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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龍 傳
독룡(獨龍)이 언제적 인물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일부 문사(文士)들의 잡저(雜著)에 기록이 보이고 또 전해내려오는 전설,설화,민담중 믿을만한 것들을 모아 기록해둔다.
원래 애초에 광준(光俊)이란 이가 있었다. 그 선대(先代)에서 예판벼슬을 하며 나라에 공을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이 되었다. 이에 광준이 음사의 혜택을 입어 벼슬길에 나아갈수 있었다. 19세 나이에 경산(慶山)땅 현령벼슬을 하였는데 3년간 임지에 머물며 서씨(徐氏)성을 가진 천한 농부의 막내딸과 정분이 나서 아이를 갖게 되었다. 집안에서 이 일을 알고 인정치 않으려 하자 ‘어찌 생긴아이를 외면할수 있느냐 ?’ 부모를 설득하여 아이는 한양으로 올라와 키우도록 했다. 이름은 광준이 손수 진겅(眞景)이라 지었는데 다만 집안에서 호적엔 올려주되 적장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녀(徐女)는 머지않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진경이 나이 20세가 되니 광준이 본래 그 이전부터 학문을 가르치려 들었으나 진경은 자신이 적손(嫡孫)이 아님을 알고 혼자 부산포로 떠나 그곳에서 왜인(倭人)들과 교역(交易)하며 이를 업으로 삼았다. 과정에서 한 왜녀(倭女)를 알게 되었는데 이름은 좌향(佐香)이라 하여 다들 그녀를 ‘좌향녀’ 혹은 ‘향녀’라고로만 부르기도 했다. 왜녀가 초창기엔 조선말이 서툴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조선말을 할줄 알았다.
진경이 좌향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허나 이때 교역선이 사고가 나서 진경이 세상을 떠나고 세상에 좌향과 아이만 낳았다. 좌향이 한동안 울며 어쩔줄 모르다가 주변 설득으로 한성(漢城)으로 올라가 광준을 만났다. 향녀가 다만 진경과의 사이에 낳은 갓난아기만을 품에안고 광준앞에서 대성통곡하니 광준이 크게 놀라고 황망하여 어찌할바를 몰랐다.
광준이 고민 끝에 사가(私家)를 지어주어 향녀를 살게하고 아이를 키울수 있게 배려하였다. 이때 광준이 도서청(圖書廳)에서 5품 관리일을 보고 있었는데 먹고살기에 크게 부족함은 없었다. 다만 광준이 어린 향녀를 돌봐준다는 이유로 자주 사가에 드나드니 주변에서 이를 우려하였다. 광준이 되려 그들을 꾸짖으며 ‘어찌 인륜(人倫)으로 핏줄을 저버리곘는가. 비록 진경이 적손은 아니나 내 자손이 분명하며. 왜녀가 비록 이인(異人)이라 할지라도 내 손주를 낳은이상 며느리로 대함이 마땅하다’ 하니 다들 부끄러워하며 더는 반박하지 못하였다.
5년뒤 왜국에서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이름을 좌강(佐剛)이라 하고 실은 향녀의 6촌오라비라 하였다. 좌강이 말하기를 “향녀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혼자 고향을 떠나 교역선을 탄 것을 알고 있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 수소문한 끝에 이제야 소식을 알게되었소. 향녀가 조선에서 혼인하여 아이까지 있다고 하나 이미 부군(夫君)을 사별하고 홀몸이 되었으니 어찌 이 먼 타국에서 어린 나이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수 있겠소 ? 이제 제가 왔으니 향녀를 고향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하였다.
향녀가 오라비의 소식을 듣고 놀라면서도 울면서 말하기를 ‘소녀가 비록 천한 왜국 목공의 딸이요, 또 어려서 부모를 잃어 배운 것이 없으나 세상에 천지법도(天地法道)가 있음을 모르지 않나이다. 남편이 죽도라도 미망인은 마땅히 그 절도(節道)를 잃지 않으며 자손이 있거든 그 키우기에 최선을 다한다‘하였으니 어찌 신첩에게 삼강(三綱)의 도리를 저버리라 하시나이까. 비록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도 재가(再嫁)할수 없으며 오직 이 아이를 진공(眞公 : 아이의 생부(生父)인 진경)의 혈손으로 키우기를 갈망하나이다’하였다.
