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세봉의 아들 양의준은 6.25전쟁 당시 북한군 비행사로 참전했다가 1952년 전사 대통령 李承晩의 항일(抗日)을 축소·비판적으로 서술한 ‘두산동아’와 ‘미래엔’ 발간의 검인정 고교 역사 교과서는 일관되게 일제시대 공산·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두 회사가 발간한 교과서는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매장된 양세봉(梁世奉)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 두산동아: [사진설명] 역사 속 인물: 양세봉, 영릉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양세봉은 영릉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참의부, 정의부에서 독립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부터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중국 무장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였다. 당시 중국인들은 만주 사변 이후 일제의 이간질로 조선인을 “얼구이즈(둘째 왜놈)”라고 욕하고 약탈-살해하였다. 영릉가 전투는 이러한 반목에서 벗어나 두 민족이 협력을 굳건히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46페이지)□ 미래엔: 남만주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영릉가 전투, 홍경성 전투에서 항일 중국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공세로 항일 중국군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면서 독립군의 활동도 큰 제약을 받았다. 조선혁명군은 1934년 사령관 양세봉이 전사한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1930년대 후반까지 항일 투쟁을 지속하였다. [사진설명] 양세봉 장군 흉상(중국 랴오닝성 신빈):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해 만주의 동포들이 모금 운동을 통해 건립하였다. 기단에 ‘항일 명장 양서봉’이라고 쓰여 있다(양세봉은 서봉이라는 이름도 썼다.).
양세봉, 김일성 부친 김형직과 의형제 맺은 인물
양세봉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해가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매장되어 있으며, 1962년 남한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국립현충원에 유골 없는 묘지(虛墓)를 세웠다.
북한은 1946년 양세봉의 부인 임재순과 아들 양의준 등을 평양에서 살도록 했다. 그리고 1960년 양세봉의 무덤을 평양 근교로 이장한 뒤, 1986년 9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했다. 김일성이 이처럼 양세봉 가족을 각별히 대한 이유는 자신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만주에서 양세봉은 김일성의 부친인 김형직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말년에는 김일성의 유격대 부대와 항일합작을 논의했다고 한다. 두 부대 간의 합작은 결렬됐지만 조선혁명군의 경우 해체 후 상당수의 대원들이 김일성이 활동했다는 ‘동북항일연군’으로 편입됐다.한편, 양세봉의 딸 양의숙은 평양시 방직회사의 주임으로 일했으며, 양세봉의 동생 양정봉은 중공에서 공무원이 됐다. 양세봉의 아들 양의준은 6.25전쟁 당시 북한군 비행사로 참전했다가 1952년 전사했다. 양세봉의 동생 양원봉도 아들이 북한군 장교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