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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회 제58차 문화답사(2-2); 서울 夢村土城
서울 夢村土城 -史蹟 제297호-
서울 夢村土城은 漢江의 支流 城內川 남쪽에 있는 둘레 약 2.7㎞, 높이 6~7m의 百濟前期인
3세기 초에 築造된 土城으로 88올림픽을 위한 체육시설 건립예정지로 확정되면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모두 6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木柵構造와 土城補强을 위하여 垓子를 構築한,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는 특수한 土城構造임이 밝혀졌다.
조사결과 문 터와 집 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고, 동전무늬가 찍힌 瓷器조각과 여러
종류의 土器類, 鐵製 武器類 등이 출토되었으며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西晉(265∼316)시대의 遺物로 시대 확인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몽촌토성은 백제의 都城인 慰禮城이라는 견해와 防禦用 城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치∙규모∙출토
유물로 볼 때 백제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시대 石村洞 무덤들을 비롯한 百濟前期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곳이다.
지리적 위치 및 견고함으로 미루어 보아, 서울 風納洞土城∙서울 三成洞土城 등으로 이루어진
河南慰禮城의 主城으로 추정하고 있다.
*몽촌토성은 서울 몽촌토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1.07.28 고시)
*올림픽공원
서울 夢村土城이 있는 올림픽공원은 서울시가 1,823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1984년 4월에
착공하여 1986년 4월에 완공하였으며 운영은 서울올림픽기념 국민체육진흥공단과
한국체육산업개발(주)이 맡고 있다.
원래는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를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나,
지금은 체육∙문화예술∙역사∙교육∙휴식 등 다양한 용도를 갖춘 종합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요시설은 올림픽 회관, 우리금융 아트홀[力道競技場], 펜싱경기장, 테니스경기장,
水泳場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夢村土城址(사적 297)가 復元되었고, 세계 110개국 200여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조성된 올림픽 彫刻公園, 세계평화의 문, 88놀이마당, 散策路,
올림픽문화센터, 野生花團地, 미술관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
서울 夢村土城 사진(*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聚合하였다.)
(01) 성내천 둑길
城內川은 淸凉山(南漢山城)에서 發源하여 松坡區 馬川洞·梧琴洞을 거쳐 올림픽공원의
북-동쪽을 감싸고 돌아 風納洞을 거쳐 漢江으로 흘러 드는 길이 9.85km의 하천이다.
(02) 夢村亭. 성내천 둑길 위에 있는 八角亭.
*夢村: 올림픽공원 안에 있던 마을로, 고대 三韓時代부터 이곳을 ‘검마을’ 또는 ‘곰말’이라
했는데 곰의 音이 ‘꿈’으로 변하여 漢字名으로 ‘夢’이라고 쓴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神靈과 靈劍을 뜻하는 우리말의 ‘검’은 君王의 호칭인 임검(금)으로뿐만 아니라 신성한
곳을 의미하는 지명으로 쓰였다. 즉 검이 곰으로 변하고 곰이 다시 꿈으로 발음된 것이다.
(03) 夢村垓子, 왼쪽이 몽촌토성이다.
해자(垓子/垓字])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城 밖을 둘러 못으로 파서 만든 곳으로 掘江∙
外濠∙城濠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몽촌해자는 몽촌토성 서쪽에 있는 人工湖水로, 유입 펌프를 통해 漢江原水를 끌어들이고,
끌어들인 물과 같은 양의 물을 방출해 깨끗한 수질을 유지하고 있다.
垓子 주변에는 600m의 자연형 湖岸이 조성되고, 216㎡의 人工 植物섬이 있다.
(04) 몽촌해자와 몽촌토성, 몽촌해자 건너 몽촌토성이 보인다.
(05) 곰말다리
(06) 곰말다리
(07) 서울 夢村土城
(08) 서울 몽촌토성
(09) 몽촌토성과 木柵
몽촌토성의 土築城壁을 補强하기 위하여 나무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
(10) 몽촌토성 목책의 뒷모습
(11) 몽촌토성 목책의 앞모습
(12) 나홀로나무
올림픽공원 九景의 제6경으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1985년 夢村土城 안에
있던 30여채의 民家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키가 크고 모양이 예쁜 이 나무만 남기고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에 ‘나홀로나무’가 되었다.
(13) 夢村土城도 아직 發掘調査 중에 있다.
