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테드 휴즈가『시작법』에서 피력한 바이지만 시인들은 흔히 시 쓰기에 있어서의 어떤 허위성을 갖고 있다. 그 결과로 시의 전체 구조 속에 퍼지는 부패성이 시를 속악한 지경으로 떨어뜨리는데, 그 허위성이란 다름 아닌 “모든 사람들이 획득하려고 애쓰는 이상한 언어 따위의 추상개념 속에 양식의 이상형(理想型)이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시 편편이 순전히 시인의 경험과 사유에 의한 창조물일진대, 그런 시에 어떤 양식의 이상형이 존재한다면 이제 시는 거기에 숫자만 대입해버린 되는 수학 공식과 같은 것이 되고 말 것 아닌가. 김수영의「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를 보면 그런 허위성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화자인 ‘나’는 어느 날 예전에 왕궁이었던 고궁을 나서고 있다. 이른 바 ‘아방궁’이라 불려졌던 그 고궁을 나오며, 그 왕궁의 음탕함 대신 늘 ‘조그만 일’에만 분개했던 것에 대해 그만 자책에 빠지고 만다.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나 욕을 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온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만 반항했던 자신에 대해서다. 그런 자신이 모래나 먼지 알갱이만큼이나 적게 여겨지니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 자유를 요구한다거나, 미국의 용병으로 차출되는 우리 젊은이들의 월남파병에 반대한다거나, 터무니없이 땅값이나 집값을 올려대는 땅주인, 그리고 야경꾼보다 더 힘센 동회직원, 구청직원, 시청 직원 나아가 궁극적으로 타파되어야할 저 왕궁의 권력에는 대항하지 못한 채 옹졸하고 비겁하고 우스운 행태만 벌이는 ‘나’자신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대상에 대해 분노 못하는 자신은 그러므로 현실의 절정 위에 서 있지 못하고 아무래도 조금씩 옆으로 비켜 서 있는 비겁한 삶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 모두가 발 끝에 걸리는 '개새끼'나 차대는 것처럼.
하기야 이 옹졸한 태도는 6.25 때 부산 포로 수용소의 제14야전 병원에 있을 때부터 포로경찰이 되지 못하고 간호사들과 거즈나 개켰던 전통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개의 비명소리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의 투정에 지고, 떨어지는 은행잎마저 가시밭으로 여길 정도로 면면이 이어져 왔다. 이런 유약한 ‘소시민’으로서의 ‘나’의 삶, 그것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그래서 끝내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고 탄식하고 탄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문면에 뻔히 드러난 시의 맥락을 살펴보는데 급급했는데, 이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뻔한 시의 맥락이 소시민적 사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 정정당당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자유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채,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찬 목소리로 그처럼 옹졸하게 반항을 하는 소시민의 소시민성! 아마도 시인은 이런 대다수 소시민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시에다 욕설과 비어를 동원하고, 긴장과 절제 대신 있는껏 불만을 토로하는 형식을 취했으며, 궁극적으로 자학과 자기모멸까지 감행하여 소위 “참새가 죽어도 ‘짹’소리는 하고 죽는다”라는 우리 속담의 구체적 실현을 보인다. 다시 말하면 서두에서 말한 어떤 시 양식의 이상형이 아니라 소시민의 형식을 소시민의 목소리로 가장 진솔하게 창조하자고 한 것이 바로 이 시인 것이다. **출처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