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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수도 장안(長安)이라 불렸던 시안(西安)을 다녀와서
첫째 날(2010 10월 2일, 토) 7시 30분 인천 공항 도착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꼭두새벽부터 서두른다. “고대 문화 탐방, 서안 4일”의 일정에 맞추려고 어린아이처럼 설레기까지 하면서….. 이미 공항은 들떠 있었다. 여기저기 반가운 얼굴들이 손을 내밀고 상기된 표정으로 반갑게 맞는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한참 잘 나가던 꽃다운 나이에 “68학번”으로 안암 골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동질감에다 환갑을 지난 나이에 일상을 훌훌 털고 교우들과 여행을 나섰으니 까짓 문화 탐방이면 어떻고, 관광이면 어떤가! 친구들과, 게다가 68 교우회에서 20만원씩 대줘 횡재를 얻어 가며 떠나는 여행인데.
로칼 타임 11시 45분, 시안 공항에 도착한다. 45명의 일행이 한 버스에 동승하여 복작거리긴 했지만 두창대 회장의 정겨운 인사말로 여행의 운(韻)을 뗀다. 이어 부회장 현숙의 능숙한 광고도 뒤 따르고. 예쁘장한 30대 조선족 가이드 홍매씨가 “1일부터 일주일간 중국 국경일 연휴기간이라 다소 복잡은 하겠지만 어제까지 비가 왔는데 오늘은 아주 좋은 날씨를 선물 받았다”고 여행 중에 으레 듣게 되는 인사인걸 알면서 밉지가 않다.
시안(西安), 지금이야 중국의 1개 성의 하나인 산시성(陝西省)의 성도에 불과하지만 왕년에는 장안(長安)이라 불리며 수도(首都)의 대명사가 되었던 고도이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세운 호경(鎬京)으로부터 시작하여 BC 202년 전한(前漢)의 수도가 되어 장안이란 이름으로 당(唐)나라까지 10개도 넘는 왕조를 거치며 국도로 번창하며 유럽에까지 명성을 드날렸으나 당나라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 유적이 산재하여 중국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이기도 한 도시다.
진시황의 미완성 드림 아방궁(阿房宮) 서안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찾은 곳은 아방궁이었다. 아방궁은 처음으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수도 함양(咸陽)에 있던 함양 궁이 좁다면서 폼을 잡으려고 아방촌(阿房村)에 새로운 궁을 세우려고 했던 꿈의 궁전이다. 시황제가 죽은 후에도 공사를 계속하였지만 진이 멸망하면서 미완성으로 끝나 버리는 바람에 이름도 없던 신세였으나 지명을 따서 아방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거창하고 화려한 집을 우리는 아방궁이라고 한다. 진시황이 지으려던 아방궁은 한마디로 표현할 길이 없다. 물경 동서로 700m이고 남북으로 120m에 이르는 2층 건물로 궁 안에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니 현재 남아 있는 궁전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명(明)과 청(淸) 시대에 주름을 잡던 북경의 자금성(紫禁城)은 애들 말로 게임이 안 된다. 궁전 터의 북쪽은 고원이고 남쪽은 위강(渭江)으로 땅을 넓힐 수가 없게 되자 숫제 위강을 메워 버렸다고 한다. 중국에서 많은 것 중 하나가 사람이라지만 2천년 전에 강을 메우다니 시황제다운 발상이다. 불로초를 찾으려고 우리나라에 사람을 보낼 만큼 불로장수가 철전지 원이었던 진시황은 꽃봉오리 처녀를 품고 자면 기를 받아 장수한다는 설을 믿고 전궁(前宮)을 두어 3천 궁녀를 거느리고 돌아가며 하루씩 머물렀다고 하니 오래 사는 건 고사하고 얼마나 힘겨웠을까? 측은지심이 생긴다. 아무리 거대하고 호화로운 궁이면 뭐하랴 BC 207년 진이 멸망하면서 항우에 의해 불태워 졌고 불길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하니 얼마나 크고 웅대했으면 그랬으랴 어안이 벙벙하다. 현존하는 아방궁은 모두가 후대에 엉터리로 복원한 것으로 보여 격이 떨어져 그다지 감흥이 일지도 않을뿐더러 당시의 규모는 물론이고 채색이며 문양 등을 전혀 가늠할 수가 없어 못내 아쉬웠다.