이에 다시 광준이 반론(反論)하며 말하기를 ‘독룡이 이미 예판가문(* 광준의 선대)의 핏줄을 타고 났으지 저버릴수 없으며, 다만 어린 처자를 타향(他鄕)의 지체높은 양반가에 묶어두고 고생시킴도 할 도리가 아니로다. 그대(향녀)는 아이는 우리에게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새 삶을 찾으라’ 하였다. 이에 한동안 좌강은 ‘다만 누이만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원한다’하고 향녀는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 하며 광준은 ‘아이를 두고 혼자 떠나라’하여 한동안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이에 광준이 혼자 옛 붕우를 만나 술을 마시며 탄식하기를 ‘어찌 세상이치가 이리도 합의가 힘들단 말인가. 단지 세 사람의 생각도 하나로 맞추기가 어려우니 이 힘든 세상 혼자 살아가기 심히 어지럽도다.’ 하였다.
이때 광준의 나이 어느덧 50이 다 되었는데 아직 홀몸이자 붕우(朋友)들이 혼인을 권하였다. 본래 광준이 젊은시절 서녀(徐女)와 정식 혼인을 한 것이 아니었기에 지금 재혼이라 할수도 없는데 허나 광준은 늦도록 여전히 혼인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에 붕우들은 우려하며 광준이 혼인하지 않는 이유를 어떤이는 ‘혹 아직 30년전 죽은 서녀를 잊지 못한 것이 아니냐 ?’ 의심하고 어떤이는 ‘혹시 자부(子婦) 향녀에게 어떤 다른뜻이 있는 것 아닌가 ?’ 의심하였다. 광준이 엄히 벗들을 꾸짖어 말하기를 ‘서녀와의 인연이 가슴아픈 과거임은 사실이나 이제 떠난 사람은 과거의 인연일뿐 어찌 아직 연연하곘는가. 또 향녀가 아무리 천한 오랑캐의 신분이기로 엄연히 내 며느리이거늘 다른뜻이 있다니 말이 되는가 ? 그대들은 어찌 그리도 남의말을 함부로 하는가 ?’ 하니 동료들이 다시 부끄러워 물러났다.
다만 이때 이조정랑 벼슬하는 신모(申某)라는 이가 찾아와 다시 설득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심사숙고,고민하는 뜻을 모르는바 아니나 그대 역시 고결한 공신가문의 핏줄로 더 이상 가문의 대를 잇지도 못하고 늙어가는 것이 안타까운 노릇이요, 또한 어린 며느리와 손자를 보기 민망해서라도 오히려 자네가 먼저 처신을 결정해야 할 것일세’ 하였다. 광준이 다시 반박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뜻은 모르는바 아니나 근래 향녀의 먼 친척 오라비가 와서 이 문제가 깔끔히 정리되지 않았으며 내게 어쨌든 어린 손자 독룡이 있는 몸으로 젊은 처자와 혼인하겠는가’ 거듭 사양하였다. 신우(申友)가 다시 설득하여 말하기를 ‘내 아버님의 오랜 벗 되신이중 예전 정우공신(政雨功臣) 받은집안 여식으로 의진(義眞)성씨(成氏) 가문 외동딸이 있는데 성품이 후덕하고 옛 선현의 학문을 바르게 익혀 품행의 절도가 있네. 필시 그대의 복잡한 가정사를 바로잡아주는데 부족함이 없을것일세’ 하였다.
