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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묵상글 들 (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 왜 악하게 되었을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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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왜 악하게 되었을까?
왜 그는 하느님을 냉혹한 분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까?
셋째 종은 왜 하느님을 달리 보고,
다른 두 종과 달리 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다 제 마음속에 있는 대로 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까 셋째 종의 마음속엔 냉혹함이 들어있겠지요.
이 지점에서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인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 셋째 종을 악한 자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복음 다른 곳에서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해 얘기하신 바가 있지요.
하느님은 악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에게 똑같이 해와 비를 주신다고.
이렇게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도 자비하신데
선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좋아하는 데 비해
그 자비를 모르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악한 사람이지요.
오늘 셋째 종도 주인이 미나를 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그런 주인을 냉혹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분명 주셨는데도 안 줬다고 하는 것이고,
주는 것은 없이 뺏어만가는 조폭과 같은 분이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는 하느님께서 주셨는데 왜 안 주셨다고 생각하고
주시지는 않고 뺏어만 간다고 생각할까요?
둘 중의 하나이거나 둘 다입니다.
주신 것이 내가 원하는 만큼이 아니거나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일 경우입니다.
그러니 악한 사람은 욕심이 많거나
천상 것이 아닌 지상 것을 원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선한 사람은 욕심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에 조금 있어도 많다는 사람이고,
최악을 각오하기에 최악만 아니어도 선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선한 사람은 영적으로 선한 사람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을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첫째 종이나 둘째 종처럼 하느님께 많이 되돌려 드리지 않고,
그저 하느님의 선을 좋아하고 사랑하기만 해도 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크게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강박감 가지지 말고,
하느님을 선한 분이요 사랑이신 분으로 알아만 드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선한 사람이 되자고 소박하게 생각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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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루카 19,16)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늦가을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 지지만, 사실 이를 주의해야 합니다. 곧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을 많이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습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 다.”(루카 6,44-45)
그렇습니다.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입니다. 곧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요,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빛은 빛의 열매를 맺고 어둠은 어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야 할 일입니다. 열매에 치중하다 자신을 그르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지도 말아야 할 일입니다.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 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사실, 이처럼 믿음은 능력이요, 불신은 무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이 힘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믿는다면 그 믿음에 대한 충실이 요청됩니다. 그 믿음에 충실하다면,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미나를 나누어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주님!
당신께서는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사랑과 신의의 표시로 저에게 ‘미나’를 맡기셨습니다.
잘 간직하라고 가 아니라, 잘 열매 맺으라고 씨앗으로 선사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신의를 땅에 묻어버리고 제 신변안전만 바라는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게 하소서.
믿음과 사랑이 꽉 찬 열매를 들고 당신 앞에 나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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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느님의 나라,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 협력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여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자캐오는 ‘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달랜트를 뿌리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 를 소중히 여기는 하루를 기대합니다. 어떠한 큰 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 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가19,26)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 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심이 없다고 넋두리 하고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신앙을 키워주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못한 저의 잘못을 자책하는 오늘입니다. 대접 받기에 익숙해지고 독불장군으로 고착되는 오늘을 봉헌합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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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마카베오 시대에 유다교를 박해하던 헬레니즘 정권에 저항한 유다인들이 많았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곱 형제를 둔 어머니는 자기 아들들이 하루에 죽어나가는 끔찍한 비극을 겪으면서도 용감하게 견디어 냈습니다. 게다가 그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들에게 조상들의 언어로 격려하며 죽은 후의 현실에 대한 희망을 상기시켜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열성 유다인들이 간직했던 희망이란 죽음 이후에도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내세의 현실에 대한 희망이었고, 또한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신앙으로 죽음을 당한 이들을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간직했던 바 내세의 현실에 대한 희망을 넘어서는 또 다른 희망에 대해 오늘 복음에서 미나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안고 죽은 이들이 그저 천당 복락을 누리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 곁에서 천사가 되어 현세의 남은 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희망이었습니다. 이 비유는 탈렌트의 비유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마태오가 전해준 탈렌트의 비유는 최후의 심판에서 현세의 공로를 재어 천국의 상급을 정해주는 잣대를 말하는 것이지만, 루카가 전해준 미나의 비유는 그 최후의 심판을 통과한 후에 천국에서 하느님을 도와서 현세에 남아 있는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권한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현세의 삶을 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점에서는 공통이지만, 심판 후 내세에서 현세에 미칠 영적인 영향력의 상급을 결정하는 미나의 비유는 훨씬 더 포괄적이고 이타적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에서 성인성녀들은 전 세계 교회의 전례에서 공경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복자복녀들은 출신 지역 교회에서만 전례로 공경하게 규정되어 있는 차이가 이 미나의 비유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카베오 시대에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그 일곱 형제의 어머니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유다인들도 현세를 마친 죽음 이후에도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현실에 대한 믿음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도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이 세상을 살고 난 다음에는 죽어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다는 표현의 존대어법이 “돌아가셨다”입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과 서양의 어느 나라 언어에서도 이러한 표현어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고려조와 조선조 동안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불교와 유교 등에 억눌려 왔었다가 드디어 2백여 년 전 18세기 말에 천주교가 기묘한 섭리로 조선에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한문과 유학의 한계를 절감했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 질서로 운영되던 조선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절망하던 선비들이 사문난적이 될 각오로 천주교 신앙운동을 시작했지만 이를 한글과 민중의 언어로 전달받은 민간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환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현세와 내세를 관통하는 영적인 현실의 진리를 하느님 신앙으로 밝혀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백 년의 박해를 견디어 내면서도 신앙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끈질기게 저항한 배경이요 끝내 이겨낼 수 있었던 저력입니다.