중국 최대의 종루(鐘樓) 야경 서안의 종루는 1384년 명나라의 초대 황제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것으로 중국에 남아 있는 종루 중 가장 규모가 큰 것 중 하나이며 서안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종루는 매시 정각마다 새벽에서 저녁까지는 종을 쳤고 밤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려 줬던 시계탑이다. 꽤나 높은 벽돌로 만든 제단 위에 3층짜리 누각을 세워 웅장하다. 붉은색 등으로 밝힌 종루의 야경이 호화롭다. 역시 중국은 온통 붉은색이다.
종루의 야경을 감상하고 섬서 가무쇼 극장을 찾았다. 섬서성의 소수 민족들이 펼치는 가무쇼다. 무희들의 화려한 춤이 간단없이 이어졌으나 관중이 가득 차 숨이 막히기도 하고 중국어로 소개하는 통에 재미가 없는데다가 하루의 피로 때문에 쪽 팔리게 졸음이 엄습을 한다. 허나 천만 다행으로 조는 사람이 많은 한밤중이었다.
둘째 날(10월 3일, 일) 느긋하게 일어나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 중국 수박이 입맛을 당기게 한다. 대추며 사과도 꽤나 달콤하다. 실컷 먹어야겠다는 유혹이 앞선다. 그뿐이랴 호텔에서 간식거리로 사과와 대추를 슬쩍 돌려 버스 속에서 먹는 맛은 더 맛 있었다. 화청지(華淸池)를 향해 리산(驪山)으로 향했다.
양귀비가 즐겼다는 온천이 있는 화칭츠(華淸池) 화청지는 여산에 위치한 온천이다. 61세 되는 당 현종(玄宗)이 화청궁을 증축하고는 며느리였던 26세의 양귀비에게 넋을 뺏긴 나머지 목욕탕을 지어 주고 해당탕(海棠湯)과 연화탕(蓮花湯)에서 때를 빼며 로맨스를 즐겼던 것으로 유명한 온천이다. 허나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매일 목욕이나 즐기고 여주 과일을 먹으며 즐긴 불륜의 사랑이 아무리 뜨거운들 무엇 하리. 죽자 살자 목을 매던 현종이 사랑보다 목숨을 택하는 변심에 불과 38세에 목을 매 절세 미인도 그 아름다움을 마감했으니……. 인생은 무상한가, 무심한 인심인가 우리는 양귀비가 목욕을 즐겼다는 욕실을 보며 목욕을 하고 나서 어디에서 머리를 말렸을까? 현종을 유혹하기 위해 누각에 걸터앉아 머리를 빗질했을까? 깔깔거리며 디카의 셔터를 누르는데 정신을 뺏기고 있었다.