광준이 마지못해 선자리에 나가 이내 성씨녀(成氏女)를 만났으나 미색은 고왔으나 역시 나이어려 쉬이 결정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때 셩녀의 나이 21세였다. 성녀가 나중에 집안 어른으로부터 향녀의 일을 전해듣고 직접 광준을 찾아가 말하기를 ‘나으리께선 국록을 먹는 조정의 신하로써 어찌 지혜가 미치지 못함이 이와같으십니까. 향녀가 비록 나으리의 집안 며느리가 되었으나 어린나이에 지아비를 잃은 몸으로 마땅히 고향으로 돌려보내 새출발을 하도록 독려해주는 것이 도리요 지체높은 양반가에서 붙잡고 있을일이 아닌줄로 아옵니다. 또한 독룡이 비록 적손은 아닐지라도 가문(家門)의 혈손(血孫)이 분명하거늘 어찌 차마 내치려 하시옵니까 ?’ 하니 광준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낭자의 말이 이치에 틀린 것이 없으나 며느리가 어린 아이를 두고 떠날 수 없다하니 어찌하곘소 ?’ 하였다. 성녀가 미소진 얼굴로 일어나 말하기를 ‘제가 몸소 향녀를 만나 설득하겠나이다’ 하였다.
성녀가 결국 항녀를 만나 말하기를 ‘님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으나 어찌 나이어린 과부의 몸으로 험한길을 가려 하시오. 이미 그대의 오라비가 고향으로 데리고 돌아간다 하였고, 마땅히 어린아이는 집안에 맡기고 떠나면 그대는 고향에서 새출발을 할 수 있어 좋고 아이는 조선의 명문가에서 귀히 자랄테니 피차 손해볼것이 없거늘 무엇을 그리 망설이시오 ?’ 하였다. 향녀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선은 여남(女男)이 차별없이 모두 명판(明判)인 것 같구료. 원래 예부터 조선과 왜의 법도가 많이 달랐으나 대저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비나 어미가 다를것이 없거늘 나를 어찌 핏덩이를 두고 천리길을 떠나라는것이오. 비록 이X의 팔자가 광공(光公 : 광준을 말함)의 귀신이 될수는 없다고 하나 한번 낳은 아이의 천륜은 끊을수 없으니 더는 말씀마시오.’ 하였다. 성녀가 거듭 탄식하며 말하기를 ‘님은 어찌 남에게 짐을 지우고 자신은 자유케될 홀가분할길이 있거늘 어찌 몸소 고생길을 자처하시오. 소녀 비록 나이 어리다하니 이미 광공과 혼사말이 있으니 광공의 여식이나 진배없고 또 소녀가 비록 부족하나 예부터 선현의 글을 다소 배워 익힌 것이 있어 알거늘 그 옛날 청산땅에 장녀(張女)라는이가 있어 흉년에 아내를 잃고 아들 일곱을 혼자 키워야하는 이가 있어 몸소 그 배필이 될 것을 자처하여 아들 일곱을 훌륭히 키워 나라로부터 ‘여중군자(女中君子)’란 호칭을 받은바가 있고, 또 오래전 고대에는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아내를 여의고 혼자 오남매를 키워야하는 홀아비가 있어 소씨(蘇氏)가 어린나이에 그 배필을 자처하여 5남매를 모두 장수로 키우니 구려(句麗)의 태왕(太王)이 몸소 나이어리나 가상한 여인이라 하여 ‘현숙부인(賢淑婦人)’이란 칭호를 하사하였다 하오. 소녀 비록 나이가 어리고 성품이 어질지 못해 그 옛날 장녀나 소녀의 도리(道理)를 온전히 따를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광공의 집안은 흉년이나 전란으로 몰락하였거나 가난에 찌든 집안이 아니라 부인이 몸소 전처소생을 이끌고 초근목피할 걱정이 없으니 무엇을 그리 걱정하시오. 비록 부족하오나 독룡(獨龍)을 친자식처럼 훌륭히 돌볼것이니 더 걱정마시고 자유의 길을 택하도록 하시오’ 하였다. 성녀가 향녀의 처소에 일주일을 머물며 몸소 한방에서 자고 밥을 손수 지어주며 설득하니 마침내 향녀가 승복하고 떠나기로 했다.
