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구지'가 있는 '중경重慶:총칭- 雙重喜慶(경사가 겹친다) '는 의미에서 도시의 명칭이 유래된 중경은 사천분지의 동남부에 있으며, 장강과 가릉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중국 서남지구의 중요한 공업기지이다. 1997년 8월 전국 4대 직할시 중의 한 곳으로 지정되었다. 역사가 오래되고 고대 巴국의 도읍지였던 중경은 교외에 자연 풍경지와 역사적 명소가 매우 많다. 또한 삼협 수상 운수선의 시발점이며 연평균 기온이 18도c이며, 가장 추운 1월 평균기온이 7도C로 춥지 않다. 단 여름에는 최고 온도가 43.8도C까지 오라가서, 무한(武漢), 남경(南京)과 함께 장강 유역의 " 3대 화로"로 불린다. 면적은 8만km이며, 인구는 3000만여 명이다. 사계절이 분명하고 자원이 풍부하며 교통이 발달되어 있어서 많은 관광객과 비지니스맨들이 찾는 곳이다. 또한 카르스트 지형으로 동굴, 온천, 협곡 등이 많다. 지형: 중경지형은 대체로 산지이나 남쪽부터 양자강으로 갈수록 낮은 지형의 구조이며 서북 및 중부는 구릉성의 산도 있다. 동남부는 대파산맥(大巴山脈) 및 무릉산맥과 접하고 있다. 기후는 아열대 계절풍 기후로 연중 비교적 따뜻한 편이나, 습도가 높아, 겨울철에는 실제 체감 온도는 무척 추운편이며 여름철도 무척 더운편이며 연평균 기온은 18.4도C, 연간 강우량 1,000mm이상이며, 연평균일조 시간이 짧고 3~5월의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늘 흐리고 안개가 많은 기후다. 주민: 다민족으로 구성된 四川省에서 분류한 중경시에도 23개의 민족이 있으나 대부분이 漢족이며 한족 이외에는 土家族, 苗族, 回族, 蒙古族, 藏族 등이 많은편이며 이중 土家族 인구는 100만명을 초과한다. 重慶市의 소수민족 인구는 198만명이며 전체인구의 6.4% 차지, 중경사람들은 북경이나 상해인에 비해 성격이 비교적 직선적이다. 체구는 왜소한 편이며 지역의식이 강하다. 현지 방언은 북경 표준어에 능통해도 알아들을 수 없다. 또한 중경 토박이들은 성격 그대로 매운 음식을 아주 좋아한다. 한국인들과 비교해서 ' 한국인이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면 자신들은 맵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고 할 자랑스럽게 말할 정도 종교: 종교 생활은 노인층에서 가장 활발한 편이며, 소수 민족(回族, 藏族)을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은 불교를 믿고 있다. 반면 최근에는 청년 계층들 위주로 기독교와 천주교도 상당한 교세를 가지고 있는 추세이다. 음식은 훠꿔(火鍋)가 중경을 대표음식으로 삼국시대(전쟁중에 산에서 큰솥에 모든 재료를 넣고 끓여 먹던)부터 전해 내려온 훠꿔는, 소고기, 양고기 해산물, 야채 등을 육수 국물에 끓여서 먹는 요리로 고기와 야채의 향기를 증가시키기 위해 얼얼하게 매우면서도 신선하고 뜨거운 요리맛이 특징이다.