하느님 신앙을 민간에서 더욱 환영한 사정을 더욱 뒷받침해 주는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 신앙을 전국에 흩어진 교우촌에서 사회운동 규모로까지 퍼뜨려 나가자 마치 이를 깃발로 삼은 듯이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한 민족종교들이 19세기 중엽부터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모두 억눌렸던 하느님 신앙을 다양하게 되살려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이에 더해서 민간신앙의 무속이 믿어온 하느님 신앙의 영적 위계질서를 식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세적 복을 빌어달라고 부탁하는 귀신이나 현세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부르는 잡신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예수님께서는 그 창조주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으로서 하느님을 가장 닮으신 인간이시고, 이 성부와 성자를 우리와 연결시켜주시는 신이 성령이심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죽어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현세를 의롭고 거룩하게 살다 가신 천국의 영혼들과 통공을 이룩해야 하는 존재이고 또 우리도 죽은 다음에 그 영혼들처럼 다섯 미나 만큼이든 열 미나 만큼이든 현세에 남은 이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 현실의 진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현세와 내세의 현실을 깨달은 이는 살아서나 죽어서 더욱 지혜롭게 살 수 있고, 이 현실을 깨닫지 못한 이들은 현세에서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죽을 때 장례를 잘 치르기만 하면 막연하게 죽어서 좋은 데로 가려니 하겠지만 그 부질없는 희망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 환호송의 말씀처럼, 우리도 세상에 가서 복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열매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길이 남을 것입니다. 한 미나와 같은 초라한 성적을 내지 마시고 다섯이든 열이든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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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한국 문화의 해외 진출로 우리나라의 위상이 참 많이 올라갔습니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정점을 찍고, 아카데미 수상에서도 한국 영화가 최고 작품임을 알립니다. 여기에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정말로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케이팝(K-Pop)과 케이무비(K-Movie), 케이드라마(K-Drama)는 해외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해외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던 때는 199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랬을까요?
사전심의가 폐지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이 사전심의가 대단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장희의 ‘그건 너’라는 노래는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내용이라고 금지곡이 되었고,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냐면서 부정적인 내용이라고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이런 식의 검열로 표현의 자유가 있을 수 없었고, 자연히 작품성이 떨어지는 그냥 일반적이고 무난한 작품만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이 안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케이컬쳐(K-Culture)로서 국가의 위성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간섭을 줄이고 자유를 늘려주신 것입니다. 이를 주님의 무책임한 방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귀족이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습니다. 귀족이 돌아온 뒤, 어떤 종은 열 배로 또 다른 종은 다섯 배로 불립니다. 그러나 주인인 귀족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냥 자기 합리화로 얼버무리는 종의 미나는 빼앗아서 열 미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투자를 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 예를 들면 우리의 생명,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들을 열심히 사용해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지요.
똑같이 하나의 미나를 나누어주시듯이,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합니까? ‘왜 저 사람만을 더 사랑하실까?’라면서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나는 능력이 없어서요’라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외면하고 게을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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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을 갖는 일은 사랑하는 연습이다. 사랑이 피어오르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속 두려움을 마주하고, 이해하고, 끌어안는 과정이 필요하다(임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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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 New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하는 놀이가 있습니다. ‘Good & New’라는 놀이입니다. 게임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24시간 이내에 있었던 좋은 일(Good) 혹은 처음 했거나 처음 경험한 일(New)을 1분 안에 말하는 게임입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말하는데, 사소한 일도 괜찮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약간 야단법석을 떨며 손뼉 치며 기뻐해 줘야 합니다.
이 놀이는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 게임처럼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놀이 후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곳에 오는 것을 즐거워했고, 일상 삶 안에서도 계속 좋은 일과 새로운 일을 찾아 행하는 적극적인 아이가 된 것입니다.
좋은 일과 새로운 일은 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문제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내 마음에 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좋은 일과 새로운 일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좋은 일과 새로운 일에도 적극적으로 기뻐해 줘야 합니다. 그때 더 좋은 효과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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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홍보를 가면서 사업하는 분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게 됩니다. 요즘은 종이신문을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신문 홍보도 쉽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몇 시간 씩 가기도하고, 비행기를 타고 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감사할 일은 신부님들께서 배려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교우 분들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신부님들께서는 공지사항 때 신문 구독을 독려해 주시고, 교우 분들은 신문 홍보를 잘 할 수 있도록 의자와 탁자를 준비 해 주십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것을 실감할 때도 있습니다. 저의 일을 도와주시는 형제님과 대화하면서 한국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서울에 있을 때 보좌 신부로 있던 성당에서 청년활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일찍 미국에 와서 저와는 같이 지낸 시간이 없었지만 제가 아는 청년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에 있는 예전 본당의 청년들과 인사 할 수 있었고, 형제님은 예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단 하루를 살았어도 인생은 흑자라고 하였습니다. 광대한 우주에서 지구별에 태어난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아름다운 생명이 넘쳐나는 별은 우리가 발견한 최고 성능의 망원경으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수천억의 별 들 중에 우리가 지구별에서 살 수 있는 것은 행운이며 행복입니다. 어제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신앙 때문에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참 안타까운 죽음이 많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 갑자기 찾아온 병,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과 작별하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이러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오듯이, 땅에 떨어진 씨앗에서 새싹이 나듯이 신앙인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출구 없는 미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나’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열 미나를 가신 사람은 본인의 십자가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간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남에게 미루려는 사람은 결코 부활의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라는 배가 없으면 우리는 부활에 이르는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2021년 우리는 230년 전에 순교한 ‘윤지충, 권상연’ 복자의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230년 동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유해를 모시고, 그 위에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기리는 성전을 세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 집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과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기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 나눔, 희생, 봉사, 인내’입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 하느님 나라만 찾는 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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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
- 한평생 맡겨진 책임을 ‘참으로’ 다하는 사랑 -
오늘은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여기 요셉수도공동체 형제들은 지난 주일 11.14일 주일 저녁기도부터 11.20일 토요일 아침미사까지 박재찬 안셀모 도반 수도사제의 지도로 연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토마스 머튼의 삶과 영성-Becoming Love(영적변화와 성장)-”입니다.
