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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부활주일예배 설교
○ 히브리서 2장 9절 죽음에서 시작된 부활
지난 주간에 한 목사님을 만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일 모레는 부활주일이네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목회자에게나 부활주일이지 성도들에게는.....”하고 말을 끊으셨습니다. 그 교회는 미자립교회로서 아마도 부활주일 때 목회자 부부만 여러 가지 준비하지 성도님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여기하는 것같았습니다. 워낙 연세드신 성도님들로 이루어진 시골교회들은 이런 문제로 고민할 것입니다.
저는 그 이여기를 듣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하게 부활절을 맞이하고 보내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보았습니다. 목사님들만 기억하는 부활절이 아닌 온 교회의 부활절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진정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지키는 부활절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삶에는 인생의 고난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부활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의미를 몇 가지로 정의를 합니다. 그리고 이 정의는 여러분들의 영생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믿기 전의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모습이었느냐를 살펴보면 첫 번째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들의 아들을 죽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나라에서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그 살인자가 갇힌 감옥에 가서 그를 위해 죽도록 봉사하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대부분은 “죽으면 죽었지 그런 짓은 절대 못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나라가 시키는 명령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가서 봉사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할까요? 어쩌면 마실 물을 가져다 주면서 여러분들의 침이라고 그 그릇에 뱉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독약이라고 구해서 넣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갈등하다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일번부터 3번까지 중에서 어떤 행동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악한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죽는데 내어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확증하실 때 여러분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많은 죄를 지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그런 죄인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신을 찾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을 찾는 이유는 모두가 다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육체적인 행복을 위해서 신을 찾았습니다. 신의 뜻이 무엇이며 그 뜻은 어떻게 행할 수 있는지를 묻지는 않았습니다. 죄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는 지옥에 보내기보다는 구원하여서 자신의 나라인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감히 인간의 생각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을 믿기 전에 여러분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상태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을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사랑법입니다. 원수인데 그 사람과 화목하기 위해 아들을 죽는데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구원하지 않으셔도 전혀 아쉬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면 얼마든지 다시 사람을 창조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여러분들의 집에 잘쓰던 세탁기가 있는데 오랫 동안 써서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고쳐달라고 애프터 서비스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수리 기사가 와서 여기 저기 살펴보더니 말합니다.
“고객님 이 세탁기를 고쳐서 쓸 수도 있고 다시 사서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쳐서 쓰면 얼마 안있어서 또 다른 부품에 이상이 생겨서 고장이 날 것입니다. 그렇게 몇 번 고장이 나면 수리비가 새로 사서 쓰는 것보다 더 많이 나갈 것입니다. 그래도 고치시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세탁기를 새로 살만한 돈을 통장에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고쳐서 쓸까요? 아니면 새로 사서 쓸까요? 아마도 저라면 당장 새 것으로 교환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들과 악인들을 없애버리고 인간을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도 말썽 많고 탈도 많은 죄인과 원수들을 고쳐서 쓰기로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많은 죄를 지으며, 때로는 원수같이 행동할 것을 아시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었고 원수였던 여러분들과 화목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을 구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 화목이 들어 있고, 부활 속에 구원이 들어있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침례 요한을 먼저 보내셔서 침례를 베풀면서 회개를 통한 죄사함과 예수님과의 연합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4절을 보면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하고 있습니다. 죄사람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가 침례 요한이 주던 침례입니다. 이를 통해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자기들의 마음에 임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대로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역시도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로마서 6장 3-5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여기를 보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침례받으실 때 예수님은 자신과 여러분들과의 연합을 염두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로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들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죽으심과도 연합되었고 그의 부활하심과도 연합되었습니다. 마치 신랑과 신부가 한 몸으로 연합된 것처럼 여러분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화목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이유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연합할 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6장 10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죽으셨는데 예수님 자신의 죄가 아니라 온 이유가 지은 죄입니다.
예수님은 그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나셔서 자신의 생명의 영인 성령을 여러분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로인해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부활생명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대하여 영원토록 살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원수인 여러분들에게 왜 부활하신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이유는 여러분들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빌립보서 3장 10-12절을 보면 알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을 그가 피하지 않은 이유는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피합니다. 특히나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오는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부활은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펴보면 불신자들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성공하고 싶어하고 불신자들이 추구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추구합니다. 성공, 출세, 행복, 건강, 돈, 명예, 인기 등의 부귀영화를 구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 불신자들이 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날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삽니다. 그러면서 자기 삶에 대하여 정당성을 붙입니다.
가난한 것보다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출세하는 것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출세를 구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왕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는 것을 굳이 피하셨을까요? 왜 만인이 부러워하는 왕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죄인중의 괴수죄인취급을 받는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자리로 나가셨을까요?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리스도의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찾으신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 병든자들, 죄인들, 세리들, 창기들, 어린 아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찾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일까요? 사실 사회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부러 병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인들의 죄에 동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그들이 있는 어두운 땅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범죄자들이 우글거리는 교도소에 찾아가 성령과 동행하면서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문명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그런 나라 사람들을 찾아가서 밤낮 없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먹을 음식과 의료품과 복음을 들고 나가는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 있는 나라의 영혼들을 위해 다 쏟아붓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그의 죽으심에 참여함을 알고자 그리스도께서 계신 자리를 향해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사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있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가난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 나라의 도움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복음이면 충분합니다”라는 책에서 보면 큰 학원을 하던 곽희문과 그의 아내가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케냐의 고로고초 어린이들이 맨발로 대형 쓰레기장을 뒤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부부는 “우리 케냐로 갈까?”하고 마음을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 나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아이들도 모두 데리고 말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부요하고 성공적인 삶을 버리고 떠났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 안에 계신 성령께서 진리로 역사하시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 안에서 행동하게 됩니다. 그들 속에 있는 진리가 케냐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나라의 복지가 많이 발달해서 사회의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교회만이 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시 위해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극심한 외로움에 빠진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교회를 통해 그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권능과 그의 죽으심에 참여함을 알려고 하는 교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2장 9절을 보면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자로서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민 하시면서도 하나님이 정하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민에 대하여 마태복음 26장 38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죽을 정도로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해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피곤하여 골아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민하는 사람도 없었고 함께 기도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셨습니다. 죽을 정도의 고민을 혼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셨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로인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 아들에게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부활이 이루어졌고 영원한 영광이 예수님께 돌려졌습니다.
여러분이 죽을 정도로 고민한다면 무엇을 위해서 고민하기 때문입니끼?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가족들을 위해서는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를 위해서 하는 고민도 죽을 정도로 고민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고민은 이 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죽음이나 고난은 여러분들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과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여러분 역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이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부활절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부활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영원한 동행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도 고난도 여러분들을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마귀는 죽음과 고난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여러분들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신 몸을 성령을 통해 증거하십니다. 그로인해 여러분들의 믿음은 죽음과 고난의 두려움을 초월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여러분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부활생명을 가지신 여러분들은 이제 세상이 귀하게 생각하면서 가치를 두는 그런 것들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 끝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여러분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실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