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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모든 질병을 치유한다
에세이문예 겨울호를 읽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피그말리온 효과는 무언가에 대한 사람의 믿음, 기대, 예측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경향을 말하며 1964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교육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Robert Rosenthal)에 의해 실험되었다. 원래는 그 전년에 로젠탈과 포드가 대학에서 심리학 실험으로 학생들에게 쥐를 통한 미로찾기 실험을 시켰다. 그 결과 쥐가 미로를 잘 빠져나오는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두 그룹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자는 학생들이 쥐를 정성을 다해 키운 반면, 후자는 쥐를 소홀히 취급했다. 이에 대해 로젠탈은 쥐에 거는 기대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이를 토대로 '교사와 학생 간에도 이와 같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교육현장에서의 실험은 1964년 봄,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로젠탈은 무작위로 뽑은 아동의 명부를 학급 담임에게 보여주고, 명부에 기재된 아동이 앞으로 성적이 향상될 학생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후, 학급 담임은 그 아이들의 성적이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고, 놀랍게도 그 아이들의 성적은 향상되었다. 학급 담임이 아이들에게 건 기대가 성적 향상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들도 기대를 의식하였기 때문에 성적이 향상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학이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근거를 여기서부터 찾을 수 있다.
공존적 가치가 사라진 자본주의적 사회는 바로 인간으로서 자켜야 할 품위 자체가 사라진 사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존의 문제는 이제 인간만의 시선으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도 이 지구상의 한 동물로 살면서 상태계의 한 축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이 추구하였던 근대 이후 과학기슬 문명은 자연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재료로 대상화하였다. 그것은 자연적 대상물을 인간의 생명권과 대등하게 볼 수 없는 도구적 존재로 여기는 것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자연물에 대해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발휘하여 마음대로 재단하고 분할하는 이기적 행위를 수행한다. 이것은 자연과의 공존을 깨뜨리는 행위로서 인간 자신만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동일자 중심적 사유의 발현이다. 그 결과 급속하게 자연생태계가 붕괴되는 위기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직장인이 제일 먼저 대상화되었는 데, 가정에서 남편이 돈 버는 기계로 소홀히 대접받았고, 여공들 역시 공업사회에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인간문명을 반성하고 인간중심주의의 폐해를 지적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 일을 수행하는 사상이 모두가 알고 있는 생태주의 사상인 것이다.
Ⅱ.
이번 봄호 계간평에서 다룰 작품은 장정애 시인의 ‘붕어빵’과 남현설 시인의 ‘감포항 여인숙’ 두 편이다. 길 가 노점상에서 붕어빵을 팔고 있는 사람이나 지나가다가 붕어빵을 사먹는 행인과 여인숙의 몸빼 입은 아줌마는 세상의 파고이기도 하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장정애와 남현설은 소시민적인 시적 화자를 내세워 소통과 공존의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을 보낸다. 이 난세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까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두 시는 어두운 현실을 조명하고 또 타자를 시적 화자로 내세우고 있어 동감도를 높여준다. 장정애의 <붕어빵>이란 시에서 ‘감기지 않는 눈’과 ‘삶의 모서리에 치인 오가는 사람들’은 이 시의 중요 이미지 중의 하나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붕어빵>이 산업사회의 아웃아이더로서 살아가지만, 각자 추억을 안고 고달픔과 아픔을 나누면서 흐망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붕어빵’은 아웃사이더를 상징하는 장치로 쓰여지고 있다면, <감포항 여인숙>은 처음에 언급했듯이 부재와 쇠락을 현대문명의 피폐상과 연결 짓고 있다. 그 해답은 어디에도 없다. 지독한 단절과 소외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세상 만유에 대한 사랑의 회복과 온고이지신 철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가로수는 바스락바스락
목마른 소리를 내고
행인은
풍선 인형 되어 길을 걷는데
밀 익는 향이
발목을 붙잡는다
어슴푸레한 기억을 안고
태평양에서
헤엄쳐 왔을까
바람의 길모퉁이
다정스러운 무관심 속에
두 번 뒤집힌 물고기
감기기 않은 눈
껌벅거리며 누워 있다
노을빛 좁은 공간에서 구워낸
고달픈 시간
삶의 모서리에 치인 오가는 사람들
달콤한 갈등 속에
바다 한 토막을
한입 베어 먹으니
은밀한 기쁨에
뼈속까지 파고든 겨울바람이
뒷걸음쳐 간다
장정애 <붕어빵> 전문
‘붕어빵’이란 시는 사회적 경제적 약자인 노점상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정조준하는 시다. 전지혜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노동할 수 있는 환경이 전제돼야 한다”며 “폭염 시 노동자들에게 휴게시간, 공간을 마련하도록 정부와 지자체의 주기적 현장 모니터링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시인이 활 수 있는 일이란 소극적 참여다. 현실을 고발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노점상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노점에서 붕어빵을 먹는 한 서민의 모습으로 잘 형상화하였다. 밀가루 반죽 묽은 물로 구워서 굽는 붕어빵에서 시적 화자는 밀 냄새를 맡고, 가던 길을 멈추는데, ‘밀 익는 향이
발목을 붙잡는다. 어슴푸레한 기억을 안고 태평양에서 헤엄쳐 왔을까’라는 말로, 밀의 경로를 추적하는데, 우리나라 농촌이 아니고, 수입된 밀일 거라는 점을 말한다. 우리 것이 사라져 버린 데 대한 안타까움과 우리 것에 대한 그리움을 2연에 담고 있다. 대상을 후각적으로 그려내고, 다시 시각으로 옮기는데 그 다음으로 보는 것이 대상의 자태다. ‘바람의 길모퉁이 다정스러운 무관심 속에 두 번 뒤집힌 물고기’ 한 번도 아닌 두 번 뒤집힌 물고기다. 한 번 뒤집힐 때마다 몸은 노랗게 타들어간다. 아무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붕어빵 신세는 ‘감기지 않은 눈 껌벅거리며 누워 있다’로 잘 그려지고 있다. 자신의 의지도 아닌, 타인의 물리적 강제에 의해 몸이 태워지는데 어찌 자발적으로 눈이 감기겠는가.
