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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형제들아’로 시작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1)
사도 바울이 교회 성도들에게 구체적인 권면을 시도할 때에 “형제들아”라고 불렸습니다.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하려고 자주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성령으로 행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지난 5장에서 말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으로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을 말했습니다.
이제 구체적인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서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라고 상황을 제시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어떤 잘못된, 그릇된, 범죄를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르지 못한 불의를 목격할 때에, 범죄 행위를 보았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실수, 잘못, 죄에 대하여 어떻게 할 수 있느냐? 그것은 개인 문제이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교회가 무엇을 다루고, 행동하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의 특성을 논할 때에 사도성을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오순절 이후에 사도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고, 섬기고, 복음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사도는 그 이후에 떠나갔지만 사도의 직무를 교회로 하여금 이어서 행하도록 했습니다. 사도의 직무를 교회가 계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의 교회들의 목자인 디도에게 “모든 권위를 책망하라”고 했습니다(딛 2:15). 성경은 형제들 사이의 문제(마 18:15-17), 규모 없는 행실(살후 3:6), 분쟁과 그릇된 가르침(딛 3:9-11), 심한 부도덕(고전 5장)에 대해 징계를 가할 것을 교회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의 문제, 죄는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지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이 형제라면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가 한 몸이기 때문에 죄는 전체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는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고전 12:26)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가족이기 때문에 지체의 죄는 교회의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책임 있게 죄를 다루어야 합니다. 교회가 죄를 잘못 다루거나 죄를 방치하거나 죄를 그냥 내버려두면 죄는 전체에게 영향을 주고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모두에게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했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바로잡고”입니다. 좀 더 명령처럼 들리도록 말하면 ‘바로 잡으라’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죄를 범했을 때,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5:19-21)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것들이 누군가의 삶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바로 잡으라’는 명령이 무슨 뜻일까요?
‘바로 잡으라’는 ‘카타르티조’는 ‘정리하다’ ‘원상으로 회복시키다’ 의미입니다. ‘바로 잡다’는 말은 고장 난 부분을 고쳐서 원래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수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서는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의 실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기 잡는 그물이 찢어지거나 망가졌을 때에 어부들은 그물코를 하나 하나 다시 손질을 해서 원상복구시킵니다. 그래서 다음 그물질을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뼈가 어긋나거나 빠졌을 때 다시 뼈를 맞추어서 원래 자리에 두는 것을 말할 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뼈가 빠졌을 때 그냥 두면 어떻게 될까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요? 빠진 뼈를 그냥 두면 계속해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뼈는 절대로 원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계속 고통 가운데 있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빠진 뼈를 다시 원래 자리로 옮기는 것이 바로잡는 것입니다. 다시 원래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잡는 것입니다.
주변의 형제 자매가 죄에 빠졌을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남의 실수나 잘못, 죄에 대해서 개입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대개는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냥 방관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어떻게 합니까?
‘아니,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저게 사람인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집사가 목사가 그럴 수가 있나’
그 사람을 멸시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도무지 혼자서 마음에 담아두기가 힘듭니다. 입이 근질근질해 가지고 다른 누군가에게 “있자나” 하면서 말을 전하게 되고 비난 혹은 욕설을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대로 두면 안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합니다.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일입니다.
뼈를 맞출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어긋난 뼈를 다시 맞추려면 빠진 뼈를 원래 자리에 옮기려면 잠깐의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뼈가 부러졌다면 그 조각을 서로 맞추어야 한다면 더 오랜 시간에 수술의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마취제나 수술 도구가 변변치 않았을 때에는 환자가 당하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바로잡고 수술하는 사람들도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몸부림치는 환자를 붙잡고, 그 비명을 들으며 힘껏 환자를 껴안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이런 고통의 과정과 불편의 과정을 감수해야만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나서 정상적으로 올바른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냥 두면 계속해서 고통 가운데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잡아라’ 그러기 위해서 누가 해야 할까요?
