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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설교 요약 모음
민족 고유 명절인 ‘추석’이 다가옵니다. 그리운 가족을 만나는 기쁨에 벌써 마음이 설레입니다. 그러나 이맘 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민 하나가 생깁니다. 특히 가족 중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많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제사 문제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추석 설교에는 설교 그 자체 내용뿐 아니라 ‘제사 제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리고 ‘추모예식는 무엇인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접근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①제목: 제사와 효도
성구: 고전 10:20-21
우리나라 민속적인 2대 명절이라 하면 음력설인 정월 초하루와 8월 추석(음 8월 15일)일 것입니다. 이런 명절이면 헤어져 살던 부모님을 뵈옵고 가족끼리 서로 모일 수 있는 기회이고 객지에 살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명절과 직접 연관을 갖는 것이 제사 문제입니다.
오늘은 조상의 제사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제사제도의 역사적 근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관습은 12세기말 중국 송나라 때 주희(주사)가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주희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유교 철학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의 철학을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이라 불렀고 서양에서는 신유교라고 했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관습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몇 개 부족 외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시아권에 35개 나라 가운데 제사 지내는 관습을 가진 나라는 유교 영향권에 있었던 대만, 중국, 일본, 홍콩, 한국 정도입니다.
본래는 부모에게 자사를 지낸 것이 아니고 뛰어난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것도 모든 황제가 제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후들도 따라서 조상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모든 질서가 무너지면서 평민들도 ‘왕들의 조상만 훌륭하냐? 우리 조상도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 조상 자랑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13세기 고려말기에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대표적인 학자가 정몽주, 이색 같은 분들인데, 주희의 성리학을 본받아 사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뛰어난 조상을 자랑하기 위한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습니다.
그 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고려의 불교로부터 국교를 성리학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유교를 조선의 종교로 받아들이면서 조상의 제사를 장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즉 고구려, 신라, 백제시대나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제사가 없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오히려 하늘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제사제도를 장려한 이유는 정치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즉 임금에게 충성할 것을 주장하려니까 먼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 말하게 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효도중의 효도라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제사는 한국 것이 아니라 중국의 풍속입니다. 본래 우리 조상들이 옛날부터 해 오던 정통이 아니고 13세기 이후에 그것도 왕가에서 제사를 지내라는 강요에 의하여 생겨난 풍속입니다. 인간 본성에 근거한 곳도 아니고 본래 한국 사람들이 해 오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유교에서 들어온 풍속을 정착시킨데 불과한 것입니다.
2. 성경이 말하는 효도
출애굽기 20:12에 기록된 십계명 중 5번째 말씀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효도의 근본적인 말씀을 정리해 줍니다.
공경이란 공손히 섬긴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부모님을 공손히 섬기라는 말입니다. 신명기 5:16에도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 6:2-3에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장수는 ‘생명이 길리라’, ‘오래 살리라’와 같은 말입니다. 공경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공경과 효도를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첫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사회질서의 시작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정 질서가 깨어지면 사회질서가 깨어집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자세를 가진 자녀는 사회에 나와서도, 직장에서도 윗사람을 존경하고 아래 사람을 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부모 공경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책임감을 의미합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보살펴 드리는 것, 바르게 모시는 것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이것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에 대한 윤리적인 측면입니다.
셋째, 부모 공경의 시기에 대해 성경은 철저하게 살아계실 때로 말씀합니다. 돌아가시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넷째, 공경의 순서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성도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부모님께 복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하면서 부모님께 복종치 않음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3. 효도와 제사
제사드리는 것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별세한 순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24시간이 지나야 입관을 할 수 있고 그 다음은 장지를 택하여 장례식을 행합니다. 그 다음에 3일만에 산소에 가는 삼오제와 연중에 성묘 가는 것과 기일을 기억하여 안 믿는 사람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믿는 사람은 추도예배를 드립니다. 이를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경에는 별세한 사람에 대하여 교훈을 주는 말씀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개인 개인입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불신자는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육식은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육신은 재림주 예수님이 오실 때 무덤 속에서 그 음성을 들어 다시 일어나는 축복을 받아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세한 사람에게 대한 기도나 그를 위한 어떤 행위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가운데 한 번도 장례를 집례하신 일이 없습니다. 도리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둘째, 별세한 유해를 정결하게 입관하여 장례절차에 따라 정중하게 모시는 것이 자식된 도리이고 예의입니다. 엄청난 경비를 낭비하여 산소를 꾸미는 행위라든가 미신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장례를 치른다든가 하는 일은 모두 금해야 할 것입니다.
