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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사천시(泗川市) ‘사천현(泗川縣)읍치‘ 한시(漢詩)편 1.> 총7편 中
現 경남 사천시(泗川市)는 1914년에 옛 사천군과 곤양군이 통합된 곳이다. 동쪽은 고성군,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한려수도와 사천만 및 남해군, 북쪽은 진주시와 접하고 있다. 옛 사천군은 본래 신라의 사물현(史勿縣)으로, 포상팔국 중의 하나인 사물국(史勿國)으로도 비정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에 사수현(泗水縣)으로 개칭했으며,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사주(泗州)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사천현이 되었다. 별호는 동성(東城)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6년에 경상남도 사천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따라 진주의 두입지인 삼천포가 사천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 진주 소속이었다가 1906년에 고성군으로 편입되었던 남양면이 1912년에 사천군에 통합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진주군과 곤양군 일부를 편입하면서 군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1918년에 수남면과 문선면을 합하여 삼천포면으로 개칭하고, 1925년 읍내면이 사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31년에 삼천포면을 읍으로, 1956년에 삼천포읍과 남양면을 합하여 삼천포시로 승격, 독립시켰다. 또 한편 사천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사천군과 도시기능을 담당했던 삼천포시가 통합되어 사천시라는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 또한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해수욕장이 있으며, 특히 남일대해수욕장은 모래가 부드럽고 수온이 18℃를 유지하고 있어 이 지역 주민들은 물론 외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관내에는 와룡산(臥龍山, 799m)·흥무산(興武山, 455m)·이명산(理明山, 570m)·봉대산(鳳臺山, 409m) 등이 있다. 이 밖에도 구룡산(九龍山, 298m)·남산·성황당산(城隍堂山)·봉명산(鳳鳴山)·무선산 등이 있다.
1) 사천 동헌운[泗川東軒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경상도관찰사
玉耀重來節 아름다운 광채가 절기마다 거듭 찾아오니
龍橫舊見山 용처럼 가로지른 옛 산을 바라본다.
不須問道路 도로를 물어볼 필요치 않으니
直可渡河灣 하구의 물굽이를 곧바로 건넜다.
雁拂南天去 기러기는 남쪽 하늘로 날아가고
星從北極環 별들은 북극성을 쫓아 선회하네.
君恩猶未報 임금의 은혜 아직 갚지 못하였지만
何日始偸閑 어느 때 비로소 한가한 틈을 얻으랴.
2) 사천 동헌[泗川東軒] 고조 차운(次高祖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脩竹叢梅護古城 수죽과 매화 떨기가 옛 성을 호위하고
蕭蕭風露入簾淸 소슬한 바람과 이슬이 맑은 주렴에 들어왔네.
靑山一髮當時物 당시 헤아려본 청산의 한 터럭이
似是無情却有情 마치 정 없는 것이 도리어 정이 있는 것 같았네.
[주] 청산의 한 터럭(靑山一髮) : 주권(周權)의 시에 “靑山一髮認邳州蕭條暮上魚豚市”가 있음. 먼 수평선 저쪽의 푸른 산이 아득히 안 올의 머리카락처럼 보임.
3) 사천 학도에게 권하다[勸泗川學徒] /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경상관찰사
海裔孤城化亦霑 바다 끝 외딴 성까지 임금의 덕화가 두루 미치니
爭將經史樂沈潛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다투듯 즐겁게 사색하네.
詞章記誦皆無益 무조건 문장과 시가를 암송하는 것은 무익하니
小學功夫願日嚴 소학 공부에만 날마다 엄하게 철저히 하라.
4) 사천 니구산 아래에서 즉석에서 짓다[泗川尼邱山下口占] / 오횡묵(吳宖默 1834~1906)
夫子大成如日中 공자가 이룬 바는 한낮의 태양과 같고
魯邦文物卽吾東 노나라의 문물을 곧 우리나라가 이어받았다.
尼邱何處誠禱是 니구산 어디에서 정성으로 기도하리까.
泗上山川萬古同 사천의 산천이 만고에 한결같은데.
[주] 니구산(尼邱山) : 중국 숙량흘(叔亮紇)이 안씨(顔氏)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이 산에서 기도하여 공자를 낳았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는 공자의 태산뿐만이 아니었다. 공자의 탄생담이 깃든 니구산(尼丘山) 이름을 충남 논산, 경남 사천과 단성 등지에 명명했다.