‘노을빛 좁은 공간에서 구워낸 고달픈 시간’은 노점상 노동자의 고단한 삶의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삶의 모서리에 치인 오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난한 사람들, 약자들이고 타자들이다. 시적 화자는 타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내시경적 시각으로 그 내면과 외면을 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정치적 신분제 시회는 극복되었다고 흔히 말하지만 경제적 신분체제가 잔존하고 있는 한 진정한 자유의 확보는 불가능함을 이 장정애의 <붕어빵>이란 시는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부정적 현상이 삶의 모서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제도가 심화된 사회의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인간적 가치를 훼손하고 약자를 하나의 물적 도구로 간주하는 우리 사회 주체들 속에서 인간미를 발휘하며 추억을 건져내는 소시민적 이타성이 ‘은밀한 기쁨에 뼈속까지 파고든 겨울바람이 뒷걸음쳐 간다’는 마지막 연에서 문학적 언어로 잘 표현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철학자 아비사이 마길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품위 있는 사회란 인간의 존엄성에 가치를 두고 제도가 사람들을 하지 않는 사회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말하는 모욕이란 인간을 인간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물건이나 도구 동물 인간 이하의 그 어떤 것에 불과한 것처럼 대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품위있는 사회란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고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서민의 입장에 서있는 행인들이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자난한 노점상이 누워낸 시간들을 사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품위를 회복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시가, 시인이 모든 존재들의 아픔과 슬픔을 대신 울어 그들의 존재성을 드러내고 그것에 참된 의미를 부여하고 붙잡는다면 이야말로 존재의 구원으로서 연민이자 시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평자는 위 시들에서 공감과 함께 그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연민의 정서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고통과 불행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마음이 연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살려 구원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염원일 것이다. 이 연민은 모든 시대 현실에서도 필요했겠지만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필요한 정서인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의 시대는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심화로 모든 존재가 소외화, 사물화, 상업화 등의 비생명화의 길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물론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이 인간중심주의의 공룡적 욕망과 결합하여 자연생태계를 극도로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장정애의 생태사상과 연민의 정서는 푸코의 ‘생명의 정치’ 차커트의 ‘인간 너머의 연대’의 측면에서 그리고 시정신의 차원애서 높이 평가된다고 하겠다.
바람에 싸대기 맞은 회갈색 문이 태양을 맞서있다
삐쭉 나온 작은 입 틈으로 두 눈을 몰래 넣어
둥글둥글 눈알을 굴려도
몸빼 바지 위에 저고리 입고
둥근 소반으로 이방 저 방을 누비던
김 씨 아지매의 소란한 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검은 안경 낀 창문은 온종일 기척도 없고
서쪽으로 난 긴 창에 절망하듯 저녁이 타오른다
오후 5시 임종 직전의 해가 감포항을 비춘다
- 남현설의 <감포항 여인숙>
‘여인숙’에는 수많은 소시민의 이야기가 편집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이야기들이 당시 전후 황폐했던 우리의 정신세계를 절묘하게 대변하고 있다. 즉 남현설은 그녀가 유년시절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들을 기술적으로 편집하여 당시의 황폐상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인숙’에서 그 테마를 끌고 나가는 가장 중요한 상징은 ‘부재’다. 감포항 여인숙에는 아지매의 요란한 소리도, 안개 낀 창문의 기척도 없다. 움직임이 없는 부재를 ‘임종 직전’이라 표현하고, ‘긴 창에 절망하듯 타오르는 저녁’으로 형상화해서 어촌의 고요를 부재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 묘사된 장소는 아무런 생명이 없는 사막 같은 곳이다. 그래도 회갈색 문은 서있으나 그것은 생명력을 말하기보다 폐허의 처절함을 더해줄 뿐이다. 검은 안경을 낀 창문은 더 이상 안과 밖을 구분지우지 못하며 여인숙 안에서는 몸빼 입은 아줌마의 요란한 소리는 온데간데 없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황무지의 상황이 아니고 무엇이랴.
