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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의 약속
이 수 영
2012년 8월 21일,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입원이라는 것을 했다. 그날부터 18일간 나는 Y대학 병원에서 영어의 생활을 해야 했다. 어쩌면 그건 내 스스로 만든 굴레이며, 그 굴레를 벗어나서 다시는 그런 상황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많은 나와의 약속을 만들어 낸 시간이었다.
다음은 그 병상일기의 일부분이다.
2012. 8.18. 토. 흐림
나는 지금 동료 C와 함께 강원도 영월 구봉대산에 와 있다. 아침부터 몸이 개운치 못하다. 그래도 일행들보다 먼저 산행을 마치고 간단히 하산주까지 했다.
2012. 8. 19. 일 흐림
숨 가쁜 현상은 심하다 덜하다를 반복한다. 텃밭에 가서 가을 채소 심을 자리를 손질한다고 괭이질을 했는데, 도저히 안 좋아서 집으로 왔다.
2012. 8. 20. 월. 맑음
동네 병원에 갔다. 대수롭지 않은 진단이다. 약 몇 봉지를 처방받았다.
2012. 8. 21. 화 흐림
밤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숨이 가빠서 먹을 수도 없다. 지인에게 연락을 해서 예약을 하고 Y대학 병원에 갔다. 주치의 L교수는 내 심장을 모니터에 비춰보고 심방세동(心房細動)이라 진단했다, 상황이 최악이라며 바로 중환자실로 입원하란다.
심장 기능이 정상의 20% 미만, 그러니까 쉽게 말해 숨이 멎기 직전이란다.
중환자실의 첫날밤, 내 태어나고 첫 입원이 중환자실이라니, 참 어이없고 견디기 힘들다. 나는 그동안 건강에 대한 넘쳐나는 자신감으로 독감 예방주사조차 맞지 않고 잘 지내왔는데 말이다.
입원하자마자 왼쪽 팔에는 몇 개의 링거가 달리고, 가슴에는 기계와 연결된 줄이 주렁주렁 달렸다. 그리고 산소 공급용 줄을 코에 건다. 나는 내가 직접 보지는 못해도 이쯤이면 참 가관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첫날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2012. 8. 23. 수 비
밖엔 오랜만에 비가 온다는데 나는 그 그윽한 정경을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앉아 있다. 참 생각이 많다, ‘심방세동’, 낯선 병명인데 설명을 듣고 증세를 알고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조심하라는 신호가 여러 번 왔던 것 같다.
2012.8.25. 토
Y대학 본관 2층 심혈관계 중환자실 이름만 들어도 거창하다. 내가 어쩌다 이 방에서 5일째다. 일반 병실로 옮겨 달랬더니 어림없다. 팔에는 여전히 몇 개의 링거가 달리고 가슴과 허리에 무슨 검사기구를 달아 놓으니 이건 무슨 영화에 나오는 괴물 같다. 나홀로 온갖 다짐을 해본다. 다시는 이러지 않으리라고…….
그러면서 참 간사하게도 오늘의 이 아픔이 멎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먹고 마시고 날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께 한다. 내가 나를 모르니 이 또한 헛 약속이 아닐런지.
2012. 8. 26. 일
무료한 하루다. 아침에 X-ray 촬영하고 웬 종일 책 읽고 단전호흡하고 누웠다 앉았다 시간을 보냈다. 여기는 1인실 감옥이다. 혼자서는 대소변도 보러갈 수 없도록 각종 검사기구 측정기구로 몸이 묶여져 있다.
온갖 잡념이 머리를 어지럽히더니 지금은 머릿속이 하얗다. 비우려고 비운 것이 아니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나와의 약속이다.
먼저, 앞으로는 절대 과음하지 않겠다. 다음은 높은 산의 등산을 피하고 성급하게 오르지 않겠다. 셋째는 심장에 좋다는 약과 음식을 가려서 꾸준히 먹어야겠다. 넷째는, 병원에서 처방해 주는 약을 제 시간에 맞추어 빠지지 않고 잘 먹겠다. 끝으로 운동을 꾸준히 해야겠다.