5) 사천객관[泗川客館] / 강혼(姜渾 1464∼1519)
寒煙漠漠月凄凄 쓸쓸한 연기 막막하고 달빛 처량한데
銀漢斜明斗柄低 은하수 비껴 밝고 북두칠성 자루 숙였네.
憶得去年春夜暖 지난해 생각건대 온화한 봄밤에
梨花照屋杜鵑啼 배꽃이 집을 비추고 두견이 울었지.
6) 사천[泗川]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南來無處不淸遊 남으로 오매 고상한 놀이 못할 곳 없어라
隱映鰲岑近海頭 삼신산이 보일락 말락 바다와 근접하였네
孤島烟橫深水晚 외딴 섬 비낀 연기 속에 심수도는 석양이요
荒城日落角山秋 황량한 성에 해 떨어져라 각산은 가을일세
驚濤夜撼蛟龍窟 거센 파도는 밤에 교룡굴을 흔들어 대고
殘雪香留橘柚洲 남은 눈 속에 향기는 유자 물가에 풍기네
珍重斯文楊太守 진중도 하여라 사문의 양 태수는
一樽談笑亦風流 술자리의 담소 또한 풍류스럽네
7) 사천 동헌[泗川東軒] / 오숙(吳䎘 1592∼1634)
滄海連宵雨 넓은 바다에 밤새 비가 내리더니
高軒五月涼 높은 집에는 오월에도 서늘하구나.
桐陰侵几席 오동나무 그늘이 앉은 자리까지 엄습하고
竹色灑衣裳 대나무 빛은 의복에 흩뿌리네.
胥吏收衙牒 관청의 서리가 관문서를 가져갔는데
奚兒檢錦囊 어찌 아이가 비단 주머니를 조사하나?
少年爲客地 소년 시절부터 나그네 되어
行樂憶淸狂 재밌게 노닐며 청광(淸狂)하게 즐기었지.
[주] 청광(淸狂) : 마음이 깨끗하여 청아(淸雅)한 맛이 있으면서도 그 하는 짓이 상규(常規)에 어긋남.
<경남 사천시(泗川市) ‘사천현(泗川縣) 길손의 감회‘ 한시(漢詩)편 2.> 총7편 中
사천시(泗川市)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서남부에 있는 시이다. 1995년 4월 5일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되어 생긴 도농복합시이다. 사천시 서포면 구평리의 조개더미에서 신석기시대 말기 유물이 다량 발굴되었으며, 늑도에서 늑도패총이 발굴되었다. 내륙지역에서는 고인돌·석관묘·선돌 등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까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용현면 덕곡리 지석묘군, 남양2동의 신벽동 지석묘군이 있다. 곤명면 용산리의 다솔사(多率寺)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다솔사 대양루(大陽樓)·극락전(極樂殿)·응진전(應眞殿)·보안암석굴 등의 문화재가 있다. 곤양면 흥사리에는 1387년 이 지역 사람들의 안녕과 미륵보살의 하생을 축원하여 세운 사천매향비(泗川埋香碑)가 있다.
읍성으로는 사천읍성·곤양읍성이 있다. 이외에도 각산산성, 각산봉화대가 있으며, 삼국시대의 토성인 사천읍의 성황산성과 용현면 선진리의 사천조명군성(泗川朝明軍城), 사천선진리성 등이 유명하다. 또한 곤명면 은사리에는 세종대왕태실지와 단종태실지, 대방진굴항가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사천읍 선인리의 사천향교, 곤양면 송전리의 곤양향교 등이 있다. 그밖에 사천읍의 판소리 고법(鼓法), 판소리 <수궁가> 등이 전해오고 있으며, 곤양면 성내리에는 비자나무서식지가 있다.
사천만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 사용한 승전지로 선진리에 그 승첩기념비가 있다. 또한 왜군이 축조한 선진리성,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구축한 석성지인 산성공원 등의 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자연자원으로는 곤명면의 봉명산이 울창한 삼림과 기암괴석으로 절경을 이루며, 계곡에는 경상남도 최고(最古)의 고찰인 다솔사가 자리잡고 있다.
8) 사천루[泗川樓] /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경상도관찰사
古縣臨平野 오래된 고을은 평야에 위치했는데
孤城更枕山 외딴 성이 산을 베개 삼았구나.
耕春鞭觳觫 봄날 밭갈이에 소가 벌벌 떨더니
喧晝聽間關 떠들썩한 한낮에 온갖 소리 들리네.
雲闊天南盡 광활한 구름은 하늘 남쪽을 다 덮고
巒重地北環 첩첩 산봉우리는 북쪽 땅을 둘렀네.
