하여 국방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 해 홍문관 부제학이 되어서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여 민심을 얻을 것과, 왕자들의 호화주택과 부정축재, 군정의 문란, 동서붕당과 관료들의 악습, 한 겨울의 축성 등의 여러 가지 문제의 시정을 주창하면서 국방력을 제대로 강화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이 신원되도록 힘썼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 중에는 진입하는 왜군의 선발대를 물리쳐서 임진왜란 최초로 승전을 이루었다. 그때 국왕 선조는 그의 전년도의 귀국보고를 문제 삼아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승전에 관한 장계와 왕세자, 유성룡(柳成龍), 최황(崔滉) 등의 변호로 초유사로 임명되어 경상도로 되돌아가서 의병 창기와 왜군 격퇴에 신명을 바쳤다. 초유사로서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의 의병 창기와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과 감사, 수령 간의 불화를 잘 조정하여 의병의 희생이 적도록 하면서 왜적에게 실함된 여러 고을을 수복하고 내지로의 적의 침입을 막았다. 경상우도 감사로서는 진주의 군사적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 병력의 확보, 성지의 수축, 병기의 준비, 군량의 확보 등 왜적의 침입에 사전에 대비하게 하였다. 왜적이 진주성을 포위하기 전에 김시민(金時敏), 이광악(李光岳) 등의 관군은 진주성 내에, 곽재우, 윤탁(尹鐸), 정언충(鄭彦忠), 김준민(金俊民), 최경회(崔慶會), 조응도(趙凝道), 정유경(鄭惟敬) 등의 의병들은 성 밖 동서남북 사방에 미리 배치하였으며, 왜적이 쳐들어오자 성 내외에서 합동하여 대처케 함으로써 진주대첩을 거두게 하였다. 이 진주대첩으로 호남을 방어하게 됨으로써 국가 중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593년 기민 구휼과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던 중 진주 공관에서 순국하였다. 학문적으로 그는 이황의 적전고제(嫡傳高弟)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해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다.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류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으로 전해져, 한말 의병 창기와 안동 독립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家禮)≫에 따라 행했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 ≪구씨의절(丘氏儀節)≫, ≪향교예집(鄕校禮輯)≫등을 참고해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5)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임천서원(臨川書院),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海사錄)≫, ≪상례고증≫등이 있으며, <경연일기>, <조천일기>, <북정일기> 등이 전한다.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 : 道德博聞曰文 危身奉上曰忠)이다.
경내에는 묘우를 비롯하여 동서재, 강당, 전사청, 주사 등의 건물이 있다. 이들 건물 중 묘당은 동향으로, 강당은 남향으로 건립되었는데 이는 지형을 고려하여 건물을 배치하였기에 일정한 방향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문을 두고 있는 묘당인 숭정사(崇正祠)는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인 맞배지붕으로 내부에는 김성일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전사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고 강당인 홍교당(弘敎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으로 전면에는 반칸 정도를 더 내어 툇마루를 만들었다. 강당의 좌우 각 1칸씩은 방으로 만들었고 전면에 직방제(直方齊), 건척제(乾惕齊)의 현판이 달려 있으며, 대청에는 임천서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동·서재인 응도재(凝道齋)와 양호재(養浩齋)는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앞에 툇마루를 두고 뒤에는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정면인 입도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대문이다.
참고-안동관광정보센터 http://www.tourandong.com/ 안동의 서원 http://anu.andong.ac.kr/ 사이버한자 http://cyberhanja.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호서원(臨湖書院)
1707년(숙종 33)에 창건되어 김용(金涌)을 제향하여 오다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임천서원(臨川書院) 구지(舊址) 옆에 강당을 세워 김용을 제향했는데, 1981년 현 위치로 이건했다. 현재 임호서당(臨湖書堂)이라는 현판이 강당 내부와 외부에 게판되어 있다.
1)김용(金涌)1557~16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예범(禮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진(璡)이고, 아버지는 찰방 수일(守一)이며, 어머니는 사과(司果) 조효분(趙孝芬)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해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奉敎), 성균관의 전적(典籍)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正言)·헌납(獻納)·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 등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해 많은 활약을 했으며, 교리에 재임 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겨 그를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해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옮겨졌다. 이 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중앙 관직과 지방 관직을 전전하였다. 일시 제용감정(濟用監正)·세자필선(世子弼善)·집의(執義) 등 중앙 관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지방 관직을 지내면서 오직 백성의 보호와 학문의 진흥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냈다. 그 후 1616년 60세의 나이로 여주목사로 나갔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자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임호서원(臨湖書院)·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 雲川集≫·≪운천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보물 제484호) 등이 있다.
강당으로 쓰이는 임호서당과 아양루(我洋樓)가 1921년 건립된 후 1981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사주문으로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경내에는 강당과 동재가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렬서원(彰烈書院)
사육신 중의 한사람인 하위지(河緯地)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1804년(순조 4)에 창열사(彰烈祠)를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1809년(순조 9)에 송야리에 창렬서원을 창건하였다. 그 뒤 사림의 중의(衆議)로 안동시 서후면 이계로 이건하였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 서원 훼철(毁撤)에 의해 철폐(撤廢)되었던 것을 1989년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현 위치에 복설되어 매년 9월 2일에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1)하위지(河緯地, 1412~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적촌(赤村). 선산 출신. 윤(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지백(之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담(澹)이며,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감사에게도 그를 구료하도록 전지(傳旨)를 내렸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가 되어 ≪오례의주 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무함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그 해 ≪역대병요 歷代兵要≫와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학사의 품계를 수양대군 (首陽大君)이 앞장서서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靈山)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 1454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 해 집현전부제학에서 예조참의로 전임되었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선산에 퇴거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그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 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 후 그에게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署事制)를 폐지시키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대해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예(司藝)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국문(鞫問)을 받게 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刑 :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을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 작은아들 박도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해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 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 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는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경내의 건물은 3칸의 창렬사(彰烈祠), 4칸의 숭렬당(崇烈堂), 3칸의 성인재(成人齋), 2칸의 전사청(典祀廳), 3칸의 신문(神門), 3칸의 유의문(由義門) 등이 있다. 경사지에 산을 일부 깎아 건물들을 지형에 맞춰 건물들을 앉힘으로서 강당과 사당만 좌향을 하고 있고, 다른 건물들은 각기 다른 향을 바라보고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 경북서원지 청남 권영한 홈페이지 http://www.andongkwon.pe.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랑아제-펴뮤늬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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