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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빠작목반(rogpafarm)’ 청년들을 본 게 재작년이던가. 4대강으로 망가져가는 강 곁에서 농사를 짓던 청년들. 그들이 지켜내고자 정성을 쏟던 양평 두물머리. 3년째 주말농사를 짓고 있는 그 청년들이 문득 떠올라 ‘사직동 그 가게’에 들렀다. 짜이도 한잔 생각나고.
재작년 거기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베트 속담이 붙어 있었다.
온통 티벳 소품들로 넘쳐나는 가게 한쪽에 누군가 붙여놓은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의 사진 한 장이 눈에 띈다.
재작년 여기서 만났던 한 청년이 생각났다. 그 애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짧은 글귀 하나를 소개해 달라고 했었다. 고민하다가 나는 까뮈를 써주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돼 죽어간다.”
짜이 한 모금.
몸의 어딘가 아득하다.
티벳 고원의 바람에 나부끼는 타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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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을 지나는데 붉은 점이 보였다. 핏방울인줄 알았다. 점점 커져서 알아볼 수 있는 때가 되었다. 그건 붉은 석류였다. 붉은 석류열매로부터 노래가 흘러나온다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선율에 맞춰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랫말이 쓰고 싶어졌다. 머리맡을 더듬어 종이와 펜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쓰고, 계속 잤다.
11시쯤 잠에서 깼다. 찬물을 한잔 마실 때까지 전혀 기억에 없다가, 화들짝 떠올랐다.
침대 옆에 메모가 있었다. (헐, 이 짓을 진짜로 했군!)
아주 오래 전 이런 적이 많았다. 등단하기 전의 습작시절. 자면서 자주 메모를 남기곤 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너무도 자주 모호하게 뭉개지던 그때.
한참을 허리를 꺾고 웃다가 미친것처럼 잠깐 울었다. (음… 그러니까… 내가 울었다기보다… 나를 이루어준 무수한 나들이 울었다고 하자.)
나는 저 열매를 안다. 저 열매 속에서 오랫동안 잠을 잔 적 있지. 땅이 너무 뜨거울 때 너무 추울 때. 저 열매 속에서 벌거벗은 나를 만난 적 있지. 하얀 눈밭 빙원에서 꿈꾸는 열매. 따뜻한 열매. 얼음속의 엄마. 울지 말고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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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한국 춤과 살아온 미학자이자 무용평론가가 한가위 인사로 “얼이 얼얼한 날들입니다.” 라고 문자메세지를 보내주셨다.
얼이 얼얼하다.
얼: ‘정신의 줏대’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
얼, 혼, 넋/ 정신/ 마음.
얼간이(얼이 나간), 얼뜨기(얼이 떠버린), 얼빙이(얼이 비어버린), 얼빠지다, 혼빠지다, 혼불, 혼줄, 혼나다, 혼내주다, 넋이 나가다, 넋 건지기, 넋두리, 넋을 놓고……
흔히 통용되는 말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얼이 얼얼하다’는 말을 처음 보았을 때만큼 신선하지 않다.
뭐가 문제지?
말은 언중 속에서 지혜롭게 진화하기도 하지만 무뎌지기도 한다. (그러니 정신 차리자, 활!)
동양적 사유에서 몸은 정신과 분리되지 않는다. 몸은 영/혼/넋/얼/정신의 단순한 집이 아니다. 육체와 정신이 융합된 공간(성)으로서의 몸. 이 융합은 불일불이(不一 不二)하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정신에 관여된 말들이 육체로부터 이분법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 듯하다. 몸을 혼, 얼, 넋의 거주지 정도로 대상화 시킨 표현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들거나 나거나 빠지거나 비거나……
다시, 탈주의 필요.
‘얼이 얼얼하다’는 표현은 몸과 분리된 얼이 아니라 몸을 이룬 얼이 총체적으로 얼얼하다는 느낌이 든다. 평생 춤과 살아온 분의 표현이라 그런 걸까.
답메세지를 드렸다.