진시황릉 병마용 갱(秦始皇陵 兵馬傭 坑) 진시황릉에서 지근 거리에 위치한 병마용 갱을 찾았다. 병마용 갱은 진시황의 사후를 위해 수많은 진나라 모습의 군사, 말 등을 흙으로 빚어 구워 등신대(等身大)로 제작한 토용(土俑)을 매장해 놓은 지하 갱도이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고 아직도 발굴 중이라고 한다. 우리가 본 3개의 갱 중 가장 볼만한 곳은 전투 부대 모형의 1호 갱으로 수많은 군사와 말이 빽빽하게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군사들의 토용은 머리가 잘려 나간 것이 있고 쓰러져 부서져 널브러져 있는 것도 있기는 하나 마치 군기가 바짝 들어 살아 있는 듯 위풍당당한 모습에 엄격하고 장중한 표정은 감탄을 자아내게 했고 세 겹으로 중무장한 복식의 옷을 입고 손에 칼을 쥐고 눈을 부릅뜬 장군을 위시하여 계급별로 도열하고 있는 병사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은 놀랄 만큼 감동적인 장관이었다. 한 사람의 사후 무덤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수많은 토용을 만들다니 권력의 힘이란 어디까지며 사람의 능력의 한계란 어느 만큼 이란 말인가! 병마용 갱은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다.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의 러브 스토리 장한가(長恨歌) 쇼 오전에 들른 화청지에서 장한가 공연을 관람한다. 장한가는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쓴 당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의 러브 스토리를 한풀이로 읊은 장편의 서사시다. 밤 기운이 매우 차다. 가이드의 안내도 있고 하여 여러 겹의 옷으로 몸을 감싸고 스카프를 둘둘 둘러도 추웠다. 인파에 부대끼며 가까스로 자리를 찾는다. 라이터도 안되고 카메라도 안 된다는 안내지만 이곳 저곳 플래시가 번뜩인다. 서서히 막이 올리면 황제와 절세미인 양귀비가 만나는 장면이 시작을 알린다. 연꽃 배를 타고 양귀비가 등장한다. 화청지에서 목욕을 즐기는 양귀비, 현종의 병적인 집착, 안사의 난, 양귀비의 죽음, 현종의 애절한 후회 그리고 칠월 칠석날 천상에서의 재회가 웅장한 스케일의 무대와 진짜 같은 조명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바탕으로 환상적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공연은 스펙타클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수년 전 계림에서 관람했던 장예모가 연출한 인썅류싼제(印象劉三姐)의 공연과 비견될 만큼 깜짝 놀라게 한 공연이었다.
셋째 날(10월 4일, 월) 대안탑(大雁塔) 명나라 초기에 서안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서안 성벽을 보고 난 후 대자은사(大慈恩寺)로 향했다. 보존한답시고 경내 입장을 금지하여 먼발치에서 경내의 대안탑을 바라 보기만 한다. 대안탑은 당나라 고승이며 서유기 소설의 현장(玄奘) 삼장법사가 인도에서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경전이나 불상 등을 보존하기 위해 건립한 64m 높이의 7층 탑이다. 당나라 때부터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이 탑에 새겼었고 백거이도 최연소 합격자로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대안탑 광장에서 펼친 분수 쇼는 많은 인파와 시간 관계로 대충 일별하고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모였으나 한 친구 재숙이가 보이질 않았고 찾으러 갔던 친구들도 함흥차사.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여유 있는 폼으로 의기양양하게 나타난다. 여기 저기서 “행님, 행님 오셨다”며 졸지에 재숙은 형님이 되어 있었다.
비석이 숲을 이룬 비림(碑林) 비림은 많은 비석이 모여 숲을 이루었대서 비림이라고 부른다. 천여 개의 비석이 전시돼 있다. 역대 중국 명필들의 글씨 솜씨와 다양한 필체를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당대(唐代)의 최고 명필로 평가를 받고 있는 현종의 친필로 새긴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는 너무 의외였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당 현종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다는 게 놀랍다.
중국 여행의 필수적인 거사 마사지 이번 여행의 히트는 양귀비 탄생이었다. 여자들에겐 중국과 동남아시아 여행을 하며 필수적으로 꼭 해야 하는 거사가 하나 있다. 전신 마사지다. 서안 여행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것도 낮에 마사지를 즐겼다. 여자의 나이는 속일 수가 없어 마사지를 하기 전에 한 친구가 두둑이 나온 배를 창피해 하는 말에 장기완씨의 부인이 “나도 나왔다”고 하자 눈치 빠른 어린 마사지사가 “양귀비”하며 예쁘다는 제스처를 해 좌중을 폭소케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기분이 Up되었던 Mrs 장은 선뜻 그 방에 있던 열명의 팁을 내는 선행을 베풀었다는 훈훈한 후문을 남겼다.