토마스 머튼! 1985년도 수련기때 참으로 심취하고 열광했던 당시 제 영적 우상이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왜관수도원내 도서실에 있는 영문판 서적은 물론 참 많은 책들을 읽었고, 33년전 대구가톨릭 신학대학원 1988년 최초 석사논문 1호도 제가 쓴 ‘토마스 머튼의 관상’이었습니다.
이제는 토마스 머튼을 졸업했지만(?) 당시는 토마스 머튼은 제 영성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제 사랑 전부이고 토마스 머튼은 전부중 ‘일부’일뿐입니다. 피정 주제중, Becoming Love(사랑이 되기)! 영어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갈망과 제 갈망이 일치가 된다 싶은 말마디였습니다. 한마디로 한평생 ‘사랑이 되고 싶은’, ‘사랑이신 하느님이 되고 싶은’ 존재론적 변화의 갈망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 되고 싶은 갈망에서 모든 성인이 일치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순교적 사랑의 삶을 살다가 24세!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녀의 영적지도 신부였던 마르부르크의 콘라트의 증언입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녀의 대해 이 말을 하고 싶다. 이 여인만큼 관상에 깊이 젖어 들어간 이를 일찍이 본적이 없다. 사랑의 관상이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여러 번 목격했듯이 그녀가 기도의 은밀함에서 나올 때 그 얼굴은 광채로 빛나고 그 눈에서 태양 광선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전 나는 그의 고해를 들었다. 남기고 가는 재산과 의류를 가지고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내가 물어보자, ‘자기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니고, 모두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자기가 입던 낡은 옷을 제외하고는(그옷을 입고 묻히기를 원했다), 전부를 가난한 이들에 나누어 달라고 간청했다.
이 말을 마치고 주님의 몸, 성체를 영했다. 그리고나서 저녁기도때까지 자기가 전에 설교말씀에서 들은 거룩한 이야기를 되새겼다. 마침내 열렬한 신심으로 주위에 모인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서 평온히 잠들 듯 숨을 거두었다.”-
말 그대로 ‘사랑이 된’ 관상가의 한생애였음을 봅니다. 제 수도원 숙소 복도 벽에 걸려 있는 ‘沈默(침묵)’이란 한자 목판이 새삼스럽게 감회에 젖게 했습니다. 수도원 초창기 부임시 그러니까 33년전 1988년 가을에 썼던 제 글씨입니다. 침묵의 사랑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침묵의 소중함이란 시중 한연이 떠올랐습니다.
“침묵은 사랑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치 않고 마음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사랑입니다.”
제가 어느 수도원에 가든 우선 확인하는 것이 셋입니다.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에 이어 수도원 묘지墓地입니다. 특히 수도원 묘지에 말없이 묻혀있는 사랑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묻힌 수도선배들의 묘와 더불어 십자가 표에 묘비명 없이 이름만 써있는 묘비석을 볼 때면 가슴 먹먹한 감동을 느낍니다.
지난 2014년 안식년중 3개월 동안 한국 수도자들이 살고 있는 미국 ‘뉴튼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매일 찾았던 수도원 묘지였습니다. 묘비명들을 대하면 그분들의 생애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의 마지막 연은 그의 묘비명으로 해도 좋을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이렇게 고백하고 떠나는 삶이라면 오늘 강론 제목대로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제 경우라면 제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시를 새긴 시비詩碑를 유언으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16년전 2005년 써놨던 “내 묘비명은”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장차 내 묘비명이 있다면 다음과 같았으면 좋겠다’에 이어 쓴 시입니다.
-“그는 욕심이 없었고
평생 하느님만을 그리워했으며
그 무엇을 바라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하늘의 깊이와 넓이, 맑음만을
어둔 밤 빛나는 별처럼 깨어 있음만을
하늘 떠도는 흰구름의 자유만을
산의 한결같은 인내와 침묵의 사랑만을
바라고 부러워했다
그는 정말 다른 무엇도 바라거나 부러워하지 않았다
자연은 또 하나 그의 사랑이자 종교였다”-2005.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 떠오른 단상들입니다. 믿는 이들 너나 할 것 없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의 한평생 삶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누구나 똑같이 선물로 받고 있는 하루하루의 삶이자 한평생의 삶입니다. 과연 선물인생이자 과제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요? 사람마다 과제의 정도는 다 다를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 앞에 한평생 과제를 제출할 준비는 되어있는지요. 하루하루 과제를 제출하며 하느님 앞에 셈바치며 사는 삶을 습관화하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각자 그 이상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닌 각자에 맡겨진 책임만큼만 기대하고 요구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 그대로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남기든, 다섯 미나를 남기든 제 능력대로 맡겨진 책임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결과의 양이 아닌 분투의 노력을 다한 결과만 보십니다. 이런 이들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잘하였다, 착한 종아!” 칭찬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맡겨진 책임을 전혀 하지 않았던, 받은 은사를 사장시켰던,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태만했던 한 미나 그대로 였던 이에게는 “악한 종아!” 가차 없는 질책과 더불어 심판이 뒤따를 것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요 아무도 탓할 수 없습니다.