떠나는날 성녀가 향녀에게 한가지를 당부하기를 ‘그대는 이미 떠나는 몸이니 더 이상 광공의 자부(子婦)가 아니오 나는 아직 공과 정식 혼사를 치르지 않았으니 이 댁의 귀신이 아니외다. 허나 이제 독룡을 맡기로 약조한 마당에 고부(姑婦)의 법도만은 분명히 하고픈 것이 이 어린 처자의 한가지 소망이외다. 마땅히 그대에게 큰절 한번 정중히 받고 독룡을 맡게되길 바라오’ 하니 하니 향녀가 고민하다 결국 납득하고 정중히 큰절을 올린뒤 아이를 맡기고 오라비의 보호를 받으며 울며 떠났다.
성녀가 광준과 혼인을 결심하고 독룡을 거두어 키우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독룡이 자라 나이 7세가 되자 성녀가 몸소 자리앞에 앉히고 글공부를 가르치려했다. 허나 독룡이 흥미가 없는지 딴청을 피우며 자주 졸자 성녀가 노하여 회초리를 들었다. 꾸짖어 말하기를 ‘네 비록 가문의 적손은 아니라하나 명문가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이 분명하거늘, 항차 조정에 출사하여 가문을 빛낼 막중한 책무가 네게도 있음이 분명한데 어찌 이리 학문에 게을리 할수 있단말이야 ? 앞으로 이런일이 있으면 용서치 않으리라.’ 하였다. 독룡이 서럽게 울며 뛰쳐나갔다. 밤에 성씨가 독룡의 방에 들어와 몸소 다친데 약을 발라주며 품에 안으며 말하기를 ‘너는 특별한 곡절이 있는 아이라 엄히 키우는 뜻이 있느니라. 훗날 모든 것을 말해줄날이 있을터이니 너무 서러워말라’ 하고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잤다.
독룡이 8세가 되니 학문에는 더욱 뜻이 없고 동네 아이들과 놀러다니기를 즐겼는데 하루는 아이들과 저자에 나갔다가 장사치가 파는 과일을 훔쳐 무리와 나눠먹었다. 성씨가 나중에 알고 노하여 꾸짖기를 ‘네 나이 어느덧 여덟살이면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못하지는 않을터인데 어찌 이런 무도한짓을 불량한 아이들과 노닐며 벌였느냐 ? 대체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으며 또 옛 선현의 글귀에 어디 그런 법도가 적혀 있다더냐 ?’ 아이를 냉방으로 불러 더욱 매섭게 후려쳤다. 밤에 아이가 방에서 혼자 울자 들어가서 다시 품에 안으며 달래주었다.
독룡이 열 살이 되어 성씨가 몸소 서예(書藝)를 가르치려 들었다. 벼루에 먹을 갈아 담아 보관했으며 아이에게도 몸소 먹가는 법을 가르치려들었다. 허나 독룡이 오히려 먹물통을 엎지르고 벼루를 박살내 방안을 온통 엉망으로 만들었다. 측간에 다녀온 성씨가 다시금 놀라 꾸짖기를 ‘너 어찌 하루가 다르개 무도함이 점점 이와같을수가 있느냐 ? 선비에게 붓과 먹은 목숨과도 같은것인데 이는 농부가 쟁기를 내던지는것과 같고 어부가 그물을 내버리는것과 같다. 너 또한 항차 선비의 도리를 배워야할 아이가 어찌 하루가 다르게 점점 말썽만 부린단말이냐 ?’ 다시금 아이를 매섭게 후려치고 이번엔 냉방에 가둔뒤 나오지 못하게 했다.
독룡이 글공부를 거듭 게을리하자 성씨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하루는 냉방에 가둔뒤 서책 한권을 넣어주며 ‘20장 이상을 다 외우지 못할시 나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독룡이 끝내 외우지 못하자 성씨가 탄식하며 서러움에 눈물흘렸다.