可須王粲賦 왕찬이 등루부를 읊을 그때
塵網暫投閑 속세에서 잠시 한가한 시간이었다지.
[주] 왕찬의 등루부(王粲賦) : 왕찬(王粲 177~217)은 후한(後漢)당시의 명문가 자제로 시와 부에 뛰어난 “건안칠재(建安七材)”의 한사람이다. 형주(荊州)태수 유표(劉表)가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아 실의 끝에 낙향하는 길에서 어느 누각에 올라 고향을 그리며 등루부(登樓賦)를 읊었다.
9) 사천 뱃간에서[泗川舟中] 조정자 차운(次曹正字韻) / 정유길(鄭惟吉 1515∼1588)
泗州城下舊龍堆 사천성 아래에 오래된 모래섬이 있고
秋入雲山活畫開 구름 낀 산에는 가을이 찾아와 그림처럼 펼쳐있네.
風勢乍敎船俯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니 배가 아래위로 들썩이더니
日光遙接浪飜回 햇빛이 물결과 접해 멀리서 뒤집히며 돌아온다.
身依南斗將通漢 몸은 남두육성에 의지해 은하수와 통하는데
節過重陽怯把杯 중양절 절기가 지나가니 술잔을 잡기도 두렵구나.
民瘼未蘇空傳食 백성은 병들어 때마다 밥을 먹여도 살아나지 못하니
邑人休道使華來 고을 사람들이여 사신이 왔다고 말하지 마시게.
10) 사천 구흥역에 돌아왔다[回到泗川丘興驛] / 이정립(李廷立 1556∼1595)
南泛孤舟傍海城 남쪽 바닷가 성을 따라서 외딴 배를 타고 떠다니니
客愁如汐暮添生 나그네의 수심이 저문 날 조수처럼 생겨난다.
今宵來泊丘興渡 오늘밤 구흥역으로 건너가 머물렀는데
猶近長安一日程 도성과는 가까워 하루 걸리는 노정이라네.
11) 사천(泗川)에서 최재청(崔載淸)에게 시를 남기고 떠나다[泗川 留贈崔載淸] 四首 / 남효온(南孝溫 1454∼1492)
黃葉囱前暗響乾 누른 낙엽 창 앞에서 바스락 소리 내니
十年往事似邯鄲 지나간 십 년 세월이 한바탕 꿈 같구려
持桮更入竹林下 술잔 잡고 다시금 대숲 아래로 들어가니
細雨斜風吹不寒 가랑비에 빗긴 바람 차지 않게 부는구려
其二
北望鄕關霧靄間 자욱한 안개 사이로 북쪽 고향 바라보니
故人家在臥龍山 우리 친구 사는 집이 와룡산에 있구려
盈盈更酌孔融酒 공융의 술을 다시 넘치도록 따르는데
侍立靑眉玩小鬟 시립한 계집아이 머리카락 만지작거리네
其三
安道風流無古今 안도의 높은 풍류 고금에 다시없기에
子猷乘興訪山陰 자유가 흥취 타고 산음 땅을 방문했소
靑篘一束留余馬 생꼴 한 묶음으로 내 말을 잡아두니
想得故人鄭重心 친구의 정중한 마음 상상할 수 있구려
其四
多生結習催頭白 많은 생애 오랜 번뇌 백발을 재촉하니
此日天涯匹馬行 오늘은 하늘 끝을 필마 타고 떠돈다오
時富歲豐詩價短 지금 시절 풍년이지만 시 값이 헐하니
一桮偏識故人情 한 잔 술에 친구 정을 정녕 잘 알겠구려
[주1] 공융(孔融) : 후한(後漢)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이다. 그는 빈객을 좋아하여 좌중에 빈객이 항상 가득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자리에 빈객이 항상 많고 술동이에 술이 비지 않으니 나는 근심이 없네.” 하였다.
[주2] 안도(安道)의……방문했소 : 그대의 풍류가 생각나서 내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말이다. 안도와 자유(子猷)의 이야기는 산음야설(山陰夜雪) 고사에서 전한다. 진(晉)나라 왕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에 살면서 눈 내리는 밤, 불현듯 섬계(剡溪)에 있는 벗 대규(戴逵)가 생각나서 작은 배를 타고 찾아갔다가 정작 그 곳에 도착해서는 문 앞에서 다시 돌아왔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내가 본래 흥에 겨워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는 것이니, 대안도(戴安道)를 보아 무엇 하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안도는 대규의 자(字)이고, 자유는 왕휘지(王徽之)의 자이다.