“네, 선생님. 얼이 얼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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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민둥산’에 얽힌 이야기를 하다가 맨 앞줄에 앉아있던 머리 희끗한 여자분과 눈이 마주쳤다. 그분의 눈빛이 뭔가를 상기시켜서 문득 떠오른 시가 ‘왕모래’였다. 첫시집에 수록된 시이니 13년 전 어느 날 ‘왕모래’를 낭독해 본 이후로는 청중 앞에서 낭독해본 적 없는 시.
그런데 그 시가 문득 읽어싶어졌다.
낭독했다.
맨 앞줄의 그 분이 훌쩍이셨다.
아마도 이 시를 그 분 혼자 묵독했다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건 낭독의 힘이다. 낭독이라는 특별한 사건: 언어가 숨결로, 몸과 공기의 파동으로 전해지는 특별한 목숨의 감각.
묵독할 때는 이해를 위한 지적작용이 활성화되지만, 낭독할 때는 감각/정서가 통째로 움직이는 듯. (노래가 주는 감응력이 그래서 빠른 거겠지.)
낭독을 즐기는 편이지만, 나는 여전히 암송은 별로다. 짧은 시도 텍스트를 확인해가며 읽는 게 좋다. 외부에 놓인 텍스트의 상태를 한 줄 한 줄 확인해가며 읽는 느낌의 각별함. 내가 만든 것이지만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창조물을 더듬거리며 만져가는 듯한 순간의 떨림들. 시가 시인에게 완전히 속해있는 것 같은 도취의 느낌이 최대한 절제된 낭독이 좋다.
낭독의 사건― 이 특별한 몸의 경험을 일상에서 보다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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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정성을 다해 사는 거.
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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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읽고 반했던 책이 다시 나왔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성들>. 아름다운 책들의 복간이 반갑고 고맙다.
카를 융 연구자로 40년 남짓을 심리 치료 전문가로 활동해온 클라리사 에스테스. 가슴에 불을 얹고 미친 듯 돌아다니던 이십대의 한 시절에 그녀의 작업은 내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세계 여러 곳의 신화와 설화의 원형 분석, 그것을 통한 심리 분석의 매우 영적이면서도 담대한 탐험들.
그녀가 말하는 타고난 '야성'(wild essence). 이 말 참 좋다. 와일드 에센스.
오랜만에 다시 펴본 책. 여전히 재미있다.
“우리가 무엇이 됐건, 우리 뒤에 걸어오는 그림자는 분명히 네 발 달린 짐승이다.”
뼈를 모으는 사막의 여걸 로바는 여전히 설렌다.
발트해 전역에 퍼져있는 ‘바살리사 이야기'는 매우 평범하면서도 묘하게 강력하다.
바살리사가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한, 바살리사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자기존중감이 상실된 순간 삶이 지옥임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가.)
소녀 바살리사는 숲속의 마녀 바바 야가를 만나 비로소 자신 속의 여걸을 깨닫고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야성의 여걸과 담대하게 마주하기. 착한소녀 콤플렉스를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 과잉보호의 상냥한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숲속의 무서운 마녀를 만나라.
세 덩이의 숯: 삶-죽음-삶.
“우리는 해골의 빛으로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융 심리학을 토대로 한 심리치유는 변화가능성을 개인의 노력에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지혜롭고 매우 문학적이다.
세상의 딸들에게 두루 권하고 싶은 이런 책 한권 쓰고 싶다. (장르는 글쎄, 뭐가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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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시.
일상과 시의 결합.
일상이 시를 창조하기도 하지만 시가 일상을 창조하기도 하는 그런 틈새 만들기.
창조적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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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고서원의 용준이 이번에 번역한 <시적 정의 Poetic Justice>를 보내왔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의 저자는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
약력 중 눈에 띄는 대목: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과 함께 GDP가 아닌 인간의 행복에 주목하는 ‘역량이론’을 창시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발전과 사회정의란 사람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자유를 부여하는데 있다고 설명하는 이 이론은 유엔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의 바탕이 되었다고.
