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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평범한 농부 바흠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한 지방에서 땅 주인이 땅을 헐값에 판다는 말을 들었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땅 주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땅 주인의 땅을 파는 방식은 대단히 독특했습니다. “출발점을 떠나 하루 동안 당신의 발로 밟고 돌아온 땅이 바로 당신의 땅이 됩니다.” 땅값은 일정한 데 자기 발로 걸은 만큼의 땅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해가 지기 전에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모두 무효가 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루 정도 열심히 달리면 100만 평 정도는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바흠은 이 계약에 동의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점을 떠난 바흠은 어느 때보다도 두 팔을 앞뒤로 힘차게 내저으며 달려 나갔습니다. 땅 부자가 되는 꿈에 활활 타오르며 걷다 보니 음식도 먹지 않고 부지런히 자신이 밟은 땅을 표시하며 계속 전진했습니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이미 반환점을 돌았어야 하는 시점이 지났지만 자기 앞에 보이는 탐스러운 땅을 포기할 수 없어 조금 더 앞으로 전진했습니다. 결국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 가까이 기울어질 때쯤 바흠은 많이 늦었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돌려 출발지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해 지기 전엔 돌아가야 하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그는 겨우겨우 출발점에 도착했지만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욕심을 부리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바흠을 안타깝게 여기며 땅 주인은 그를 묻어주기로 했습니다. 바흠은 자신의 키보다 조금 더 큰 땅을 가지게 되었고 그 땅에 묻혔습니다. 이 상황을 보면서 땅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그에게 필요했던 땅은 그가 묻힌 3아르신(2미터)크기만큼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소설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마귀의 시험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어떤 시험을 당하셨는 지 살펴보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닥쳐오는 시험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삶속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 많은 시험을 경험할 때 정말 시험에 들지 않고 그 시험을 통해 오히려 더 큰 승리의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겨내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시험을 이겨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마귀에게 당한 첫 번째 시험은 재산과 물질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생계, 생활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왜 이런 시험을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마태복음 4장 1절에 ‘그 때에’라는 말씀을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란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땅으로 올라오시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신 말씀이 나오는 것을 듣게 된 그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이 세례와 무관하지 않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와 시험이 모두 하나님의 뜻가운데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받으실 시험뿐 아니라 이 땅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시험도 하나님의 뜻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마땅히 감당할 시험밖에 없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 받으신 시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기 위해 광야로 가신 이유가 ‘성령에 이끌리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가운데 성령의 인도대로 예수님께서 시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당하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광야시험을 함께 하신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또한 성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연합사역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시험을 경험할 때 ‘우리가 왜 이런 시험을 당해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뜻가운데 우리를 연단시키고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저와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럼 왜 사탄마귀는 예수님에게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을까요? 지금 예수님은 40일 금식을 해서 대단히 굶주리신 상태입니다. 뭐라고 먹어야 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육신적 고통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 먹는 문제에 민감합니다. “살기 위해서 먹느냐?”,“먹기 위해 사느냐?” 가치관에 따라 먹는 것의 중요도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결국 먹는 것이 해결되어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두 가지 질문을 항상 우리에게 물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인생속에서 “어쩌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근원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습니다. 그러다 보니 땅에서 살아갈 때 먹고 사는 문제에서 파생된 물질에 대한 집착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적 집착, 재산에 대한 유혹, 생계에 대한 시험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며 이겨내셨는 지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물질의 만족으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유함, 영적인 문제 해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돈 때문에 일어나는 온갖 죄악들, 인간의 육체적 욕구로 인해 일어나는 온갖 비리들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재물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재산을 불리기 위해 청부살인, 방화, 형제나 이웃 간의 법정 싸움, 관계 단절, 철천지원수가 되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수 없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3,24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는 돈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며 또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9,10절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 주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물질, 재산이 전혀 필요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최소한 먹을 것을 먹어야 하고 최소한 가질 것은 가져야 하고 최소한 뭔가 생활을 해야 영적인 사역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욕망입니다. 문제는 우선순위입니다. 내가 돈의 노예가 되고 내가 식욕의 노예가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살기 위해 먹는’ 사람이 아닌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도 우리는 세상에서 참 많이 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건강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물질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건강, 자신의 재물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건강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우리의 재산을 모으기 위해 하나님을 활용하는 악한 죄를 저지르지고 있지나 않은 지 우리 자신을 항상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부자들의 영적 타락의 위험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은 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 필요한 재산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항상 재물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기에 그 재물을 어떻게든 얻어보려고 노력합니다. 