몸빼 입은 아줌마의 부재는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로, 모두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의 모습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둥근 소반을 들고 이 방 저 방 다니던 동작이다.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정적의 상황, 이것이 남현설이 본 요즘 감포항의 모습이다. 그것이 엘리엇이 바라본 전후 유럽의 당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구절의 여인숙 건물은 있으되 살아 있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 있다. 그들의 소진된 생명력은 ‘임종 직전’이란 표현에 잘 녹아 있다. 시적 화자의 시선은 각자의 발 앞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맥없는 감포항의 쇠잔한 분위기는 “서쪽으로 난 긴 창에 절망하듯 저녁이 타오른다 오후 5시 임종 직전의 해가 감포항을 비춘다”에 잘 나타나 있다. 감포항에서 우리는 전혀 풍요로웠던 장면은 볼 수 없다. 항구는 정적만이 휘감아 돌 뿐이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한때 풍요로웠던 어촌 항구의 바다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생명의 움직임은 적요에 묻혀 있다. 음울함에 대한 묘사는 매우 상세하다. “서쪽으로 난 긴 창에 절망하듯 저녁이 타오른다 오후 5시 임종 직전의 해가 감포항을 비춘다.” 절망하듯 타오르는 저녁은 ‘임종 직전의 해’ 형태로 나타난다. 소위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전염병이란 원인불명의 힘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것은 노도처럼 몰아치는 미증유의 바이러스 유입과 서양 문명의 강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며 ‘서구 자본주의의 혼돈상황이 바이러스처럼 우리나라로 북상하고 있는 상태’라고 하겠다. 우리나라는 서양의 문물에 도취되어 더 이상 전래의 가치관을 중시하지 못한다. 동양의 문화적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고 그 맹주였던 중국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다. 개인주의의 각자도생은 세상을 쓸어버릴 듯 질풍노도를 몰고 오지만 그 뒤에는 단절과 불통의 잔해만 남는다.
Ⅲ.
에이브럼즈는 <거울과 등불>에서 세계인식의 방법 4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모방론, 표현론, 효용론, 형식론이다. 간단하게 시인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형시론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의 역사주의적 관점이다. 전자는 시 자체만 놓고 보는 것이고, 후자는 시적 대상들의 외부적인 요건, 영향, 요인을 고려하여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적 요건을 고려함으로 시어가 상징직 의미를 갖게 된다. 장정애 시인, 남현설 시인은 현실을 투시하는 시를 쓴다. 역사와 문학의 다른 점은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다. 역사는 승리자의 편이라면, 문학은 패배자의 편이어야 한다. 좌절당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을 예술의 힘으로 치유해 주는 것이 문학의 가치인 것이다. 시인은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하더라도 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김종회의 말처럼, 시인은 램프를 켜고 거울을 봐야 한다. 명징한 의식으로 깨어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남현설의 세상을 보는 세계관과 인생관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겠다는 정신과 타자 중심으로 향하고 있어 바람직하다. 찰스 디킨스처럼 현실을 정확히 투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문학가의 문학정신을 지니며, 그녀의 시는 문학의 참다운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붕어빵>과 <감포항 여인숙>은 현재 그리고 여기라는 시공을 함께 가리키지만, 문제 대응에 있어서는 대조적이다. 목마름과 갈증과 죽음에서 두드림으로 소통을 갈구하는 생명을 찾는 <붕어빵>과는 달리 <감포항 여인숙>에서는 임종 직전의 절망이 그려지고 있다. 야심적인 <붕어빵>은 얼마간의 비유로 현대 자본주의 문화를 비틀어 놓았을 뿐 그 극복의 몸짓이 ‘희망’이란 장치로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 시적 화자의 구체화된 이미지와 상황만으로도 타자의 현실이 얼마나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다. <붕어빵>과 <감포항 여인숙>이 각각 현대적 상황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다. 이것은 장정애, 남현설이 인문학 공부를 통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현실인식 너머 시적 행동으로 가야 한다. 단지 <붕어빵>은 ‘연대’라는 대안적 해결책을 보인다면 <감포항 여인숙>은 ‘각자도생’으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시 모두 죽은 현대문명과 그 황폐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시적 인식과 시적 발전이 기대되는 부분이다. 두 시인은 완전히 새로운 시, 지성의 현대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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