저서 목록 중엔 <사랑의 지식 Love's Knowledge>, <동물 권리 Animal Rights>, <정치적 감성 Political Emotions>등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이 문학의 힘임을 믿고 있는 이 법철학자는 휘트먼의 <풀잎>이나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같은 작품들이 문학적 상상력의 힘으로 공적 영역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사실 좀 지루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내겐 용준의 역자후기가 참 좋았다. 아, 이 아이들이 이렇게 컸구나. 이 어여쁨들!
용준은 하워드 진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평생 불의에 맞서 싸웠고,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자 ‘미국의 양심’으로 불렸던 하워드 진. 그에게서 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인간적 따뜻함과 다정함은 여전히 내 삶의 가장 ‘결정적 순간’으로 남아있다”고 쓰고 있는데, ‘인간적 따뜻함과 다정함’이라는 표현 앞에서 나는 한동안 미소 띤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그런 게 아니라면 인생이 무엇이겠니.)
87세의 하워드 진을 앞에 놓고 인터뷰를 하는 내내, 용준은 어떻게 하면 한 인간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궁금했다고 한다. (그렇지, 하워드 진은 제인 구달과 함께 내가 다섯 손가락에 꼽는 아름다운 노년의 얼굴과 아우라를 가졌다.) 그래서 물었다고 한다. 삶의 어떤 가치와 경험이 당신을 형성한 것인지. 용준의 질문에 진은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과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등 몇 권의 책으로 답했다고.
80대의 진이 20대의 용준과 마주앉아 대화하는 그 순간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문학이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문학을 통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용준이 옮겨놓고 있는 진의 말: “어려운 시절에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지금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공감, 용기, 친절, 다정함, 희망 같은 말들이 전복, 상상력, 변혁 같은 말들과 자연스럽게 섞이는 순간들의 찬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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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자기계발서들이 끔찍한 종류의 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쓸모 때문이다. 자기계발서들이 주창하는 자기계발의 목적은 결국 자기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귀결된다. 자기를 계발해서 보다 경쟁력 있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경쟁력 있는 자본주의형 인간이 ‘교양인’으로 포장되는 과정의 역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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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위험한 철학자'로 불리는 지젝과 알랭 바디우가 한국에 왔다.
어마어마한 지젝의 인기에 심드렁한 것처럼 나는 바디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왜 나는 그들이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들이 구사하는 스펙터클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가 않다. 신뢰가 가지 않을 뿐 아니라 지루하다.
현실정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태도에 대한 기본적인 호의와는 별개로 나는 그들이 자기 이론을 세상과 조우시키는 방식이 여전히 구태의연하다는 느낌이 든다.
늘 그렇듯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판. 화려한 말들의 향연. 그리고? 그래서? 그 다음엔? 지금 이 순간 우리 생의 조건인 일상의 현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일상의 변화 가능성에 구체적 정성을 쏟지 않는 스펙타클은 빈 수레처럼 요란하고 번쩍거리며 헛헛하다.
백만 마디 말보다 한 순간의 숨결, 따스한 포옹이 일상을 변화시킨다. 사람의 ‘살림’은 그런 공감과 따스함으로 힘을 얻어 움직인다.
진정 어린 한 줄의 시행, 소설 한 문장은 그러므로 얼마나 값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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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알랭 바디우의 <베케트에 대하여> 때문인지 ‘고도를 기다림’에 대한 비유가 많아졌다.
기다린다- 오지 않는다- 그래도 기다린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이 중요하다, 기다리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이 만들어진다…… 뭐 이런 종류의 계몽은 노쌩큐.
에스트라 공과 블라디미르가 기다리는 것이 일종의 개안(開眼) 상태라면 좋겠군. 우리 옆에 혹은 우리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고도와의 조우 말이지.
희망이 외부로부터 오리라는 허상을 깨뜨리기. 외부로부터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엠마 골드만 식으로 말하자면 ‘스스로 춤출 수 없다면 그것은 너의 혁명이 아니다.’
자신 속의 고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고도가 외부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놀이.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메시아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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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정한 대로 글이 흘러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여전히, 앞으로도 내내, 내 삶의 좋은 반려가 되리라고 낙관 하는, 터무니없이 행복한 오후.
괜찮다. 쓰고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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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온사인 작렬하는 밤의 서울 한복판에서 밀려드는 공포.
