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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35) 주교단과 개별 주교들, 「교회헌장」 제23항
「교회헌장」 제23항은 ‘개별 주교들(singuli Episcopi)이 개별 교회들(Ecclesiae particulares)과 보편 교회(Ecclesia universalis)에 대해 맺는 관계’를 설명합니다. 교황은 주교들의 일치와 신자 전체의 일치에 대한 영구적이고 가시적인 근원이며 토대입니다. 교황과 보편 교회의 이러한 관계에 맞추어, 개별 주교들은 그들의 개별 교회 안에서 일치의 가시적인 근원이며 토대가 됩니다. 이어서 공의회는 이 개별 교회가 보편 교회의 모습대로 이루어졌으며, 이 개별 교회 안에 또 개별 교회에서부터 “유일하고 단일한 가톨릭교회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개별 교회가 보편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보편 교회는 개별 교회 안에 또 개별 교회로부터 존재한다는 이 상호성에 대한 언급은 보편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개별 교회에서도 교회의 본질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개별 주교들이 자신의 교회를 대표하고, 모든 주교와 교황이 온 교회를 대표한다는 이어지는 언급 역시 개별 주교들이 교회의 본질을 구현할 때 성립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개별 주교들의 개별 교회들과 보편 교회에 대한 권한과 의무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개별 교회들의 으뜸인 개별 주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에 대해서 “사목 통치(regimen pastorale)”를 합니다. 그러나 개별 주교들은 주교단의 일원이며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보편 교회에 대해서 재치권은 아니지만 “관심(sollicitudo, 염려, 배려)”을 기울임으로써 많은 이득을 줍니다. 모든 주교는 교회 전체의 공통 규율과 신앙을 수호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를 사랑하도록 신자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모든 주교는 교회의 모든 공동 활동을 촉진하고 신앙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도록 해야 하며, 자신의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이 보편 교회의 선익에 기여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의회는 이어서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주교단에 주어진,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사목적 “배려(cura, 목자의 사명)”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개별 주교들은 서로 공동으로 활동하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임무가 특별한 방법으로 맡겨진 교황과 협력하여야 합니다. 주교들은 선교 지역에 선교사들을 보내어 영신적이고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사랑의 보편적 유대 안에서 이웃의 가난한 교회에 형제적 원조를 제공해야 합니다.
마지막 단락은 지역 교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사도들과 후계자들이 세운 교회들은 역사 안에서 여러 집단을 이루고, 보편 교회의 단일성과 신앙의 일치를 보존하며, 고유한 규율과 전례와 신학적 영성적 자산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총대주교좌 교회들(동방 가톨릭교회들)은 성사 생활과 상호 존중과 의무에서 사랑의 유대로 결합하고 있고, 그러한 지역 교회들의 다양성이 교회의 보편성을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끝으로, 공의회는 주교단의 단체성과 관련하여 주교회의들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합의체적 정신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교회사에서 희년을 보다] 18세기 희년
인노첸시오 12세(재위 1691~1700년)는 1699년 5월 18일 칙서 “영원의 임금”(Regi saeculorum)으로 1700년 제16차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84세의 고령으로 병상에 있었기 때문에 대신 포르토의 주교 에마뉘엘 테오도르 드 부용 추기경이 성문을 열었습니다. 이는 교황 대신 추기경이 성문을 연 첫 사례였습니다. 교황은 같은 해 9월 27일 선종했고, 희년의 폐막은 새 교황 클레멘스 11세(재위 1700~1721년)가 집전했습니다.
제17차 희년은 이전보다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1725년 희년을 로마 지역 교회 회의(4월 15일)와 연계하여 거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성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로마 시는 여러 도시 구조 사업을 진행하였는데, 특히 이 해에 개통된 스페인 계단(Scalinata di Trinita dei Monti)은 아래쪽의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과 위쪽 언덕에 위치한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a dei Monti) 성당을 연결하며 국제 순례자들의 동선을 크게 개선하였습니다.