고씨 장원과 회족(回族) 거리 형님 재숙은 저녁 식사에선 건배를 제의하며 씩씩한 패기로 흥을 돋워 주었고 재치가 만점인 정옥이의 건배가 이어지고 신우철씨 내외가 가져온 김치와 김을 내놔 서안에서의 마지막 밤의 성찬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저녁을 마치고 느지막이 회족 거리로 나섰다. 소수 민족의 하나인 회족이 밀집하여 살며 음식과 여러 물품들이 널려 있는 거리는 우리의 야시장 같은 분위기로 꽤 흥미로워 보였다. 이 거리에 고씨 장원이라는 집이 있었다. 우리로 치면 고씨 집안이 거주하는 양반집에 해당한다. 명나라 말기에 황제가 고씨 집안에 하사한 벽돌과 나무로 지은 전통적인 사합원(四合院)의 저택이다. 민간 저택이 어마어마한 면적에 방이 무려 86개라는 규모가 대단하다. 명과 청 시대의 건축 양식과 인테리어를 차근차근 관찰하면 재미있겠다 싶었으나 고가구와 도자기며 액자, 액세서리 등이 너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밤이라 으스스했다.
에필로그 회족 거리를 빠져 나와 호텔로 들어 가는 발길이 더뎠다. 서안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는 핑계로 그냥 들어가기엔 왼지 서운했다. 그렇다고 여자 교우들끼리 무작정 나설 수도 없고 주저하는 와중에 남자 교우들이 나서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 주르륵 따러 나섰다. 호텔 밖은 시안역이었고 상점도 즐비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쇼핑도 하고 한적한 서안의 밤거리를 배회하며 깔깔거리며 마냥 거닐었다. 아무리 시시한 것이라도 추억으로 채워 나가야지! 그렇게 서안의 밤은 깊어 갔다.
메모도 하지 않고 가이드의 설명도 건성건성 듣고 졸랑거리며 따라다니기 바빴는데 엉겁결에 여행기 지명 대타가 되고 말았다. 며칠이나 됐다고 알량한 기억만으로 쓰려고 하니 가물가물 아리송하다. 이번 여행을 마련한 회장단에 감사함을 전하며 격의 없이 대해 주었던 남자 교우들의 영원한 반려자들과 간만에 마음을 오픈한 간호학과 교우들과 함께 해서 더욱 행복했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다시 즐겁고 재미있는 여행을 하길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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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임작가... 원희야, 오랜만이다. 정말 내가 그곳에 가서 함께 여행하는듯 재미있게 잘 읽었다. 이렇게 옛친구들과 함께 여행할수있는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은구야 오랫만이고 반가워. 작가라니... 수줍음!ㅎ
미국에서 부지런히 잘 살고 있다는 소식 간간히 듣고 있어.
우리도 자주 만나서 또 여행하면 좋겠는데...
한번 가 봐야지 하고 별렀었는데 이제는 안가도 될듯하니 여비 남는것 어찌 할거나 ㅎㅎㅎ 욕심을 조금 부리자면 사진 몇장 첨부했으면 어땠을까 ㅎ
에너지가 펄펄 넘치는것을 느끼겠네. 사진도 많이 찍고... 시골에 있으니 이름 모를 풀, 꽃에 관심이 가지지. 사진은 아직 올릴 실력도 못 되고요.좀 열심히 컴 배운후에 하겠습더.ㅎㅎㅎ
임 작가~! 혼자 그리 마니 마니 여행다니면...토론토에 사는 내가 부러버서 어떡하라구~^^ 흑 흑...ㅋㅋ 앞으로도 마니 마니 여행다니구..멋진 여행기 부~탁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