이 지독한 폐허의 순간에도 삶이 지속된다는 사실의 오싹함.
망해가는 세상, 이미 망한 세상에서, 지지고 볶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살아간단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다니! 이 폐허 속에서!
인간은 놀라운 존재임이 틀림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이로운 존재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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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이제 아침과 저녁과 밤에 각각 다른 사람이 된다.
언제부터였나. 헤아려본다.
내가 스물다섯 무렵 큰 수술을 받은 엄마. 그 후 기적처럼 회복하셨다.
스물일곱 살에 내가 등단했을 때 엄마는 시인이 된 나를 품에 안고는 말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내 딸이 시인이 되는 걸 보다니!
그리곤 덧붙였다.
큰 작가가 되세요.
갑작스런 엄마의 존댓말에 쑥스러워진 내가 그때 웃었든가 눈물이 핑 돌았든가.
아무튼 엄마는 내가 강릉 집에 전화를 하거나 엄마 친구들이 와 있을 때 집에 가기라도 하면 나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우리 시인 딸!” “응. 우리 작가가 웬일인가.” 엄마 친구 분들 사이에서 나는 엄마의 ‘넷째 딸’이라기보다 엄마의 ‘작가 딸’이다.
일상이 된 몸의 고통. 다행히 엄마는 그 고통들과 적당히 놀아 주며 15년을 잘 견뎠다. 그리고 다시 쓰러졌다. 오래전엔 몸의 오른쪽이 이번엔 몸의 왼쪽이 캄캄해졌다.
다시 조금씩 몸속에 빛을 들이려고, 혹은 몸속에 아직 남아 있는 빛을 찾아 안간힘을 다하는 중.
한밤중에 일어난 엄마가 자리에 누운 채 물끄러미 창을 내다보고 있다. 모처럼 정신이 아주 맑으시다. 엄마는 예전의 엄마 그대로 이렇게 말한다.
“절에 가고 싶은데…….”
한밤중에 나는 엄마 옆에 붙어서 종알거린다.
“응 그래. 어디로 갈까. 월정사? 상원사? 낙산사? 휴휴암? 낙가사?”
엄마가 좋아하는 절집 이름을 속삭여 드린다. 엄마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 그냥 딸이 아니라 ‘시인 딸’, ‘작가 딸’인 나는 이제 본업을 시작해야지.
당간지주 밑자리가 따뜻해. 우리 보고 어서 오라고 당간에 매달려 뭔가 나부끼는데? (뭐가?) 부처님이 그려진 탱화야. (나무관세음보살…… 지장보살님!) 그러고 보니 엄마, 저건 우리 마음이야. 엄마랑 나랑 마음을 그려 놓은 것 같아. 엄마가 좋아하는 목어도 울리고 내가 좋아하는 법고도 울리고. 범종 소리 들어 봐. 깊고 그윽하지? (그러네, 오늘은 유난히 좋구나.) 연등을 달까? (응, 그래야지.) 둥글고 환한 연꽃들이야. 어쩜 저렇게 예쁘지? (너도 참 예뻤는데) 에이, 엄마 눈에 안 예쁜 딸이 어딨어? (그런가?) 엄마, 정토에 왕생하는 사람은 모두 연꽃 속에서 태어난대. (연 속에서? 세상에나!) 엄마 자궁에서 내가 자라고 태어난 것처럼, 둥글고 환한 연꽃 속에서 사람들이 태어나는 거야. (나무관세음보살……) 옛날 인도에선 말야. 물 밑에서 잠자는 정령 나라야나의 배꼽에서 연꽃이 솟아난다고 생각했대. (뭐라? 누구 배꼽?) 응, 엄마 배꼽처럼 말야. (나, 인도에서 보리수 본 적 있다. 예전에 나 아직 건강할 적에 불자들 신도회에서 성지순례 갔잖냐. 그때 내가 가져온 보리수 잎사귀 너도 갖고 있지?) 그럼, 갖고 있지. (그래, 잘 가지고 있거라.) 염려 마. 내 보물 상자 속에 들었어. 그러니까 엄마, 상상해 봐.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말야. 엄마 배꼽에서부터 탯줄처럼 연 줄기가 자라고, 따뜻한 자궁처럼 연꽃 봉오리가 벌어지는 거야. 그 속에서 짠! 내가 태어난 것처럼, 엄마도 그렇게 다시 태어나는 거지. (누구 배꼽에서 자라는 거라고?) 글쎄, 엄마는 외할머니 배꼽에서 자라난 연 줄기에서 태어나려나? (그래…… 그러면 참 좋겠구나.) 그러니까 우리의 몸속엔 연지蓮池가 출렁이고 있는 셈이래. (그러게나!)