제18차 희년은 교황 베네딕토 14세(재위 1740~1758년)가 1750년에 거행하였습니다. 교황은 이 거룩한 축제를 위하여 1749년 5월 5일 칙서 “주님에게서 멀어진 나그네들”(Peregrinantes a Domino)을 반포하였습니다. 이 해 희년을 가장 인상 깊게 만든 인물은 프란치스코회 포르토 마우리치오의 성 레오나르도(1676~1751년)였습니다. 그는 콜로세움에 ‘14처의 십자가의 길(Via Crucis)’을 설치하고, 순례자들에게 고해와 참회를 권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1처에서 14처까지의 형태는 이때 비로소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제19차 희년(1775년)을 앞두고 교회는 큰 격변을 겪었습니다. 당시 가톨릭 강대국들의 강력한 요구에,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1773년 예수회를 해산시켰던 것입니다. 이어 1774년 4월 30일, 교황은 칙서 “우리 구원의 창조자”(Salutis nostrae Auctor)를 통해 제19차 희년을 선포하였지만, 그해 9월 22일 선종하였습니다. 134일이라는 긴 콘클라베 끝에 1775년 2월 15일 선출된 비오 6세 교황은 즉위 다음날 곧바로 성문을 열었으나, 계몽주의 확산과 정치적 불안 속에 순례자 수는 저조한 수준이었습니다. 이후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 프랑스군에 의해 로마가 점령되었고, 비오 6세는 1800년 희년을 선포하지도 못한 채, 1799년 8월 29일 망명지 발랑스(Valence)에서 선종하였습니다.
[교회의 언어] laity (평신도)
우리는 복음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복음화(evangelization)의 사명(mission)입니다. 우리는 복음 말씀을 듣고 믿어 하느님의 백성(people of God)이 됩니다. 백성, 시민, 민족은 라오스, 한 명의 시민은 라이코스. 여기서 나온 말이 평신도(lay)입니다. 평신도(laity)는 교회 안에서 서품 받은 성직자가 아닌 일반 신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평신도 역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고귀한 품위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평신도는 사제요, 예언자이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품위에 참여합니다.
평신도는 고귀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평신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가정과 직장, 사회를 거룩하게 합니다. 이를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에는 성숙하고 헌신적이며 책임감 있는 평신도를 필요로 합니다. 베네딕토 교황님은 평신도도 교회에 공동-책임(co-responsible)을 진다는 마음으로 함께하자고 초대하십니다.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서 평신도는 교회의 얼굴입니다. 찡그린 얼굴을 하고 성당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누가 성당에 오고 싶을까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한 주일 보내시길.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정화(연옥 교리)
어렸을 적, 농구를 하다가 친구의 거친 파울로 얼굴에 큰 상처가 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친구는 사과하지 않았고, 저는 그 일로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습니다. 얼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며 아물었지만, ‘왜 사과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과 속상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험은 ‘연옥’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종종 연옥을 지옥도 천국도 아닌 중간 어딘가로 막연히 생각하거나, 불 속에서 벌을 받는 두려운 곳으로 떠올리곤 하지요. 초기에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옥을 ‘불로 정화되는 장소’로 설명했으며, 단테의 《신곡》에서도 그러한 이미지를 ‘불로 정화되는 물리적 공간’으로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전해 주는 연옥의 참된 의미는 훨씬 더 깊고 따뜻합니다.
‘연옥’을 이해하려면 먼저 ‘은유’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유는 그리스어 메타포(metaphor)에서 온 말로, ‘meta’(너머)와 ‘phor’(옮김)의 합성어입니다. 말 그대로 저 ‘너머로 옮긴다’는 뜻이지요. 즉, 은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로 건너가게 하는 다리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 ‘혼인 잔치’라는 은유를 사용하시자, 우리는 그 안에서 기쁨, 환대, 사랑, 친밀함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 것처럼 말이지요.