중경은 북경, 상해, 천진과 함께 중국 4개 직할시중의 하나로 3,0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역사문화 도시이다."兪州"라는 古稱을 갖고 있으며 1189년부터 "중경"이라 칭하였다. 양자강과 가릉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해 있는 내륙도시로 기원전 10세기경 巴人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중원과 다른 독자적 문화를 형성했던 곳이다. 따라서 중경과 성도를 포함한 지역을 巴 蜀이라고도 한다. 秦대에 중국에 편입되었으며 남송 초기에 현재의 명칭이 확정되었다. 항일전쟁시기 국민당정부의 임시수도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이 관광객에 개방되고 있다. 중국 명, 청나라 때부터 물류집산지이며 1891년 대외통상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구지 이곳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45년 1월 부터 11월까지 사용한 마지막 청사이다.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현 노신공원) 의거를 계기로 일본군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서 항주 . 가흥. 진강. 장사 . 광주 . 유주 . 기강 등지를 거쳐 1940년 중경에 도착 하였다. 중경 임시정부는 양류가 . 석판가 .오사야항 등으로 옮겨 다니다 마지막에 이곳 유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에 정착하였다. 이 연화지 청사에서 임시정부는 광복을 맞이하였다. - 1991년 충칭의 도시개발 계획으로 인해 청사 존립의 위기가 생기자, 당시 삼성그룹에서 재원을 제공하여 연화지의 청사 부지를 매입하여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이 청사는 대한민국 독립기념관과 중경시의 협의 하에 1995년 8월 11일 복원하였고, 200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설 60주년을 맞아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고 전시를 확장해 역사에 길이 남을 유적지로 단장하였다
이곳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 비해 12배나 크며, 충칭시는 현재 연화지 청사를 市級文物保護單位로 제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라고 쓰여진 건물 쪽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임시정부청사였던 건물들이 보인다.
1층 [대한민국임시정부사 관람관] 이라는 문패가 있는 방으로 들어서면 내부 정면에 김구 선생님의 흉상과 태극기가 보인다. 이 태극기는 1945년 11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다수의 임정 요인들이 환국시 청사에서 마지막 기념 촬영을 할 때 배경으로 사용하고 귀국시 가져온 역사적인 유물이라 함 .
문 오른쪽 벽엔 이사진이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면 한국의 독립기념관에서 보낸 물품으로 임시정부시절 관계 되는 분들의 많은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 되어있다.
클릭하면 글씨 크게 보이겠죠!
김구선생님의 필적
축사를 하고 있는 충칭 위수 사령관 류즈장군
왼쪽 위의 사진은 이봉창의사 오른쪽 위의 사진은 윤봉길의사
왼쪽 글은 이봉창님의 친필 오른쪽 글은 윤봉길님의 친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장으로 거행된 이동녕 선생의 장례식 (1940. 3)
*왼쪽 위의 사진은 총칭(중경)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한 임시정부 요인들 *오른쪽 위의 사진은 임시정부의 환국이후 임시정부의 잔무처리와 중국내 한인 교포들의 귀국문제등 제반 문제를 중국정부와 협의하기 위하여 설립된 주화대표단 *맨아래 사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환국 시민환영대회
대한민국정부수립 (1948. 8 . 15일)
김구 선생님 친필
*위의 사진은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대표 *아래 사진은 광복을 맞이하여 거리로 나와 환호하는 시민들
광복을 맞이하여 거리로 나와 환호하는 시민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환국기념 서명표
한국광복군 조직표
대조선국민군단 사격훈련모습
한국광복군 서명 태극기--광복군들이 조국 광복에 대한 소감을 기록한 태극기 이밖에도 많은 사진과 문서들이 있지만 ......
전시관을 나와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4층 건물이 이어져 있다. 이 건물에는 내무부, 재무부, 회의실, 주석실 등이 갖추어져 있어 당시 강화된 임시정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각 사무실과 회의실에는 당시 사용하던 집기가 갖추어져 지나간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사무실 건물 가장 위쪽에 위치한 백범 김구 선생의 주석 사무실 겸 숙소는 당시 김구 선생의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책장 등과 저고리 한복 독립운동 관련 문헌이 있다.
건물 제일 꼭대기 층에 자리한 주석 사무실겸 숙소로 오르는 계단과 들어가는 문
발코니 안이 주석실
김구 주석님의 사무실겸 숙소
김구 주석님의 사무실겸 숙소 김구 주석님의 사무실겸 숙소-- 김구님의 한복과 사용하시던 집기들
국무위원 회의실 --평소에 오는 사람이 없다보니 늘 잠겨 있거나 어두운 불로 우리가 가서야 관리인이 나오셔서 영접하신다 물론 친절하셨고 점잖아 보이시는 풍채좋으신 중국어른
천장에 보이는 선풍기
왼쪽 외빈숙소 오른쪽 방 주석비서실
임시정부청사 구지 건물을 나와 좁은 골목을 나오면 큰 길가에 상점앞에 먹고싶은 과일과 대바구니 그릇이 정겨워서 |
출처: 나무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나무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