산소자리도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부모님 산소 자리가 습기가 많은 곳이라든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옆이라 산소를 밟고 다닌다거나 잔디가 잘 나지 않는 곳이라든지 하면 좋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과도한 풍수지리설 같은 미신에 혹하여 명당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기독교의 지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 어떤 목사님이 외국 유학에서 돌아와 고향에 가보니까 부친 산소 옆에 여러 개의 묘가 있으므로 관리하는 분에게 어떻게 된 일인가를 물었더니 “이 집 산소를 잘 써서 자식들이 외국 유학도 하고 모두 잘 되었으니 우리도 그 곳에 묘자리를 쓰자고 해서 반대하다가 매를 맞기까지 했다”고 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복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를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주십니다. 묘를 잘 쓴다고 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이교적인 습관과 잘못되어져 있는 습관은 고쳐야 합니다. 장례일을 꼭 3일, 5일, 7일을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소 3일은 별세 24시간이 지나야 장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일째 날이 주일이면 장례를 할 수 없어서 월요일이면 4일인데 홀수 날짜 맞춘다고 화요일까지 기다릴 이유는 없습니다.
삼오제는 관습도 매장한 후 3일만에 산에 가는 습관인데, 예전에는 맹수들이 많아서 시체를 파는 예가 있기에 혹시 산소를 맹수들이 파지 않았나 하여 산소를 둘러보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3일이래야 장례한 일자 계산해서 3일이기 때문에 48시간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3일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장지에 연락해서 4일이든 5일이든 산소에 비석까지 세우고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넷째, 추모예식 문제입니다. 추모예식을 할 때 식구가 먹기 위해 상을 차리는 것은 좋으나 죽은 분을 위해 차리는 상은 우상숭배가 됩니다. 추도 예배를 드리는 기간은 일정하게 정한 기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을 가진 자는 천국에 갔으므로 너무 오랜 기간, 10년이나 20년 넘게 추도예식을 고집하는 것보다 3년이나 5년 정도 추모예식을 드리고, 남기신 교훈이나 아름다운 이야기나 사진첩이나 녹음된 음성이 있으면 듣고 같이 음식을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어머니는 천국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가족 중 반쯤 예수 믿고 반은 안 믿으면 믿는 쪽에서 이해를 시키고 추도예배를 드리도록 기도하면서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다고 제사음식 준비하는데 도와주지도 않고 까다롭게 굴면 대화가 단절되어 도리어 전도하는데 지장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절을 하는 문제는 분명히 우상숭배이므로 삼가야 합니다.
저의 신학교 동창 가운데 목포에서 목회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관습으로 5대 조상이 넘으면 1년에 한 번씩 전체 문중이 모여 산에서 제사를 지내는 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친구 목사님은 처음에는 열심히 제사를 지내는데 참여했다가 물론 절을 한 것은 아니지만, 문중친척 가운데 믿는 사람들을 한 분씩 설득하여 지금은 1년에 한차례씩 전체 문중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전도에 성공하고 예배에 성공한 좋은 예입니다.
어느 시골에 학생 하나가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습니다. 성실히 예수를 믿으니까 한 번은 아버지가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재산도 많고 지위도 있으니 무엇 하나 걱정할 것이 없는데 네가 교회 나가니 내가 죽고 난 후에 제사 지내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여러 가지로 부모님을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 끝에 그는 부모님이 주무실 때에 국수 두 그릇을 준비하여 부모님 머리 위에 놓고 절을 하며 잡수시라고 했으나 부모님은 아무 것도 모르고 주무시기만 합니다. 아침에 깨어보니 아들놈이 그 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화가 치민 부모님은 “야, 이놈아, 네가 미쳤느냐? 국수를 먹게 하려면 내가 잠자지 않을 때 가져 와야지 잠자고 있는데 머리 이에 놓고 먹으라는 것이 정신이 있는 짓이냐?”고 꾸중했습니다.
이때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살아계셔서 주무시면서도 제가 국수를 놓고 잡수리라고 하며 절을 해도 모르시는데 돌아가신 후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한다고 해서 잡수시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님도 아들이 가는 예수 믿는 길을 따랐답니다.
성도 여러분!
살아생전 효도하는 것이 효도이지 돌아가신 후에는 결코 효도할 수 없습니다. 보통이면 살아생전에 불효한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한 제사상을 더욱더 잘 차린답니다. 이는 속죄의 뜻도 있겠습니다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관식이 끝나고 나면 효도할 수 없습니다.