인생사계로 압축해볼 때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습니까? 과연 사랑의 영적 열매들 풍성한 가을 인생인지요. 풍성한 사랑의 배열매들의 수확후 초겨울에 접어든 분위기는 말 그대로 넉넉하고 평화로운 ‘텅 빈 충만’의 분위기입니다. 흉작이라면 한없이 마음 쓰리고 쓸쓸한 ‘텅 빈 허무’의 배밭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인생을 뒤돌아 보게 하는, 배밭이 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어제의 엘아자르의 순교에 이어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의 순교에 대한 일화입니다. 평소 하루하루 축적된 내공의 깊이를, 믿음의 깊이를 깨닫게 합니다. 몇날의 준비로 이런 사랑의 순교는 불가능합니다. 분명 하루하루 죽음 준비를 하며 주님 향한 한결같은 사랑과 믿음의 삶이었기에 배교나 변절함이 없이 참으로 책임을 다하는 거룩한 사랑의 순교입니다.
참으로 가슴 먹먹하게 순교장면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입니다. 어머니의 책임을 다하는 사랑과 믿음을 보고 배운 일곱 아들들임이 분명합니다. 그 어머니에 대한 감동적 묘사에 이어 마지막 아들에 대한 부탁입니다.
-‘그 어머니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 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고결한 정신을 가득 한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붇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말 그대로, 부활의 승리를,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내다보는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로 충만한 그 어머니의 영혼입니다. 과연 나 같으면 어떤 처신을 했을런지요? 유비무환입니다. 언젠가 있을 죽음을 늘 눈앞에 환히 두고 하루하루 깨어 최선을 다하며 참으로 책임을 다하는 사랑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믿고, 참으로 희망하고, 참으로 사랑하며, 참으로 살 때 참으로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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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다시 오실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시키십니다.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루카 19,15)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오려고 먼길을 떠나기 전, 열 종에게 한 미나씩 나누어 주고 벌이를 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왕권을 받고 돌아와 종들과 셈을 하려는 참입니다.
이 장면은 사람의 아들의 날, 우리의 임금이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와 셈을 하시게 될 구원과 심판의 날을 보여줍니다. 그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마련해 주셨던 영적 물적 자원들을 어떻게 성장시켜 열매를 맺었는지 그분과 함께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루카 19,22)
주인이 이른 대로 성실히 벌이를 해온 종들은 주인에게 착한 종이라 불리지만, 주인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은 악하다는 호통을 듣습니다. 그들은 주인(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시각과 왜곡된 자아상으로 은총과 선물을 허비한 이들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자신이 받은 여러 자원을 성실하게 돌보고 키워 주인께 되돌려 드리는 이에게는 더 큰 축복이 기다립니다. 순종과 헌신, 믿음과 사랑에 대한 보상입니다. 반면 받은 것조차 경시와 불평으로 묻어버리고 주인이 냉혹하다고 원망하기까지 한 이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을 정도로 모조리 다 잃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일곱 형제의 순교 이야기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2마카 7,20)
사랑하는 일곱 아들을 한 날에 다 잃은 어머니가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주님께 대한 희망"입니다. 그녀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주님을 경외함이라 믿기에 아무리 처절한 상황이 닥쳐도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조상들의 관습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부자로 만들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며 벗으로 삼고 관직까지 주겠다고 하면서 ... 맹세까지 하였다."(2마카 7,24)
임금의 회유책에서 무엇이 느껴집니까?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의 가치와 대립하라고 악이 내거는 유혹은 재물, 세속의 행복, 권력자의 측근이 갖는 잇권, 관직입니다. 시대와 장소, 문화가 달라도 어쩜 이리 복사판처럼 꼭 같은지요!
오늘의 주인공인 어머니와 일곱 아들은 임금의 회유를 비웃으며 극심한 고문과 잔인한 형벌을 견디어 내고 끝내 순교로써 하느님께 신의를 지킵니다. 하느님으로 부유하고 천지의 창조주를 벗으로 삼는 복락은 고작 세속의 부자가 되고 권력의 중심에 서는 일과 비교할 가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열정과 신의와 헌신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한 미나를 열 미나, 백 미나로 불려서 온 세상을 감싸안고도 남을 축복으로 확장시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운 우리는 그러라고 초대된 이들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손에 소중히 쥐어 주셨던 한 미나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마다 힘들고 버거운 인생길에서 힘껏 애쓰며 살아온 우리에게 주님께서 반드시 "잘 하였다, 착한 종아!" 하실 겁니다. 축복에 축복이 더하여 주님으로 부요하고 충만해진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재속 프란치스칸들의 주보성녀 헝가리의 엘리사벳이 바로 우리의 모범입니다. 성녀 엘리사벳,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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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19,13)
'믿음으로 순종하자!'
오늘은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시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이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과 주보 축일을 맞이한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축하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인 '미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는 줄로 생각하자, 예수님께서 미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루카19,12)
이 비유 말씀에서 '어떤 귀족'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시고, '먼 고장으로 떠났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을 뜻합니다.
'미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한 미나씩 주시고 하늘로 오르셨고, 왕권을 받고 돌아와(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공평하게 받은 '한 미나'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인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19,13)
이 말씀은 믿음을 잘 키워나가야하고, 우리 모두의 사명인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미나를 받고, 벌이를 잘하여 열 미나를 더 벌고, 다섯 미나를 더 번 종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받은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하였다가 그대로 돌려드린 종은 주인으로부터 호되게 야단 맞습니다.
주인이 벌이를 하라고 맡긴 돈을 '수건에 싸두었다는 것'은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 했음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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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복음에 따라 살아가고자 우리는 ‘순명’(順命, oboedientia)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하셨기에,
그 삶을 본받아 순명의 삶을 살아가라고 교회는 권고합니다.