연옥을 설명할 때도 ‘불’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그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두려운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 곧 ‘사랑의 불’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로 죄는 사라졌지만, 그 죄가 남긴 흔적들, 왜곡된 관계, 아픈 기억, 상처 입은 내면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마치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낡은 옷을 벗는 것처럼, 남아 있는 불순물들은 사랑의 불 안에서 정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유는 단순히 장식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의미를 드러내고, 그 의미를 통해 세상을 구원의 언어로 변화시키는 통로입니다. 즉 신앙의 은유는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닙니다. 따라서 연옥도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이며 하느님 사랑의 품 안에서 일어나는 따뜻한 포옹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 속에는 그때 그 친구처럼 사과하지 않았던 일, 끝내 다가서지 못한 마음의 엇갈림 그리고 전하지 못한 진심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연옥은 그런 미완의 상처, 우리가 다 해소하지 못한 아픔과 불완전함마저도 하느님께서 끝내 안아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연옥을 두려운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사랑의 기다림, 정화의 은총의 자리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마침내 온전히 사랑받는 존재로 정화될 것입니다.
[“저 여인은 누구실까?”] “묵주기도의 모후”
지난달 사제 정기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소임을 받았습니다. 제가 떠나는 시간에 맞춰 교우분들이 성전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저도 같이 기도하는데 주임 신부로서 본당 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마지막 묵주기도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인사를 드려야겠다 싶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저는 교우분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시간이 가장 좋았습니다. 신심 깊은 분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정성을 다해 미사에 참여하고 묵주기도를 드리면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기도했던 기억이 마음속 깊이 남아 저에게 큰 힘과 위안이 될 것입니다. 교우분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본당에서 만난 신심 깊은 교우분들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충실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었습니다. 사실 어르신 대부분은 하느님께 희망을 드리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힘 있고 건강하고 부유하면 하느님께 희망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들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부리려 하면서 세상이 전부인 양 착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경배하기보다는 하느님을 이용하려 드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묵주기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께 인도하시는 분
본당의 어르신들은 거의 모두 궁핍하고 빈곤하던 시절 태어나 가난을 겪어야 했고, 젊은 시기를 고생하며 살아야 했고, 가족 부양에 모든 것을 바쳐야 했던 분들입니다. 한국 사회가 단기간에 급속도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원동력이 어디 있을까요? 국가 발전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힘을 기울였습니다만, 그 뒤에는 자녀 교육을 위해 헌신한 지금의 어르신들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의 정성과 노고를 양분으로 삼아 자녀들이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 성장했던 겁니다.
제가 만난 본당의 어르신 중에는 평생을 시장에서 계란 장수로 지내며 자녀를 명문대에 보낸 분도 계시고, 손바닥만 한 세탁소를 운영하며 아들이 미국 대학교수가 될 때까지 뒷바라지한 분도 계십니다. 자녀들은 출세해서 훌륭한 직장을 다니고 고급 아파트에 살지만, 막상 할머니들 집을 방문하면 허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장성한 자녀들이 연로한 부모님께 효도하는가?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대부분 어르신들은 정서적으로 방치된 채 늙고 병든 몸으로 근근이 살아가셨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르신들은 자녀들을 원망하지도 않고 서운해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주임 신부에게 쓸쓸한 마음을 비쳐 보였을 뿐입니다. 이제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이제 주님 없이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듯 주님을 믿고 바라는 분들을 만나면서, 회심과 믿음은 과연 이런 것이구나 하고 저 또한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으니, 얼마나 은혜로운 시간이었겠습니까?
묵주기도는 어르신들이 선호하는 기도였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에 가장 근접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라 묵주기도 바치는 데도 정성을 다했을 겁니다. 희생과 헌신을 아는 이가 성모님의 마음도 더 깊이 알아봅니다. 성모님은 회심과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이들을 북돋워 주시고, 특별히 묵주기도를 통해 신자들을 삼위일체 하느님께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성모님을 ‘묵주기도의 모후’라고 고백합니다.
바오로 6세 성인 교황님은 사도적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 신앙생활을 위한 묵주기도의 가치를 상세히 일러줍니다.