[주3] 생꼴……잡아두니 : 《시경》〈소아(小雅) 백구(白駒)〉에 “깨끗하고 깨끗한 망아지 저 빈 골짜기에 있도다. 생꼴 한 묶음을 주노니, 그 사람은 옥처럼 아름답도다.(皎皎白駒 在彼空谷 生芻一束 其人如玉)” 하여 어진 이를 떠나지 못하게 만류하는 뜻을 노래하였다.
<경남 사천시(泗川市) ‘사천현(泗川縣) 나그네 회포‘ 한시(漢詩)편 3.> 총7편 中
사천시의 첫지명인 사물(史勿→思勿)은 사방으로 강이나 바다에 둘러싸여 사람 살기 좋은 곳의 이름인 것만은 틀림없다. 옛 지명 사물(史勿)은 사물(思勿)로, 사물(思勿)이 사수(泗水)로 훈차(訓借)되고 그 후 행정구역 개편시나 한자로 지명을 고칠 때 사천(泗川)으로 개명되었다.
삼국시대(가야) 초기인 A.D 209년을 전후하여 포상8국은 지역소국들의 연맹체로서 이 시기 사천의 연원은 사물국이며, 곤양지역은 곤미국(昆彌國)으로 비정되고, 550년경을 전후하여 사물국과 곤미국은 백제의 세력권안에 들었다가 신라 진흥왕 23년(562)에 신라장군 이사부(異斯夫)와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이끄는 부대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사천지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사물현(史勿縣)이라 하였고 경덕왕 16년(757)에 전국의 지명을 고쳤는데, 이 때의 고자군을 고성군으로 고치고 그 영현인 사물현을 사수현(泗水縣)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강주(康州)를 진주(晋州)라 개명할 때 하읍현을 곤명현이라 개명하였고, 또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곤명현을 곤양군(昆陽郡)으로 승격시켰으므로 자연히 고적조에 그 고호(古號)로서 이름만 남게 되고 오늘날 사천시 서부지역인 곤양, 곤명, 서포면이 이에 해당한다.
고려 태조의 여덟째 아들 욱(郁 안종)이 귀양을 오게 되었는데 고려 현종 6년(1015) 사수현(泗水縣)은 임금의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여 고을을 높여 사수를 사주(泗州)라 개칭하였고 현종 9년(1018)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하동군에 소속된 곤명현을 진주목 속현으로 내속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종13년(1413) 10월 각 도·군·현의 명호를 개정할 때 고려초 이래의 사주를 사천(泗川)이라 하고, 또 감무를 현감이라 고쳤으며 별칭을 동성(東城)이라 했으며 태종 15년(1415) 9월 왜구의 침범을 방어하기 위하여 사천을 군사적 요충지로 설정하고 병마사가 판현사(判縣事)를 겸직한 사천진(泗川鎭)을 설치하였다.
12) 사천 와룡산 언덕의 화려한 봉우리[泗川臥龍山陵華峯] / 남재(南在 1351∼1419)
臥龍山在南海陬 와룡산은 남쪽 바다 구석진 곳에 있는데
王子當年作遠遊 왕자가 그해 멀리 유람오신 곳이다.
古塚漸平荒草合 옛 무덤은 점점 평탄해 지고 황폐한 풀이 덮이니
寒鴉啼送夕陽愁 쓸쓸한 까마귀가 석양에 수심 겨워 울고나.
13) 사천 촌사에서 읊다[泗川村舍吟] / 하진(河溍 1597∼1658)
久抱長卿病 오랫동안 장경(長卿) 병을 늘 앓고 있었지만
行尋泗水春 봄날 사천을 찾게 되었다.
誰知爲客日 누가 나그네 신세 알아주리오만
又送故鄕人 또다시 고향 사람과 송별하였다.
斗屋依山麓 초라한 집은 산기슭에 의지하고
孤城枕海濱 외딴 성은 바닷가에 임하였다.
滄波杳無際 푸른 물결이 끝없이 아득한데
何處是通津 어느 곳 나루가 내가 가야 할 나루더냐.
[주] 장경(長卿) :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字)이다. 사마상여는 늘 소갈병(消渴病)을 앓았는데, 경제(景帝) 때 무기상시(武騎常侍)로 있다가 병으로 인하여 그만두었고, 무제(武帝) 때 효문원 영(孝文園令)에 임명되었다가 또 병으로 그만두었다.