사제로서 그 삶은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순명의 마음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내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도 있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지만,
저에게 그 일을 명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반대되는 것을 명령하시고, 원하지 않는 것도 명하십니다.
쉬운 길이 있는데 어렵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령을 따릅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의지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명령을
따르는 것이 순명’이지만, 가끔은 그 안에 희생과
의무만 있고 기쁨은 사라져 버릴 때도 있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평생을 주인 곁에서 심부름만 하던 종들에게, 주인이 나누어
준 돈으로 벌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막막하기도 하고, 주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잘못해서 돈을 잃으면 벌이 기다리고 있음에 두렵기도 했겠지요.
어떤 종은 주인이 이 과제를 주며 명령한
이유와 주인의 생각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행동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와는 다르다고 비판하고
짜증 내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그 과제 안에서 자신의 이유를 찾으려 고민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은 불평과 불만, 두려움과 나태함으로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냥 “예.”라고 대답만 할 뿐입니다.
순명의 가치는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을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모습은 다르지만 분명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이해하려 고민하고, 행동하려 고민하고,
같은 것을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며 고민하는 흔적이
순명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순명의 길을 오늘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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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열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거룩하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아들이고, ‘여행’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 왜 왕권을 받고자 하늘에 오르셨을까?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들에게도 그것을 주셨다. 그분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이 오른쪽에 앉으시어”(히브 1,3) 당신의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게 될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신다. 이것이 미나/탈렌트의 뜻이다. 이 미나를 받은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를 받는다. 그들은 직무를 실행하며 이윤을 낸다. 그래서 성실히 일했다는 칭찬을 듣고, 영원한 영예를 누릴 자격을 인정받는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셨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일러주신다.
그러나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14절) 한다.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요한 15,24)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끊임없이 예고했는데도 그들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 했고, 그분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능력과 준비된 상태에 따라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마태오 복음에는 각 사람이 받은 탈렌트가 달랐다고 한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그리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셨다고 한다.(마태 25,15 참조). 각자에게 그 능력에 따라 그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잘 받아서 잘 활용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도록 하자.
우리가 바쳐야 할 이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행실 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산다면 주님께 이익을 남겨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 이런 칭찬을 들을 것이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절) 우리는 주님께 받은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거나, “땅에” 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돈이 어떤 면으로든지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신다. 수건에 싸서 두었던 종은 심판을 받았으며, 결국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만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24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우리가 열 미나를 바치고 다섯 미나를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바친 것을 모두 돌려받는다. 하느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다. 우리가 풍요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열매를 맺는 삶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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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잘하였다, 착한 종아!"(루카 19, 17)
나눔은
단풍처럼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어디로
가고 있는
우리들 삶인가.
삶은 진정한
나눔처럼
요란하지 않다.
빈 손이 아니라
나눔을 가지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길이
사람의
길이 된다.
우리를 믿고
맡기신
소중한 삶이다.
맡기신
삶이기에
아주 작은 일에
우리는 충실하고
성실해야 한다.
누구나 성실을
알지만 삶에
성실하지는 않다.
성실하다는
것은 수건에 싸서
보관하는 냉혹함이
아니라 나누고
함께하는 삶의
기쁨이다.
삶과 죽음의
중심에는
우리의
하느님이
계시다.
숨길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된다.
삶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나눔이 있다.
나눔이
하느님 나라의
뜨거운 울림이다.
우리에게
건네주신
나눔의 삶임을
잊지말자.
하느님과의
만남은
나눔의
이야기이다.
이와같이
삶의 끝은
어디인가.
새로운 나눔이
시작이 되시는
하느님이시다.
진심어린
나눔이
잘한 것이며
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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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루카 19,12-13).”
‘미나의 비유’는 마태오복음 25장에 있는 ‘탈렌트의 비유’와 같은데,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귀족’은 예수님이고,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난 일은 ‘승천’을 뜻합니다.
‘미나’는 당시에 사용하던 금화의 이름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는데,
‘60 데나리온’, 또는 ‘100 데나리온’이 ‘한 미나’입니다.
그리고 ‘60 미나’가 ‘한 탈렌트’입니다.
‘미나’는 ‘탈렌트’에 비하면 그렇게 큰돈은 아니지만,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미나의 비유’는 ‘순종’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나누어 준 ‘미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뜻하고,
종들이 그것으로 벌어들인 돈도 은총을 뜻하고(24절),
성실하게 일해서 받은 상도 은총을 뜻합니다(17절).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지시한 대로 종들이 돈벌이를 하는 것은,
명령에 복종하는 일도 아니고, 맡겨진 과제를 수행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 일 자체가 은총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생활 자체가 은총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고,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이고, ‘내가’ 기뻐하니까 하는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신앙인으로 불러 주신 것도 은총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은총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의무’나 ‘복종’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의 삶을 ‘의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자체가 은총인데,
자신이 받은 은총을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의무감으로 하는 일에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일, 즉 ‘강제 노동’과 같은 일입니다.
<‘순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인의 순종’은 싫든 좋든 명령에 복종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응답은 순종의 대표적인 모범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씀을 풀어서 표현하면,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서 이루어지기를 저는
원합니다. 그래서 종이 주인을 따르듯이 주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과 자신의 응답에 대해서,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라고 노래했습니다(루카 1,47).>
‘미나의 비유’ 바로 앞에 있는 이야기에 나오는 ‘자캐오’를
‘능동적인 응답’의 예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5-6).”