성경에서도 재물이 복이며, 부자가 되는 것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정말 여러분이 재물과 물질이 풍족한 부자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그 재물, 물질로 인해 신앙에서 멀어지고 잘 먹고 잘 살는 것이 우선순위에 최고가 되는 것, 하나님보다 물질이 앞서는 삶이 되는 것은 정말 저주받은 삶이라는 사실을 또한 저와 여러분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재물을 모으고 재물을 유지하기 위해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고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내 육신의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금하는 것, 성경속에서 말하는 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2장 20,21절입니다. 같이 일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느 미련한 부자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루하루 재산을 쌓아놓고 사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재산을 쌓아 둘 곳이 없어 또 더 많은 창고를 지으며 곡식을 쌓아놓는 것이 행복이고 만족인 부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되었지만 영혼을 거두어가시고 생명을 잃게 되었을 때 재산이 쓸모없어진다는 사실을 죽음을 맞이할 때에야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 구원을 잃거나 지옥에 간다면 그 인생은 불행하며 실패한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우리 고주리교회 성도는 우선순위를 제대로 하여 바른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식욕과 재물욕이 지배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재산을 모으는 것, 먹고 사는 것에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재산 모으고 재산에 힘을 얻고 살아가는 것, 먹고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삶의 목적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마귀에게 당한 두 번째 시험은 명예와 자존감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정체성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6절 말씀입니다.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사탄마귀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리라”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냥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떨어지는 중간에 잡아주시고 죽거나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 5절을 보시면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런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왜 사탄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서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을까요? 아마 우리도 이런 미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내가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고 이렇게 불가능한 투자를 해도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겠지....이 곳이 거룩한 곳이니까 이런 곳에서는 온갖 잘못된 결정을 해도 선한 결과로 만들어주시겠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성전에서 자살하고 성전에서 살인하고 성전에서 도둑질해도 이건 성전이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좋은 결과로 만들어 주시겠지’라고 착각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탄마귀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런 무모한 도전, 그런 무모한 모험에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사탄마귀는 이 시험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아버지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보호받을 것이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탄마귀의 이 유혹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시험해 보라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시는지 그러지 않으시는지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너 스스로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 뜨려보아도 하나님께서는 너를 지키실 것이라고 사탄마귀는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해 볼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믿고 따를 신뢰의 대상이지 우리가 시험할 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믿음의 삶을 산다고 하는데 일이 자꾸 뒤틀려질 때 우리는 속으로 “진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맞어? 하나님의 자녀라면 왜 이런 위기에서 구해주시지 않는거지?”라는 의심이 듭니다. 그 때 사탄마귀는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고 우리의 자존감을 무너뜨립니다. 마치 이것은 마태복음 27장 40절에서 십자가위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께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하며 자신들의 견해를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봐라고 말하는 유대인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백성들의 장로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탄마귀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명을 막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핑계삼아 유혹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사탄마귀의 꾐에 빠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봐라며 예수님을 조롱하며 희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째서 자신도 못 구하냐고 비아냥거립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광야시험가운데 사탄마귀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니 뛰어 내려봐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험의 내용을 볼 때 어쩌면 본질적으로 그게 맞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요구에는 큰 오류가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말도 안되는 행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니 좋은 결과가 있을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분별 못하면서 내가 막무가내로 일을 시도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는 상황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인데 모든 상황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며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는데 니가 믿는 하나님께서 왜 그 사람을 살리시지도 못하냐?” “어린 아이가 어릴 때 불치병앓고 죽어가는데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냐?”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아신다면 왜 예전에 세월호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아이들이 그냥 희생되도록 내버려 두셨냐?” 등등...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겠느냐?” “너는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어봐야 소용없다.” 등등의 말도 퍼부을 것입니다. 사탄마귀는 우리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을 다양한 말들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또한 사탄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갔습니다. 거룩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뛰어내려도 살 것이다”라며 시험합니다. 왜 이런 시험을 할까요? 이 시험의 의미가 “거룩한 곳에서 세상가운데 내 몸을 떨어뜨려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이니까 그냥 세상에 거룩한 곳에 있지 말고 세상에 몸 담그고 살아 그래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살아날거야...” 맞습니다.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의지가 아니라, 내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내 몸을 던져도 그 곳에서 거룩하게 살아남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영혼이 죽고 멸망당하는 수 많은 교인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 세상으로 몸을 던져 그 곳을 거룩하게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 자기자신만 희생당하는 수 많은 교회 지도자들도 흔하게 보게 됩니다. 이런 무모한 일을 우리가 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사탄의 시험에 예수님은 어떻게 답했습니까?