본래 성씨가 광준과 혼사후 1년만에 아들을 낳았고 2년후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첫째 이름은 철(喆), 둘째 이름은 진(進)이라 지었다. 어릴때는 그저 두 아이가 독룡과 어울리며 놀게 하다가 아이들이 어느덧 다섯 살이 되자 서로에게 예를 가르치게 하며 ‘너희가 비록 어린아이라 하나 항렬의 법도를 알아야할 문제가 있어 가르치고자 한다. 여기 철과 진은 나이가 어리나 아버님의 아들이요, 독룡은 손자가 되지 여기 철과 진은 숙부가 됨을 알고 깍듯이 섬겨야한다. 철과 진도 독룡이 나이 많으나 조카임을 알고 그리 대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아이들이 납득을 못하자 족보를 가져다 보여주며 거듭 일깨워주었다.
하루는 성씨가 출타를 하였는데 독룡이 한동안 말이 없다가 아직 나이어린 철과 진을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성씨가 돌아와보곤 기가막혀 독룡을 붙잡아 구석으로 끌고가 매를 때리며 꾸짖었다. “내 이미 가문의 법도와 항렬을 일러주었거늘 어찌 이런 무도한짓을 한단말이냐 ? 철과진이 나이는 어리나 너에게는 숙부가 되며, 또한 숙부이나 아직 어리고 자라는 몸을 이미 크고 힘이 센 네가 그토록 구박하면 어찌한단말이냐 ?” 하고는 ‘네가 내 아이를 때린만큼 너도 맞아야한다’며 독룡을 모질게 마구 때리는데 이때 하필 조정에서 퇴청하던 광준이 보게되었다.
광준이 이 모습을 보고 경악하여 만류한뒤 안채로 성씨를 끌고온뒤 ‘그대가 명문가에서 어려서부터 후덕한 성품을 배워 어질고 온화하기 짝이없다 들었는데 어찌 모질기가 이와같을수 있는가 ? 설마 나를 속인것인가 ? 비록 배아파낳은 자식이 아닌 전실자식이라도 친자식처럼 품는 것이 여인의 도리요 어미의 길인 것을 그대는 어찌 친손자가 아닌 의붓손자 구박하기를 이와같이 하는가 ?’ 하였다. 성씨가 나름 억울한가운데서도 황망한 가운데 말을 못하다가 한참만에 흐느끼며 입을 열어 말하기를 ‘신첩이 비록 용렬하고 재주없으나 7살나이때부터 집안에서 어머니와 할머님께 부도(婦道)를 익혔거늘 어찌 그와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절개(節槪)와 내조(內助)는 여인의 으뜸가는 덕목이라 기본으로 배웠거니와 가난하고 굶주린 가운데서도 전처소생 자녀를 친자식처럼 품는 것은 실로 여인중에서도 제일군자(第一君子)라 어김없이 들었나이다. 허나 신첩이 부처나 도인이 아닌 평범하고 용렬한 아낙일진대 어찌 한계가 없으리이까. 애초에 신첩이 비록 어린나이에 나으리의 손자인 독룡읊 품었으나 친자식처럼 기르고 훈육하며 타이르려 하였나이다. 허나 독룡은 어릴때부터 학문을 가르쳐도 듣지않고 옛 선현의 도리와 사람된 길을 가르치려해도 도통 배우려들지 않았으며 서예를 가리켜 문예(文藝)의 재미를 알게하려 하였음에도 거부하였나이다. 여기에 이제 제 나이어린 숙부까지 핍박하여 집안의 법도까지 거스르려하니 어찌 신첩이 참을수가 있었겠나이까 ? 신첩 비록 부덕의 도를 어린시절부터 배웠으나 결코 성인군자가 아닌 ‘보통여인’임을 통촉하여주시오소서’ 하였다.