이 이야기에서 보이는 자캐오의 응답과 기쁨은 하나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불러 주신 것을 기뻐했고,
동시에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 상황을 “기쁘니까 응답했고, 응답할 수 있어서 기뻐했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라자로’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요한 11,43-44).”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은 라자로가 스스로 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생명을 주셨지만,
라자로 쪽에서 그 생명을 받으려고 능동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생활은 그렇게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라자로가 무덤 속에 그대로 누워있는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또는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하면서 그냥 누워 있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나의 비유’에서, 성실하게 일한 종들이
칭찬과 큰 상을 받는 것은(루카 19,17.19),
주님께서는 결과보다 과정을(노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과
신앙생활은 신앙인 자신을 위한 생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인은 종들이 번 돈을 차지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또는 예수님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표현할 때가 많긴 한데, 그래도 신앙생활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생활입니다.
그러니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만일에 그가 어느 정도 돈벌이를 했더라도,
기쁨 없이 의무감으로만 억지로 했다면,
그것도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하기 싫은데도 어쩔 수가 없어서 억지로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탈렌트의 비유’에는
세 번째 종이 ‘쓸모없는 종’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마태 25,30).
신앙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하느님을 위해서도,
이웃을 위해서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곧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마태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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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을 키워가는 사랑의 응답 ♣>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예수님께서는 과월절을 지내려는 갈릴래아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 앞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나 그들은 착각에 빠져 정치적 해방을 가져다주길 기대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미나의 비유 (19,12-24)를 들어 당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맞이할 능동적이고 합당한 준비가 필요함을 가르치십니다.
어떤 귀족이 종들에게 한 미나씩을 나눠주며 돌아올 때까지 벌이를 하라고 명하고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그 사이 한 미나를 첫째 종은 열 미나로, 다른 종은 다섯 미나로 늘렸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한편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그대로 보관만 한 종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주인의 뜻을 거스릅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9,26)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 시간, 사람들, 삶에 필요한 재물과 재능, 그리고 신앙과 성소, 사랑과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혼자 움켜쥐고 있으라고 주신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그 선물들을 키우고 가꿔나가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 사랑으로 더 열정적으로 채워가야 하고 성소를 충만히 살아야 하며, 은사를 통해 다른 이를 더 잘 섬겨야 하고, 육의 정신을 떨쳐내고 영으로 가득 채워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키워나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일의 크고 작음과 이득을 따지지 말고 선물로 받은 것들을 되돌리고 나눠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의 셈법에 따라 효율과 성과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내 것으로 챙기는 처사는 주님을 조롱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언제일지 모르는 마지막까지 늘 하느님 뜻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손 안의 연장으로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각자 받은 고유한 은사를 키워가고 그것을 교회와 세상을 위해 힘껏 발휘해야 합니다. 그냥 흉내만 내거나 의무감에서 최소한의 것만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응답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기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과 은총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선물을 주신 분께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마지막을 준비하는 우리의 과제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실패의 두려움이 아니라 당신 뜻에 따라 사랑을 키워가는 ‘사랑의 장사’를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장사는 재물과 세상적인 힘을 쌓는 것도 이득을 챙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것을 내놓아 사랑의 빈자리를 늘리는 것이며, 집착과 탐욕의 끈을 놓음으로써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품는 관대함의 자리를 키워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끊어버리고 버리고 비우며, 약해지고 견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더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키워 되돌리고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성소입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해 사랑과 선을 키우고 되돌리며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도 의미 없는 안일함과 영혼 없는 게으름의 혼을 깨워 온 넋을 다해 사랑을 키우고 나눔으로써 죽음을 잘 준비하는 행복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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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비하신 주님께서 언젠가 우리에게 또 다른 목숨과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어머니가 적대자들의 박해와 협박, 세상의 고통과 위기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일곱 순교자 형제의 어머니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놀랍도록 당당하고 위대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가 담긴 마카베오서는 읽을 때마다 큰 슬픔과 동시에 큰 감동을 제게 선사합니다.
용기 있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신앙으로 인해 생사의 기로 앞에 놓여있는 아들들에게 비굴하게 살아남지 말고 장렬하게 목숨을 바치라고 격려합니다. 적대자들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지 말라고 계속 귓속말을 던집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목숨 걸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니 더 이상 참혹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어머니가 바라보는 눈앞에서 아들들 한명 한명이 처참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제 유일하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아들만 남아있었습니다.
총명하고 신앙심 깊은 아들들과 어머니의 모습에 적대자들도 감동을 받았던지 갖은 회유와 미끼를 던집니다. 조상들의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세운 우상을 섬기기만 한다면, 부자로 만들어주고 벗으로 삼으며 높은 관직까지 주겠노라고 약속하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라면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에 적대자들에게 막내아들만큼은 살려달라고, 적어도 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냐고, 엄마인 나만 죽이고 막내아들은 목숨을 살려주라고 사정사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감한 어머니는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아들들을 향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뭉클하게 만들며, 오늘 우리를 엄청 부끄럽게 만듭니다.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마카베오 하권 7장 23절)
“이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마카베오 하권 7장 29절)
오늘날 우리의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참으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애지중지합니다. 미래를 위해 엄청난 교육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공경하는 법은 조금도 배우게 하지 않습니다. 깊은 신앙에로의 안내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우리 자녀들은 하나하나 하느님을 등지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저 한치 눈앞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경외할 줄 모릅니다. 그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멋진 어머니의 찬탄할만한 신앙고백에 귀를 기울이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 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마카베오 하권 7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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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감사 한 미나를 열 미나로 늘리는 법
오늘 복음은 ‘미나이 비유’(루카 19,11-28)입니다. 한 미나는 100데나리온, 약 1000만 원 정도의 가치입니다.