먼저, 묵주기도는 성경에 기반하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모두 하느님 말씀에 근거하는데, 묵주기도는 참으로 복음에 뿌리내린 기도입니다.(「마리아 공경」 제44항)
둘째, “묵주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구원 사건들, 곧, 동정녀의 잉태와 유년기의 신비들로부터 복된 수난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파스카 정점의 순간들에 이르는 사건들을 질서 있게 연결”하면서 구원 역사의 핵심 사건을 드러내 줍니다.(「마리아 공경」 제45항)
셋째, 묵주기도는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입니다. 성모송을 반복하며 그리스도께 지속적으로 찬미를 드리는 기도입니다.(「마리아 공경」 제46항)
넷째, 묵주기도는 관상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그 본질상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셨던 분의 마음으로 주님 일생의 신비를 묵상하게 하는 고요한 리듬과 지속성을 필요로” 합니다. “묵주기도의 다함 없는 풍부함이 여기서 열립니다.”(「마리아 공경」 제47항)
다섯째, 전례와 묵주기도는 풍요로운 관계가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며 구원 사건을 관상하고 기념하면 구원의 신비에 더욱 깊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미사성제를 정성껏 거행하도록 북돋워 주고 기도하는 이의 마음 안에 신앙의 신비가 울려 퍼지게 합니다.(「마리아 공경」 제48항)
묵주기도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감사와 사랑 드려
본당 교우분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고 미사성제를 드릴 때마다 교황님의 가르침이 생각났습니다. 참으로 묵주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으로 경청하게 해주었습니다. 묵주기도는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건에 깊이 참여하여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해주었습니다. 묵주기도는 주님께 시선을 맞추며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해주었습니다. 묵주기도는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바라보도록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묵주기도는 정성을 다해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주님의 사랑을 가까이 느끼도록 해주었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드릴 때마다 묵주기도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자애로운 손길을 의식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성모님께서 본당 공동체를 돌보아주셨고, 은총의 힘에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가도록 교우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님의 말씀 그대로, 묵주기도는 “인생의 맥박이…하느님 생명의 맥박과 일치를 이루도록” 해주었던 겁니다.(「동정마리아의 묵주기도」 제25항).
주임 신부로 지내면서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과 함께 주님을 찬미하였고,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들과 함께 구원의 신비를 거행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묵주기도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성모님께서 교우들을 보살펴 주시고 주님의 길을 향해 굳건히 나아가도록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가톨릭 교리] 구약의 마지막 인물들 : 즈카르야, 엘리사벳, 세례자 요한
구약의 마지막 인물; 즈카르야, 엘리사벳, 세례자 요한
예수님이 오셔서 ‘신약’(新約), 새로운 계약이 시작됩니다. 성모님은 구약과 신약 양쪽 모두와 깊은 관련이 있는 분입니다. 구약(舊約), 즉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옛 계약의 마지막 시대를 장식하는 사람들이 즈카르야, 엘리사벳, 세례자 요한입니다.