14) 사천 남루에 올라[登泗川南樓] / 하진(河溍 1597∼1658)
高樓臨大道 높은 누각 큰 대로에 임하였는데
一上俯前阡 단숨에 올라 앞 두렁을 바라본다.
牧笛孤城外 외딴 성 밖에는 목동의 피리소리 들리고
漁帆落照邊 석양 속에는 고깃배 떠다니네.
雲迷江口樹 강어귀 숲에 구름이 어지럽고
山接海南天 산은 바다 남쪽 하늘과 이어졌네.
回首塵沙合 뒤돌아보면 먼지와 모래에 맞닥뜨리니
長安路幾千 서울로 가는 길 몇 천리더냐.
15) 대관대[大觀臺] 판상에 차운(次板上韻) 사천 구암에 있다(在泗川龜巖) / 남천선생문집(南川先生文集)
我來高景意 나는 높은 곳에서 경치를 구경하고자 왔다가
振策步蒼椒 나도 몰래 우거진 산초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灝氣排牕入 자연의 기운이 창문을 밀치고 들어오니
塵心隔洞消 속세에 때 묻은 마음이 막힌 마을에서 사라지네.
鰲溟縈一帶 자라 바다가 일대를 둘러싸고
螺髻列千條 산봉우리가 천 가닥 늘어섰네.
春服沂雩興 봄옷 입고 기수(沂水)와 무(舞雩)에서 흥을 일으키니
誰能象外描 누가 형상(象)밖의 상을 그릴 수 있으랴.
[주] 기우(沂雩) : 기수(沂水)와 무우(舞雩)이다. 공자(孔子)가 제자들과 있다가 각자의 뜻을 묻자, 증점(曾點)이 타던 비파를 놓고 일어서서, “늦은 봄에 봄옷이 다 지어지면 대여섯 명의 어른과 예닐곱 명의 아이들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서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공자가 감탄하였다.
16) 사천 수령에 차운[次泗川守韻] / 하진(河溍 1597∼1658)
識面三春暮 낯익은 늦은 봄이 저무는데
知名十載曾 일찍이 십년 전에 지천명이었다.
簡書頻往復 서신을 자주 주고받으며
梅閣偶來登 매각(梅閣)에 우연히 왔다가 올랐네.
風暖煙光合 따뜻한 바람이 안개 빛과 만나고
雲收海色騰 구름 걷히니 바다색이 빛난다.
傳聞里巷語 마을 거리의 사람들 말이 전해 들리니
爲政比淸氷 깨끗한 얼음과 견주는 정치를 펼쳐야지.
17) 사천 정각 판상 차운[次泗川政閣板上韻] / 하진(河溍 1597∼1658)
海國陰雲捲 바닷가 땅에 먹구름 걷히자
高軒向夕涼 높은 집에서 서늘한 저녁을 맞이한다.
石川橫作帶 돌 하천이 가로질러 긴 띠를 만들고
松露滴霑裳 소나무 이슬방울이 바지를 적시네.
多病從癡漢 병이 많아 늘 어리석고 미련하였고
無才笑飯囊 재주가 없어 웃으며 밥이나 축내었다.
南來此爲客 남녘 여기에서 나그네로 떠돌면서
嘯傲任顚狂 휘파람 불고 미치광이처럼 날뛰었네.
18) 사천 침산정 폭포 시운을 빌려[走次泗川枕山亭瀑㳍韻] / 김영수(金永銖 1862~1925)
千尺銀河落半空 천척의 은하수가 반공중에 떨어지니
廬山絶勝古今同 여산(廬山)의 절승이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灑然如雨飄然雪 비처럼 맑게 흩뿌리니 눈처럼 표연한데
吼者爲雷噴者風 우레가 된 듯 울부짖고 바람처럼 뿜어내네.
認是九龍爭送下 구룡이 다투듯 아래로 내려오는 듯하고
看他萬象摠含中 만상을 모두 그 속에 머금은 모습을 보는듯하다.
名亭枕瀑尤何美 이름난 정자와 폭포를 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只恨窮居道不通 다만 궁한 삶에 도(道)가 통하지 않아 한스럽네.
[주] 여산(廬山) :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 남쪽에 위치한 명산으로, 웅장하고 기이하기로 유명함. 광산[匡山]·광려[匡廬]라고도 불림. 전설에 따르면 주[周]나라 때 광씨[匡氏] 7형제가 이곳에서 오두막을 짓고 은거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