주인은 열 명의 종에게 한 미나씩 주며 벌이를 하라고 시키고 왕권을 받기 위해 멀리 있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주인을 싫어하여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주인의 돈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번 종이 있는가 하면 한 미나를 그대로 돌려주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임금이 되어 돌아온 주인에게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한 이들과 함께 엄벌에 처해집니다.
이 사람의 한 미나는 열 미나를 번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기 위해 벌어야 하는 ‘미나’는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이 나의 임금이 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창조하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까지 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한 미나 그대로 주인에게 내어준 종과 같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그 백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픔도 따릅니다.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맞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감사’가 있어서 그 백신을
나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내가 감사하지 않는 것을 누구도 스스로 내 안에 넣어 나에게 영향을 주게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지배하려 하십니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것이든 내가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체로 내 안에 오십니다.
내가 성체에 감사하지 못하면 나는 성체를 영해도 그분을 들여보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유일하게 가져야 하는 한 가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마치 백신을 맞아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처럼 감사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감사의 마음은 ‘한 미나’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한 미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마중물과 같은 감사 거리입니다.
마중물이 없으면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여 죽고 맙니다. 장사 밑천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의 시작은 한 미나인데, 이 한 미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희생인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감사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일본에서 가장 하느님을 많이 알렸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신 마비 환자였던 미즈노 겐조(1937-1984)입니다.
그는 4학년 때 이질에 걸려 눈과 귀 이외에 온몸의 기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를 원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겐조의 사정을 알게 되어 그에게 성경을 한 권 주고 갑니다.
겐조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었고 자신이 살아야 하는 존재 이유를 깨닫습니다.
겐조는 12세 때 하느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입니다.
겐조는 18세가 되던 해 시를 쓰기로 합니다.
어머니가 자음과 모음으로 된 50글자로 된 일본 문자판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갈 때 눈을 깜빡이면
그 글자들을 이어 시를 탄생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네 편의 시집을 냈습니다.
그의 ‘그렇지 않았더라면’이란 시는 그가 괴로움을 묵상하며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내용이 나옵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그가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지 살펴볼까요?
어머니를 잃은 나를 위해 울지 마세요
더 이상 울지 마세요
마음속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함께 하시기 때문이겠죠
나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내가 묵상할 거리입니다.
겐조는 어머니의 죽음도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깨닫는 순간으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묵상기도가 주는 열매입니다.
모든 것은 감사로 바뀝니다.
또 이분이 하느님의 음성을 얼마나 갈망했는지도 ‘말씀’이라는 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단 한 마디뿐이어도 좋습니다
내 마음은 작아서
많이 주셔도 넘쳐버려
아까우니까요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위해 시를 쓰기로 하게 된 이유를
‘잊기 전에’란 시로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잊기 전에
지금 들은 것
보인 것
마음에 느낀 것
잊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주의 아름다운 은혜를
찬양하는 시를 만들자
묵상하는 자는 감사가 솟고 그 감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그 받아들인 주님 때문에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은총으로 인식하고 감사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전하며 그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라도 표현하여 주님께 보답하려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 미나만 받았다고 그것에만 감사를 묻어둘 수 있겠습니까?
그다음 방법은 다섯 미나를 열 미나로 늘리는 방법입니다.
‘무조건 감사하는 습관 기르기’입니다. 오프라 윈프리의 ‘감사일기 쓰기’와 같은 예입니다.
인간의 머리는 인간의 의지를 따릅니다. 의지적으로 감사하려고 한다면 머리는 왜 감사해야 하는지 묵상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묵상을 하지 않았기에 감사를 잃은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할 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고 십일조도 감사하게 하지 못한다면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도 잃고 하느님 나라도 잃고 카인과 같은 사람으로 변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처음엔 사생아로 태어나 폭행과 마약 등으로 감옥을 드나드는 카인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매일 감사일기를 쓰며 인생을 바꿨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가 나병 환자들을 보며 감사를 묵상했다면 예수님께서 어머니 품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준비한 이에게 들어오셔서 당신 나라로 삼으십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순종하지도 않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열 미나를 번 종은 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고 다른 종의 한 미나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임금으로 내 안에 모시기 위해 내가 준비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감사의 마음’임을 잊지 말고
쉼 없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나에게 주어진 감사한 것들을 찾아내어 성령으로 이성을 길들여야 합니다.
하루에 50번 정도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짧은 기도를 바칩시다.
그러면 뇌가 묵상기도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정돈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감사가 열로 늘어난 것을 신기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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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성인들의 대부분은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생에 대한 절실함은 하느님을 빨리 찾도록 하지만
그에게 신앙은 절실함을 채워나가는 방향이 됩니다.
반면 안정된 삶의 배경은
자칫 문화생활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오히려 더 깊은 신앙의 여정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며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왕족과 귀족 출신들은
하느님 사랑 뿐 만 아니라
그 사랑을 표현하는 이웃 사랑까지 수월했습니다.
이렇듯 더 많이 받은 이가
더 많은 결실을 맺으며
하느님의 더 큰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늘 기억하는 엘리사벳 성녀는
왕족으로 태어나 궁전에서 살았습니다.
자칫 낭비와 사치로 빠질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그녀는 경건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아왔고
결혼 후에도 자선 활동과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덕분에 그녀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고
남편이 죽은 후 유산을 정리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성녀의 삶은 많은 이들을 감동하게 했고
결국 재속회의 수호성인이 되어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받은 이는
더 많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 결실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방향으로 향한다면,
오늘 예수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물에 감사하며
주어진 선물을 성실히 다루며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이가
하느님을 향하게 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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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7. 항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제1독서 (2마카7,1.20-31)
"너희가 어떻게 내 배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준 것도 내가 아니다.(22)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9)
마카베오서 하권 7장은 어떤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를 전한다.