연꽃을 보는 일은 마음을 마음 밖에서 보는 일 같다. 연꽃은 심장 같고 자궁 같고 몸속 같고 몸 밖 같다. 연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 심心 자를 소리 내 읽는 엄마가 떠오른다.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엄마가 홀로 깨친 몇 안 되는 한자 중 하나인 心자. 언젠가 서예전에 모시고 갔다가 ‘일체유심一切唯心 즉심시불卽心是佛’을 읽던 엄마. 이것은 한 일자! 이건 마음 심자! 이것도 마음 심자! 이 글자는 부처님 불자! 여덟 개의 글자 중 아는 글자가 네 개나 되어 기쁘고, 그중에 엄마가 좋아하는 마음 심心자가 두 개나 되어 또 기쁘고.
그러고보니 心자는 연꽃이 피는 연지 같기도 하고, 꽃비 내리는 연좌대 아래 같기도 하다.
엄마가 어느 틈에 쌕쌕 숨을 고른다. 나는 이불을 여며드린 후 뜰에 나가려고 조끼를 입는다.
“우리 시인 딸, 그러니까 연꽃이 심청전처럼 벌어지는데 그 안에 절이 있다는 거지? 당간지주가 있고 사천왕문이 있고……”
내 기척에 설핏 깬 엄마가 졸린 목소리로 말한다. 맞아, 엄마. 그 절에 갈까? 그래…… 그 절에……가고 싶구나.
잠든 엄마의 뺨에 입을 맞춘다.
다음번 책은, 엄마, 당신을 곁에 앉혀놓고 이야기 들려주듯이, 그렇게 쓰도록 할게.
엄마가 궁금해 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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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택시. 라디오 모 프로그램에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인류 보편적 현상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스트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프로이드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트라우마로 인해 세워진 가설들이 일반적 진리로 포장되는 과정이 한국사회에선 너무나 간단히 일어난다. 그가 지닌 일관된 여성 혐오와 남성 우월주의 관점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모두 증발해버린 채.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 한국사회의 특수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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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신론자에 가깝다. 나는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날마다 백팔 배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무신론자이다.
나는 작고 예쁜 교회, 성당, 고즈넉한 절집을 좋아한다. 나는 무신론자에 가깝다.
이런 문장의 배열에 나는 아무런 문제를 못 느끼는데,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왜 성소를 찾으며 누구한테 기도를 드리냐고 묻는다.
이렇게 물어올 때 들려줄 수 있는 시를 한편 쓰고 싶다.
흰 눈 오시는 밤. 자작나무 숲속이면 좋겠다. 노트 한권과 펜 한 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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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원숭이 무리 중에서도 사육사가 던져준 바나나를 사육사에게 다시 집어 던지는 원숭이가 꼭 한 두 마리씩 있다고 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사육사가 던져준 바나나 앞에서 그것을 먹을까 말까 고뇌하는 원숭이. 그것을 집어던지는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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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찾아온 대학생 한나 아렌트에게 마틴 하이데거가 했다는 말:
“생각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네”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관계. 독일인과 유대인. 나치 동조자와 비판자. 첫 만남 이래 아렌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무려 50년간 유지된 그들의 관계. 십 수 년간 서로 만나지 못한 경우도 있고, 편지를 주고받은 것도 그리 자주라 할 수 없는데, 그들을 이어준 건 대체 뭐였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류의 사랑조차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것.
(계간발견 2013.11.29)
첫댓글 발견문학상을 축하하며
계간발견사에서 인용한
짧고도 굵은
마지막회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