안 믿으시는 부모님이 계시면 어떻게 해서라도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효도중의 효도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 지내는 것은 부모에게 효도도 아니고 하나님 섬기는 방법도 아니며 하나님께나 부모님께 헌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김찬종, 월간<메시지>, 89년 9월호, pp.63-69
② 제목: 추모예식의 의미
성구: 히 9:27
우리나라의 전래 풍습 중 조상숭배의 문화가 대단히 깊이 퍼져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사에 간한 관습은 기독교 신앙과 충돌해 온 사례가 대단히 많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조상중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상을 무시하거나 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1. 제사를 지낼 필요성이 없습니다.
제사는 조상숭배의 핵심적인 의례입니다. 제사에는 우리가 연구해 볼 여지가 몇 가지 있습니다.
조상을 제사로 모시는 것은 먼저 조상이 귀신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지방을 쓸 때도 ‘신위(神位)’라고 밑에다 적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이는 이교의 시상에서 나온 견해일 뿐 성경에는 사람이 죽어서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을 암시하지 않습니다.
살아서도 아버지와 어머니요 비록 세상을 떠났어도 아버지와 어머니일 뿐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치입니다.
성경에는 전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낳아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어서 영생에 이르든지 영벌에 이르게 됩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교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제사의 의미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해 드릴 것도 없고 죽은 조상이 산 후손들에게 복을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2. 추모예식으로 제사의 대안을 삼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학 가족들을 위해서 목사를 청하여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가정에서는 가족 중에서 예배를 인도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추모예식은 가족의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는 마음으로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불신 가족들을 잘 설득하여 추모예식을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불신 가정에서 추모예식을 드리면서 전도의 기회를 삼고 또 친족끼리 교제하는 기회로 삼을 때 매우 유익하다고 봅니다.
또한 음식을 장만하여 나누는 것은 매우 유익하지만 제사상 차리듯이 차려 놓으면 안 됩니다. 그저 방 한 가운데 상을 차리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추모예식이 은혜 받는 가정부흥회로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가정의 추모예식에 성령의 위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박종순 외, 장례예식설교, 한국문서선교회, 2005, pp.267-268.
③ 제목: 주께서 주시는 후원으로
성구: 딤후 4:17-18
1. 인생의 후원자
요사이 학교에 기부금 제도가 도입되고 있습니다. 일종의 학교 재정후원 형태입니다. 결혼을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의 후원이 전혀 없이 월세방에서 출발하고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의 후원으로 호화로운 결혼식을 치르고 좋은 아파트를 구입해서 화려하게 출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후원 세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에게는 어떤 인생의 후원자, 혹은 후원 그룹이 있습니까?
오늘 추석 명절 추모예식에 참여하신 우리 모두가 새로운 후원자기 내 옆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신하는 가운데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바울은 그의 인생이 완전하게 변화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인생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분 때문에 바울은 인생의 목표를 바꾸었습니다. 복음 증거자로서의 삶을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증거자의 삶이 결코 쉽고 평탄한 길만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역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江)의 위험, 도적의 위험, 헐벗음의 고통 등등. 그러나 이러한 모든 역경들 앞에서 그가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몸이 쇠약합니다. 순간순간 만나는 위험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해 마음이 약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위기들 속에서 살아계시는 주님을 다시 한 번 만나게 됩니다. 이미 무덤 속에 계시는 주님이 아니라, 삶 속에 구체적으로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울을 강건케 하십니다. 비록 사자의 입에 들어갈지라도 건져내시는 주님이십니다. 바울이 당하게 되는 수많은 악한 길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이십니다. 비록 바울이 사역을 하다가 그 순간에 죽게 될지라도 두렵지 않은 것은 주께서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인생 여정 속에 위기와 역경이 없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후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든든한 후원자가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하기 위해서 바울을 든든히 붙잡고 계십니다. 이 목적이 성취되기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바울을 붙잡아 주실 것이고, 이 일을 마친 후에는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실 때까지 주가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주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에게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3. 진정한 나의 후원자
혹시 나에게는 아무런 후원자가 없다고 낙담하는 분이 계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강건케 붙잡을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주께서 당신의 정신적인 강력한 후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적인 자원들을 활용해 보십시오. 당신의 생애는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비록 당신의 생애에 수많은 위기가 닥쳐올지라도 당신은 벌벌 떨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자의 입에서 건져내시고,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는 분이 당신 곁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생애를 끝마치는 날 당신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죽든 살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당신의 삶과 죽음을 그분께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합소서” 당신에게 두신 그분의 목적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일을 위해 달려가면 되는 것이고, 그 사명을 다하는 날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지고, 당신은 천국으로 인도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에게는 아무런 후원자가 없다는 푸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곁에 서 계신 주님을 후원자로 삼고 다시 한 번 힘차게 출발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형준, 장례 추모예배 이렇게 준비하라, 아가페, 2005, pp.464-467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