즈카르야는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이고, 그의 아내 엘리사벳 또한 아론의 자손으로 사제 가문 출신입니다.(루카 1,5 참조) 구약에 따르면 사제직은 아론의 후손과 12지파 중 레위지파에 속합니다. 따라서 요한은 부모님을 따라 사제직을 물려받습니다. 옛 계약의 사제직이 요한에게 전달되고, 사제직을 물려받은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새 계약의 대사제이신 예수님에 대한 암시이자 예고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AD 1세기에는 사제와 레위인이 대략 2만 명 정도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는 대략 4만 5천에서 5만 명 정도였고, 큰 축제일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는 10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사제들은 철저하게 근무 편성과 직무를 수행해야 했는데, 특히 희생제사를 바쳐야 했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 1년 된 숫양과 곡식, 기름을 함께 봉헌했고, 안식일에는 두 배씩 바쳤습니다. 성전 유지와 사제들의 생활비 때문에 백성들은 성전세와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고, 성전에도 세금을 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시 당시 상인들과 결탁하여 폭리를 취하던 이스라엘 지도층에 또 착취를 당했습니다. 성전을 방문해 기도하기 위해 제물을 바쳐야 했는데, 제물은 흠 없이 깨끗해야 했고, 이를 식별하는 사람이 당시 사제와 지도층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당시 성전이 제의와 장사가 결합된 타락된 장소였기에, “장사하는 집”(요한 2,16), “강도들의 소굴”(마태 21,13)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벌어졌는데,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는 초반, 즉 공생활이 시작되는 2장 후반에 배치되었는데, 카나의 혼인 잔치와 성전 정화 사건을 연결시키려는 복음사가의 의도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는 때, 즉 예루살렘 입성 후 발생한 것으로 묘사하고, 성전을 정화하려던 예수님의 행동이 당시 지도층과 갈등의 원인이라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처형을 바라던 유다 지도층이 지적했던 예수님의 죄는 안식일 규정 위반과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사실 사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것인데, 당시 사제들 모습이나 성전 역할은 하느님과 인간을 멀어지게 하였기에, 옛 계약의 사제직에 대한 새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전해집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출생 예고와 탄생 예고 비교
즈카르야에게 주어진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루카 1,5-25)와 마리아에게 주어진 예수님 탄생 예고(루카 1,26-38)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사제이며 그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메시지를 받습니다. 거룩한 장소와 거룩한 시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복음에 마리아의 출신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는데, 마리아가 살던 나자렛이라는 동네는 구약성경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던 곳입니다. 아마 마리아가 살던 집도 작고 초라한 집이었을 것입니다.
‘사제-성전-예배’를 통한 출생 예고와 ‘무명의 젊은 여인-무명의 작은 마을-작은 집’에서의 탄생 예고가 대조됩니다. 전자는 옛 계약을 상징하고, 후자는 새 계약을 상징합니다. 새 계약을 맺으러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은 작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루카 1,32)이 되십니다. 신약의 위대함은 감추어진 겨자씨와 같이 작지만 위대합니다. 구약과의 연속성이 있지만, 신약만의 새로움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노래
성모님이 예수님 잉태하기 전 친척 엘리사벳이 먼저 잉태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갔던 사람이었지만, 아이가 없었습니다. 당시 자녀 출산은 하느님 복의 표징이고, 아이 못 낳는 것은 저주의 표상입니다. 루카 1장은 머리말에 이어,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장면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주님탄생예고(=성모영보, 개신교에서는 수태고지)를 들은 직후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습니다.(1,39) 마리아는 왜 “서둘러” 갔을까요?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늙은 사촌 언니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다는 소식(1,36)과 처녀인 자신이 아이를 가진다는 소식을 함께 들었습니다. 이 일들 모두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확신했고, 서둘러 사촌 언니를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즈카르야의 집에 도착해 엘리사벳을 만나 인사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자 엘리사벳 뱃속의 아기가 뛰놀았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1,41)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1,42) 그녀는 마리아와 태중의 아기가 복되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마리아가 복된 이유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알았고, 마리아가 주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사람임을 알아봤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 뱃속의 아기도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된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의 노래에 이어 마리아도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엘리사벳의 노래는 기도가 되어 ‘성모송’이 되었고, 마리아의 노래(1,46-55)는 ‘막니피캇’(Magnificat)이란 제목으로 성무일도(=시간전례) 저녁 기도 때마다 바치는 기도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Magnificat anima mea Dominum)로 시작하는 이 기도는 구약성경의 여러 대목을 인용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이행하셨음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때 구약의 내용이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에게 연결되는데, 하느님 구원 계획에 마리아가 “예!”라고 순종하고 응답함으로써 구세주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가 시작되고, 위대한 순간이 드러납니다.
이후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1,56) 갔다고 복음서는 전하는데, 마리아는 사촌 언니의 해산때까지 곁에 지내며 돌봐주고, 동시에 두 사람이 함께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기도하는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