(14) 움집 터 전시관
(15) 움집 터
(16) 움집 터 전시관. 漢城百濟時代
(17) 움집 터 전시관. 몽촌토성의 貯藏孔
(18) 움집 터(竪穴住居址) (*竪: 세울 수)
(19) 竪穴住居址 貯藏孔
(20) 움 집터 전시관
(21) 彫刻作品 <엄지손가락>. 프랑스 彫刻家 세자르, 1988년 작
원래는 평화의 문을 조금 지나 소마미술관 앞에 있었으나 국립체육박물관
건립공사 한 다고 전철 5호선 올림픽공원역 쪽 ‘만남의 광장’ 쪽으로 이전하였다.
(22) 조각작품 <빛의 진로>. 이스라엘 작가 다니 카라반, 1987년 작
올림픽공원에는 올림픽 彫刻公園이 조성되어 세계 110개국 200여 조각가들의 작품을
展示하고 있다.
(23) 夢村土城과 散策路 계단
(24) 몽촌토성에서 제일 높은 곳, 望月峰(해발 44.8m)
(25) 몽촌토성 제일 높은 곳에서 본 南漢山城(淸凉山)
올림픽 아파트 너머로 보이는 남한산성, 렌즈를 조금 당겨 보았다.
(26) 몽촌토성 산책길, 올림픽공원 九景 중의 제5경이다.
(27) 조각작품 <對話>. 올림픽공원 九景의 제4경이다.
알제리 彫刻家 아마라 모한이 1987년에 50일간 머물면서 조각한 작품이다.
(28) 國旗廣場-올림픽운동 조형물
(29) 국기광장. 88올림픽 참가국 160개 국가의 국기를 게양하였다.
(30) <世界平和의 門>, 올림픽공원 九景의 제1경이다
1988년 한국의 建築家 金重業 設計 작품으로 韓民族의 底力과 技倆을 전 세계에 떨친
88서울올림픽대회를 기념하기 위하여’세계평화의 문’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하였다.
높이 34m, 폭 37m, 전면 길이62m(날개 정면 폭)의 규모로 外樣이 아름답고 莊重하다.
이 작품은 韓民族의 우수성과 그 底邊에 자리한 우리 얼을 표현한 작품으로,
한국 傳統建築의 둥근 曲線을 활용하여 飛翔과 上乘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31) 세계평화의 문 四神圖, 서양화가 白金男 작품.
천장부분인 날개에는 한국 전통양식을 主潮로 우측에는 玄武와 朱雀,
좌측에는 靑龍과 白虎를 丹靑으로 그려 高句麗 壁畵 四神圖를 形象化하였다.
(32) 세계평화의 문 앞 <平和의 聖火>
(33) 漢城百濟博物館, 원래 계획되었었으나 이번에 답사하지 못하였다.
상설전시 제1전시실은 서울의 先史文化, 百濟의 黎明을 제2∙3전시실은 ‘백제의 꿈,
한강에서 꽃피다’를 전시하며, 특별전시실에서는 다양한 素材를 主題로 정기 및 비정기
특별전시를 年中 개최하고 있다.
(34) 夢村歷史館
백제시대 유적지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출토물을 전시해 놓은 역사기념관으로
전시실에는 明逸洞에서 발굴된 옛 주거지, 芳荑洞 古墳과 石村洞 고분, 可樂洞 고분,
몽촌토성 등 8개 모형을 비롯하여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 九宜洞 등에서 발굴된
진품 유물 95점과 模造 유물 149점 등 244점이 전시되어 있다.
(35) 서울올림픽기념관
古代·近代 올림픽의 역사를 되짚고 1988년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올림픽경기대회의
榮光과 成果를 재조명하여 올림픽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가는 국내 최초의 스포츠
박물관으로 1990년 9월 개관하였다.
서울 風納洞土城-夢村土城 이외에 松坡區에 있는 史蹟
(36) 서울 三田渡碑 -사적 제101호-
仁祖反正 후 仁祖는 光海君의 中立外交를 止揚하고 反金親明 政策으로 전환하자
仁祖 14년(1636년) 12월∼인조 15년(1637년) 1월까지 丙子胡亂 때 淸에 패배해 굴욕적인
講和協定을 맺고, 淸 太宗의 强要에 따라 그의 功德을 적은, 조선 仁祖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정식명칭은 ‘大淸皇帝功德碑’이다.
*淸 太宗은 항복조건으로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降伏하되 9가지의 講和條約 조항을
제시했는데 그 중에서도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청나라에게 君臣의 禮를 지킬 것 ③ 조선 왕의 長子•제2子 등을 瀋陽에 人質로 보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⑧ 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修築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 1639)부터 일정한 歲幣(貢物: 예물로 해마다 보내는 물품)를
보낼 것 등이다.
