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6월 24일, 총리대신서리 박제순과 신임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경찰권 위임 각서에 서명했다. 한국의 경찰 제도를 개ㅐ선하고 한국 재정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 경찰제도가 완비될 때까지 경찰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임한다는 내용이었다.
탁지부대신 고영희와 학부대신 이용직이 “국가 행정은 경찰권에 의해 그 실행이 보장되는데, 경찰권을 일본에 넘기면 한국의 행정은 정상적으로 운용될 수 없을 것이며, 더욱이 황궁경찰마저 통감의 지휘를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반발하는 것을 무마하기 위해 ‘황궁경찰 사무만은 궁내부대신이 해당 주무관과 협의 하에 처리할 수 있다’ 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경찰권 위임각서로 일본은 황궁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의 경찰권을 공식적으로 장악했다. 1905년 외교권을 잃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1909년 사법권을 위임한 데 이어 1910년 경찰권마저 위임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자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공권력이라곤 사실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사법권 위임 때까지는 양국 간의 ‘협약’ 형식을 취한 데 반해 경찰권 위임은 ‘각서’의 교환으로 간략히 처리함으로써 일본 정부는 더 이상 한국 정부를 대등한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근대적 경찰권의 확립은 1884년 갑신정변의 정강에도 나타날 만큼 개화파의 오랜 숙원이었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남에 따라 근대적 경찰 제도의 도입은 10년 후인 갑오개혁 이후로 미뤄졌다.
일본의 지원으로 정권을 장악한 개화파 정부는 작폐가 많아 경찰 기구로서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포도청을 경무청으로 개편했다. 경무청은 경부, 경위원 등으로 변화를 겪지만 한국 정부의 독자적 치안기구로서 성격은 유지했다.
警務使 (경무사)
대한 제국 때에, 내무아문에 속한 경무청의 으뜸 벼슬.
警務官 (경무관)
1894년(고종 31) 종래의 포도청(捕盜廳)을 폐지하고 새로 설치한 경무청의 관직이다. 처음에는 관급(官級:종전의 품계)을 판임관(判任官)으로 하여 약간 명을 두었다가 1895년 주임관(奏任官)으로 올려 12명을 두었다. 주임관인 경무관은 경무청의 경무사(警務使)에 이은 제2직급으로, 총무국장을 비롯하여 각 과장 및 경무서장(경찰서장)의 직책을 맡았다
權 任 (권임) 일반 경찰인 순검(巡檢)의 우두머리
일본의 한국 경찰권 침탈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체결 이후 일본경시청 경시 마루야마가 경무고문으로 임명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경무사 신태휴 등 경찰 수뇌부는 경무고문을 단순한 자문역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마루야마는 경찰 서무 전반을 간섭하려 들었다. 마루야마가 한국인 순검 인원을 축소하려 하자, 한성부 1500여명의 순검이 동맹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 이후 각부 차관에 일본인 관리가 임명되면서 경무고문 마루야마는 경시총감으로 승격돼 한국의 경찰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그와 함께 경시고문부에 소속되었던 일본인 직원은 경시․경부․순사에 임명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의 한국 주차군 헌병은 군사 경찰권 이외에도 행정․사법․경찰권까지 행사하며 한국의 중추적 치안기관 역할을 담당했다. 의병 운동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격증하는 치안 수요를 조달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제도를 도입해 한국인 불량배, 전향한 의병, 면직된 순사, 전직 군인 등을 고용했다.
경찰권 위임 이후 경시청은 폐지되고 통감부에 경무총장을 두어 한국 주차군 헌병사령관이 겸직하도록 했다. 일전 경찰서에는 헌병 장교와 하사관, 상등병 등이 파견되었다. 헌병이 한국의 치안을 담당하는 헌병경찰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 전봉관 KAIST교수․한국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