마태복음 4장 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니 내가 이렇게 무모하게 세상에 도전하며 살아도 나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큰 화를 당할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정확한 신앙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정확한 신앙의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20~2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로마서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 없이 믿음가운데 견고해서 항상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기대하며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테스트하며 자기가 뭐를 이루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믿음가운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일이 이뤄질 것을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갈 때 마귀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더욱 붙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죄를 범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바로 서서 사탄마귀의 유혹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사탄마귀는 항상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바른 것인 양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어떤 일을 해도 지켜주실 것이니 내가 하나님 계신 지 시험하며 이런 일도 해보자라고 하면 이건 큰 잘못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시험해보며 살아가는 것이 좋은 신앙모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세상에 우리를 던져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신 지를 찾아보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믿음으로 바로 서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마귀에게 당한 마지막 셋째 시험은 권력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9절입니다.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사탄마귀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지배권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하만국을 지배하는 권세를 얻기 위하여 사탄마귀를 경배하라고 유혹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보다 한 번만 굽혀 절하고 천하만국의 지배권을 받으라고 시험합니다. 전혀 그런 능력도 없으면서 이런 제안을 하는 사탄마귀를 보게 됩니다.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흥정입니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이 시험에 예수님께서 선포했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장 10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기록된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말씀의 헬라어 표현은 “휘파게 사타나”입니다. 사탄은 함께 있을 존재가 못 됩니다. 사탄은 항상 물리쳐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탄은 세상을 지배하고 공중권세를 잡은 것처럼 위장하지만 결국 세상 모든 권세, 세상의 모든 권력의 경배 대상은 오직 우리 하나님밖에 없음을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경험하신 이 시험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사탄마귀는 항상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지배권, 권력욕, 다른 사람들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망을 통해 인간을 시험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어느 조직, 어느 모임에 가서도 자신이 돋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람들을 통치하고 다스리기를 원합니다. 지배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 조직, 사물 등을 자기의 의사대로 복종하게 하여 다스리는 힘,”을 뜻합니다. 힘과 강압, 혹은 폭력으로 사람들을 부려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통치하고 다스릴 때 지도력이라는 단어와 지배력인 단어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지도력은 힘들고 지배력은 쉽습니다. 지도력은 민주적 방식이고, 지배력은 독재적 방식입니다. 지도력은 사람들을 세워 주지만 지배력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지도력은 사람을 살리지만, 지배력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강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지배자로 사는 윤리를 배격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섬기며 사는 것이 미덕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섬김과 희생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다른 사람들을 통치하며 지배하며 억압적 권력을 행사한 사람들은 존경받기 힘들지만 권력의 자리에서 섬기고 베풀며 낮아진 자세로 도와주는 리더십을 행하는 사람은 존경받고 추앙받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나눠주고 베풀어주는 사람이 진정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0~12절입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타인을 지배해야 마음이 편합니까? 타인위에 군림해야 행복하십니까? 내가 돋보이고 우두머리가 되어야 불안이 사라지십니까? 이런 것은 절대 기독교적 가치관도 아니고 기독교적 삶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듯이 참 권위는 섬김과 희생에서 나옵니다. 낮아지는 모습속에서 오히려 높아지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에게 사탄마귀는 권력에 대한 욕심을 부리고 우두머리가 되라는 유혹을 하며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유혹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시험을 직접 당하시면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떤 믿음의 자세로 권력의 유혹을 이겨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리더의 자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도자로서 삶의 모습으로 어디를 가든지 인정받는 자리에서 진실로 존경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생각하며 무너질 수 있는 욕망 세 가지에 대해 사탄 마귀가 시험한 것을 말씀으로 이겨내신 것을 보았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 내 명예, 내 인지도 삶속에서 내가 드러나도록 보여질 욕망, 또한 세상을 지배하며 권력을 가지고 항상 내가 더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 지를 예수님께서 당하신 광야시험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겨낼 힘은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다 알고 계신 말씀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특히 사탄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이 뭔지를 사탄마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면서 이미 죽음이 결정된 상태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내가 이길 수 없는 이 싸움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탄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시험합니다. “너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먹을 것을 너 스스로 만들어봐라”“너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거룩한 곳에만 머물지 말고 세상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어봐라” “너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부귀영화도 누려봐라” “이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이고 함께 해주실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드는 일,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일, 영화와 명예를 차지하려는 일에 대해 아무 것도 행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에 맡기며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내가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내가 나의 열정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속의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생각, 내 노력, 내 계획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시험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모든 시험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믿음가운데 승리하시길,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평안으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