1.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누가 합니까? ‘신령한 너희는’ 신령한 사람이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신령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계속 언급되었듯이 5장에서 살펴본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으로 사는 사람, 그렇게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신령한 사람이 형제의 죄를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나름, 안심하게 됩니다. ‘그래, 이런 일은 신령한 사람, 성령으로 살아가는 성숙한 사람이 하는 것이지. 나는 아니야. 나는 신령하지 않으니까’ 스스로 위안 삼으러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다루는 일은 분명 조심스러운 일이기에 신령한 사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된 교회의 사람들은 성령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즉 성령님이 모든 지체 안에서 역사하고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 모든 지체가 성령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서 함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죄를 예방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과 빛은 공존할 수 없고,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신령한 사람이 있으면 어둠의 사람들은 불편합니다. 그래서 박해를 받기도 하지만 의연 중에 감화를 주고 감동케 합니다. 바로 선한 영향력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신령한 사람은 범죄한 사람들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우리는 범죄하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판단하고 평가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이끌어 내야 합니다.
셋째는 성령에 의지해서 죄로부터 떠나도록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바로잡는 일은 정죄하고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고백하게 하고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형제 자매의 허물이 드러날 때에 우리는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살펴야 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성령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맞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 강도를 구해주었습니까? 누가 그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까? 제사장도 아니었고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의 죄에 대해서 보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강도만난 자를 보고 그냥 지나갔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과 저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할까요? 강도만난 자를 도와준 사마리아인이 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
그렇습니다. 누가 범죄한 사람을 만나면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요?
2.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는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합니까? “온유한 심령으로”
이 일을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유한 심령입니다.
형제의 죄를 바로잡는 것은 나의 어떠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도 언제든 그 형제처럼 죄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자임을 알고 겸손한 태도로 도와주는 일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함께 생각할 때에 ‘온유’라는 단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온유는 ‘길들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흔히 말이 길길이 날뛰지 않고 잘 훈련된 말을 두고서 ‘온유해 졌다’고 합니다. 잘 길들어진 것입니다.
사나운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길길이 날뛰며 자기 성질대로 행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 길들어진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사람입니다.
여러분, 내가 온유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간단하게 점검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나의 잘못이나 고쳐야 할 부분을 지적 받았을 때, 누군가로부터 그러한 충고를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누군가가 예의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는 유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안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충고를 한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냥 무시합니까? 아니면 좋은 충고로 듣고 자신을 돌아봅니까? 상대방의 안 좋은 말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나에게 그러한 온유함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그러한 태도로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나에게 온유함이 부족하다면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더 주님 닮을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에 세번째 복이 바로 온유한 자의 복입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마 5:5)
대부분,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아빠보다 엄마에게 편을 듭니다. 대체로 아버지가 무뚝뚝하고 단호한 면이 있는 반면에 어머니는 부드럽고 너그럽고 품으려고 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온유하면 땅을 기업으로 얻고, 사람을 얻습니다. 어긋난 사람을 바로 세우고 돕는 일에도 강직한 것보다 온유한 마음으로 행할 때에 가능합니다.
3. 바로 잡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나?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현대인의 성경이 이 부분은 더 잘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런 시험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회복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은 자신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다룰 때마다 눈을 크게 뜨고 나 자신을 더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우리도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얼마든지 죄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시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Any time, anywhere. 시험은 언제든 어디서든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도 죄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범죄한 형제와 동일한 죄의 유혹을 받을 수도 있고, 뿐만 아니라 범죄한 형제를 보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범죄한 형제와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며 자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언제나 조심 조심, 나 자신도 연약한 그릇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가인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9)
자신을 속이며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아우를 죽인 가인의 이 무책임한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형제가 죄 가운데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내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까?’
성도 여러분, 맞습니다. 나는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나는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는 자여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고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죄로 고통받고 있는 지체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서로를 사랑으로 돌아보고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누군가 죄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그를 붙잡아서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그러한 책임이 있는 관계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말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그에게 달려가 당신의 팔로 그를 일으키시오. 그리고 부드러운 말로 그를 위무하시오.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를 당신의 팔로 안으십시오”
온유한 주님의 음성(529,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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