2012. 8. 27. 월
어제 밤 10시부터 금식 중, X-ray 촬영하고, 초음파 검사 다시하고, 오른쪽 손목 동맥을 따고 심장혈관 시술을 했다. 그리고 무슨무슨 검사를 마치고 15시에 처음 식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하루 평균 5~6회 채혈을 해 간다.
2012. 8. 28. 화. 태풍
태풍 15호 볼라벤이 지나가고 있다. 초등학교 등교시간이 10시 반으로 조정되었다. 그 태풍처럼 내 심장에 관계 되는 것이 모두 비정상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앞으로 퇴원을 하면 다시는 그전과 같은 생활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한다.
2012. 8. 30. 목
거의 매일 계속되는 금식. 무슨무슨 검사 때문에 지치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제 자리에서 2200보를 걸었다. 심박 검색기의 수치가 다소 오르다가 500보를 넘어서면서 정상을 회복했다. 기를 쓰면서 운동을 한다.
2012. 8. 31. 금
8월의 마지막 날, 무덥던 여름만큼 내겐 가슴 답답한 8월이었다. 새벽에 3100보를 걸었다. 심장 내시경. PET-MR 검사 등 매일 다른 검사가 진행된다.
2012. 9. 2. 금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일반 병실의 모습은 그야말로 삶의 축소판이다.
2012. 9.7 금
입원 18일째 마침내 퇴원이다. 퇴원 길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는데 약간 이상하다 싶더니 햇빛을 보니 어지럽다. 아! 햇빛이 그렇게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가!
그 기간 동안 나는 나 자신과 수없이 많은 약속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그 다짐들과 나와의 약속을 대부분 잊고 산다. 참 어처구니없다.
아쉬우면 찾고 그 아쉬움이 지나가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망각이 두렵기까지 하다. 나는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지금도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술을 즐기고 있다. 동료가 산에 가자고 하면 두말 않고 따라 나선다.
어찌할 것인가. 정신건강에는 그게 최고라고 자위해 보는데 그 말이 맞는 것인가? 아닌가?
2012. 6. 15
첫댓글 화원초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실 때 주변으로 부터 들은 얘기- 술을 밤새 마셔도 끄떡없이 익일 아침 어느 누구보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학교 경영에 임하셨다는 말을 듣고 정말 대단한 어른이시다라고 부러워하였는데 병원 신세를 진적이 있었음을 처음 들었습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십시오 김종태 합장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얼굴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연은 참 오래 갑니다. 늘 행복하시기를요.
심방세동이 무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심장과 관련된 이상인것 같습니다. 잘 대처 하셨습니다.요즘 아주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다.참 등단하십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동병상련의 정을 느낍니다.
보현님말씀,축하드립니다.
좋은 글 자주뵈옵길 바랍니다.
건필하세요~~~
자신과의 약속은 태산처럼 해놓았으나 지나고보면 실천은 두더지 둔덕만큼 하는게 우리네 인생인가 봅니다. 저도 자신과
수많은 다짐과 결심을 하면서 약속을 했으나 10%도 못 지킨 것 같습니다.
건강을 건강할 때 지키라는 좋은 교훈이라 생각하며 잘 읽었습니다. 또 다른 "나와의 약속"을 해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우리들의 일상이 약속의 연속이지요. 자신과의 약속 타인과의 약속.법적 구속력이 있는약속 양심의 약속 보이는약속 보이지않는 약속 그중에서도 자신과의 약속이 약속의 기본이지만 그걸 지키는 사람이 과연 몇%가 될찌?
이젠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에게 충실하며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싯점인 것 같네요
재미있는 글입니다. 다급할 때와 여유로와 졌을 때의 마음의 상태를 실감있게 잘 그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고.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