일곱 아들은 각기 임금 앞에 불려가 고문을 당하며 왜 자신이 고통을 달게 받는지 설명한다.
어머니는 두 시점에서 개입한다(2마카7,20-23; 26-29)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들들의 뒤를 이어 죽는다(2마카7,41).
어머니와 아들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유다인의 정체성을 명확히 구분해 주는 실천 사항들, 곧 할례, 안식일 준수 그리고 음식에 관한 법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죽는다.
순교자들이 엄청난 고통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보존한 동기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둘째 아들은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시키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2마카7,9)라고 말한다.
셋째 아들은 자기 혀를 내밀고 손을 내뻗으며 "이 지체들은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2마카7,11)라고 말한다.
넷째 아들은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한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2마카7,14)라고 지적한다.
끝으로 어머니는 일곱째 아들에게 조언하며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꼐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마카7,29)하고 말한다.
마카베오 하권 7장 30-38절에서 일곱째 아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화해하시기 전에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이 고난을 받게 하신다고 말한다(2마카7,33).
그는 순교자들의 고난으로 "온 민족에게 정당하게 내렸던 전능하신 분의 분노가 끝나기를" 간청한다고 말한다(2마카7,38).
이 말은 마카베오 하권 제4부(2마카10,10-15,39)에서 길게 전개되는 속죄 제물의 사고를 도입하는 것이다.
마카베오 하권의 설화 구조에서 고난을 통해 배우는 가르침과 순교자들의 죽음이 갖는 속죄의 가치로 인해 하느님께서 유다 마카베오 때 이스라엘을 쇄신하시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정화하실 수 있게 된다.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복음(루카19,11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가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11ㄴ~13)
사실 루카 복음 19장 11절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신 것으로 나온다.
당시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 입성을 바로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제자들 및 청중들이 예수님과 자캐오와의 대화를 듣고 있는 현장에서 미나의 비유가 주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루카19,10),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및 청중들이 이제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자신들에게 현세적 부귀영화와 로마로부터 정치적 해방과 자유를 찾아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려고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마태오 복음 25장 14~30절의 탈렌트의 비유와 비슷하다.
그러나 화폐의 단위 사용, 등장 인물의 숫자의 차이가 있고, 루카 복음사가만이 사람들이 귀족이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보고를 첨가하고 있으며, 또한 비유가 주어진 시기가 마태오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후이지만, 루카 복음은 입성 직전이라는 것이 두드러진 차이이다.
또한 탈렌트의 비유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소명과 은사에는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에 대해 충성을 다하면 동일한 상급인 구원이 주어질 것임을 강조한 반면에, 미나의 비유는 최종적으로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한다면, 그 선용한 결과에 따라 상급도 차등있게 주어질 것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비유는 예수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주신 다른 비유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 '귀족'에 해당하는 '안트로포스 유게네스'(anthropos eugenes; a men of noble birth)에서 '유게네스'(eugenes)는 '좋은'(good)을 의미하는 접두어 '유'(eu)와 '출생', '태생'을 의미하는 명사 '게노스'(genos)의 합성어로서 '태생이 좋은'(well-born), '고귀한 혈통'(of noble raw)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는 가상 인물이다.
귀족이 먼 고장으로 떠나가 왕권을 받아 올 때까지는 아직 임금이 아니다.
여기서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느님께 가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음,
즉 그의 부재(不在)를 의미한다.
귀족이 가는 목적은 왕권을 받아 다시 오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오려고'에 해당하는 '휘포스트렙사이'(hypostrepsai; to return)는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다'는 의미를 지닌 '휘포스트레포'(hypostrepho)의 부정사로서, 영광과 존귀와 위엄의 본래 지위를 받아 가지고 다시 되돌아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이 용어는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재림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관과 통치자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오실 것이다(마태24,30).
한편 루카 복음 19장 13절의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dulos; servant)는 '둘루스 헤아우투'(dulus heautu; his servants)에서 나온 말로서, 귀족이 부른 종들이 자기 휘하에서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종들임을 나타낸다.
원래 '둘로스'(dulos)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노예'를 가리키며, 여기서 '자기자신의'(heautu; his)가 첨부된 것은 오직 주인만을 위해서 살아야 됨을 보여 준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또는 모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가리키는데,이들은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복음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재능에 따라 차등을 두어 종들에게 탈렌트를 분배한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귀족이 열 종들에게 각각 한 미나씩 균등하게 배분해 주었다.
또한, 두 복음서에서 각각 다른 화폐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탈렌트'는 '미나'(mina)의 화폐 단위보다 더 높다.
'탈렌트'는 6,000 데나리온의 가치이고, '미나'는 100데나리온의 가치이므로, '미나'는 '탈렌트'의 60분의 1정도이다.
여기서 귀족은 종들에게 그것을 주면서 '벌이를 하여라'고 말한다.
'벌이를 하여라'에 해당하는 '프라그마튜사스테'(pragmateusasthe; occupy; put the money to work)의 원형 '프라그마튜오마이'(pragmateuomai)는 '사업하다'라는 뜻으로서 상업적 거래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이다.
귀족은 한 미나를 종들에게 주며, 먼 고장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그때까지 이 돈을 활용해서 사업을 하여 이윤을 남기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장사, 사업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귀족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암시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있을 것에 대한 암시로 이해한다.
마태오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차등있게 탈렌트가 주어진 것을 통해 사람에 따라 소명과 은사의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 반면에, 루카 복음의 '미나의 비유'는 동일하게 한 미나씩을 줌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신 것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백성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재능과 시간을 잘 활용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이윤을 최대한도로 남기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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