(37) 서울 삼전도비
(38)서울 三田渡碑 -史蹟 제101호-
碑身은 大理石, 龜趺는 花崗巖으로 만든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基壇을 제외한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이다.
글은 吏曹判書 李景奭이 짓고, 글씨는 吳竣, 碑名(篆額)은 呂爾徵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滿洲글자, 뒷면에는 漢字로
쓰여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9) 서울 三田渡碑 螭首와 篆額 <大淸皇帝功德碑> (*螭: 교룡 이/리 *篆: 전자 전)
(40) 三田渡碑, 石村洞에 있을 때의 모습, 옆에 浮彫가 있다. -2007.07.28 사진-
원래 三田渡에 세워졌던 삼전도비가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石村洞 어린이공원에 있을 때의
모습이다. 文化財 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자 주민들의 民願도 있고 또 원래 자리인 지금의
석촌호수 西湖 언덕으로 이전하였다.
원래 三田渡(石村湖 주변)에 세워졌으나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高宗 32년(1895)
埋沒했던 것을 日帝强占期인 1913년 일본 당국이 다시 세우고, 1956년 당시 문교부에서
國恥의 기록이라고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2010년 4월 考證을 거쳐 최초의 위치인 석촌호수 西湖 언덕으로 옮겼다.
(41) <三田渡의 受難> 浮彫 -2007.07.28 사진-
仁祖가 受降壇에서 淸太宗에게 三跪(拜)九叩頭의 치욕적인 降伏 모습을 靑銅板에 浮彫로
새긴 모습, 현 위치인 석촌호수 서호로 옮기면서 사라졌다.
*三跪九叩頭: 跪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叩는 머리를 땅에 닿게 한다는 뜻으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이것을 한 단위로 3번 되풀이하였다. (*跪: 꿇어앉을 궤 *叩: 두드릴 고)
(42) 서울 石村洞古墳群 -사적 제243호-
백제시대의 대형 돌무지무덤[積石塚] 7基와 함께 널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등이
30餘基 이상 확인되었으며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무덤이 石村洞에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석촌동고분군에서 제일 규모가 큰 3호분은 긴 변 45.5m, 짧은변 43.7m, 높이 4.5m의
규모로 형태는 四角形 基壇形式의 돌무덤으로 基壇은 3단까지 확인되었으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고분은 대체로 3세기 중∙후반 경부터 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으며, 특히 300~400년의 약 100년 동안은 백제 지배 세력에 의해
돌무지무덤 위주의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公州 遷都(475년)까지의 백제 지배세력의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바뀐다. 근처 芳荑洞 백제고분군과 可樂洞 등지의 무덤이 이러한 증거가 되고 있으나
석촌동 일대에는 널무덤∙독무덤 등의 소형 고분이 계속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서울 석촌동 고분군으로 명칭변경 (2011. 07. 28)
(43) 서울 芳荑洞古墳群 -사적 제270호-
방이동 일대에 있는 百濟前期(4C초∼475)의 무덤들로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의 合同地表調査 결과 8기의 고분이 확인되고, 1975년 잠실지구 新市街地
조성계획에 따라 6기의 고분이 발굴 조사되었으며, 1983년 서울시의 복원공사로
현재는 古墳公園으로 조성되었다.
대부분 도굴되어 남아 있는 유물이 매우 적지만, 고분의 구조와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낮은 구릉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사방의 벽을 돌로
쌓아 올린 뒤 한쪽에 널길[羨道]을 내고 바깥을 흙으로 덮었다. (*羨: 무덤길 연)
방이동고분도 백제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4∙5∙6호분 등에서 출토된
灰靑色硬質土器인 굽다리접시[高杯]가 전형적인 신라양식을 띠고 있고, 널길의 위치와
棺臺의 방향 등이 경주지역의 무덤들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이 무덤을 쌓은 주인공들은
신라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 방이동고분은 백제와 신라간의
교류관계, 혹은 신라의 北進에 따른 한강유역 진출을 증명해 주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방이동백제고분군 → 서울 방이동 고분군으로 명칭변경(2011.07.28 고시).
- 끝 -

첫댓글 당일 와병중임에도 참석해 동창들의 문화탐방 이전에 고산이 수차에 걸쳐 탐방 조사한 많은 사진과 사료들를 모아 이렇게 보여 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