성씨가 한참을 흐느끼니 겨우 달랜뒤 탄식하기를 ‘그 옛날 중원의 고사(古事)에 이르기를 수백년전 후진(後陳)에 완씨(完氏)라는 여인이 있어 흉년에 어린나이에 자식있는 나이많은 홀아비에 시집가 전처소생 아들과 자기아들을 함께 길렀다 들었다. 허나 완씨는 어린나이에 부모잃고 떠돌아 굶어죽게된 자신을 거둔 부군(夫君)과의 신의를 지키기위해 아이 둘중 하나만을 살려아하는 상황에서 결국 자기아이를 죽이고 전처소생 자녀를 살려 키웠다고 들었다. 헌데 그대는 어찌 사악하기가 이와같단 말인가’ 하였다. 성씨가 다시 흐느끼며 말하기를 ‘신첩이 여중군자의 도를 배울 재목이 못됨은 일찍이부터 알고 있었나이다’ 하였다.
이후 광준이 성씨로부터 독룡에 대한 훈육과 교육을 거두게 하고 별도의 독선생(獨先生)을 두도록 했다. 허나 독룡이 공부를 싫어함은 달라지는일이 없어 5년동안 독선생이 급기야 일곱 번이나 바뀌게 된다.
시간이 흘러 독룡의 나이 15세가 되었는데 하루는 광준이 독룡의 방에 들어가니 독룡은 보이지 않고 다만 서찰 한 장이 놓여있었다. 내용이 이와같았다.
“ 소손(小孫)이 일찍이 친부모를 여의고 조부(祖父)와 계조모(繼祖母)께서 저를 키워오셨으
나 오랬동안 뜻이 맞지 않았습니다. 계조모께서 제게 글공부를 가르치려 하셨으나 저는 학
문에 뜻이 없었으니 어찌 일찍이 불화하지 아니할수 있었겠습니까. 어린시절엔 철없이 계
조모님을 원망키도 하였으나 이제 나이드니 다만 계조모의 천성이 악독한 탓만이 아닌 소
손의 심성이 계조모님과 맞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이제사 깨달았습니다. 또한 어릴적
철없이 나이어린 숙부님들께도 죄지은바 있으니 제가 더는 이 집에 머무를수 없음을 깨달
았습니다. 계조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온전히 사라졌다 할 수는 없으나 젊은 나이에 친손
주도 아닌 소손을 떠맡았을 때 그 심경 오죽하셨을까 이제는 이해하는바도 있나이다. 다만
이제 이 집에 소손이 없는 것이 집안의 화평을 찾는 일임을 깨달았으니 부디 찾지 말아
주시오소서. 저 하나 없음으로 집안이 평안해진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한 소손이 재주없
어 명문가의 유업을 이을 능력이 되지 못함도 이제 아오니 그저 먼곳에서 혼자 편안히
살기를 원하나이다. 원컨대 조부께서는 계조모님과 어린 숙부님들과 평안히 사시옵고 소
손은 소손의 길을 떠나겠나이다. ”
광준이 서찰을 읽고 허탈해하였고 성씨가 울면서 ‘이 모든게 신첩이 용렬하고 악독하여 그리된것이니 마땅히 저승에서 벌을 받겠나이다’ 하고 은장도를 들어 자진하려 하였으나 ‘부인의 탓만이 아니다’ 하며 광준이 열 번 만류하여 겨우 성씨가 뜻을 거두었다. 시간이 흘러 독룡이 부산포에서 이름을 태진(泰眞)이라 고치고 왜인과 조선인의 교역을 중재하는 일을 맡았다 하나 확실치는 않다. 다만 부산포에 들려오는 전설로 한동안 왜인의 조선땅에서 폭리와 노략을 일삼는 것을 막아 공을세운 이가 있다 들었으니 이름이 태진이요 이전 이름이 독룡이라고 했다. 그가 틈틈이 쓴 서한과 일기를 모아 지은 ‘태진집(泰眞集)’이란 문집이 있다고는 하나 아쉽게도 전해지진 않는다. 다만 성씨가 독룡과의 옛일을 탄식하며 쓴 시조 한수가 있어 여인의 마음을 전한다.
‘ 인력(人力)을 다해도 안되는일 있더라
마음닫힌 아이를 무슨수로 품을꼬
애초에 인연이 아니었던가 하노라
진심(眞心)을 다해도 통하지가 않더라
마음없는 아이를 이끌길은 없나니
한두줄 글월로 어찌 이 사연을 다 말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