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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9강
모퉁이의 머릿돌
말씀 / 마가복음 11:27–12:17
요절 / 마가복음 12:10,11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오늘 말씀에는 포도원 농부 비유가 나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어떠한지 배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1장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주요 구성원들로 공식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기로 재판하여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예고했던 수난 예고의 핵심 멤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당장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무턱대고 잡아 죽일 수는 없으니 죽일 명분을 찾으러 왔습니다. “성전은 우리가 책임지고 관리하는 곳인데, 당신이 뭔데 여기 와서 함부로 성전을 뒤집어엎고 강도의 소굴 어쩌고저쩌고 평가하느냐?”라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의 답변이 어떠합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대답 대신 도리어 반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이 질문은 애매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둘 다 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온 그 권위에 순종했기 때문에 요한의 권위가 더 커진 것도 사실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권위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반응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권위의 문제가 그러합니다.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그들이 곤란에 빠집니다. ‘하늘로부터’라고 답하려고 하니 예수님이 ‘그러면 왜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느냐?’ 반론을 제기할 것 같고, 그렇다고 ‘사람들로부터’라고 말하면 많은 군중들이 ‘아니, 요한이 사람들로부터 권위를 얻었다고요?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니까, 우리가 믿은 거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처럼 반발할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곤란에 빠졌을까요? 백성들은 하늘로부터 온 권위를 인정하는데, 정작 그들은 하늘로부터 온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온 권위가 다 자신들의 것인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자들입니다. 특히, 대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얼굴과도 같았습니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신성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 성전 안에 있는 대제사장의 권위를 존중했고, 대제사장의 얼굴 보기를 사모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권위는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긴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그런 권위를 자기의 것처럼 취하는 쪽으로 늘 흘러갑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것으로 삼아버립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목회자들 중에도 전도사, 강도사 시절에는 겸손한 태도로 목회를 하다가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 좀 오래 목회하다 보면 ‘내가 주의 종’이라면서 권위적으로 변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연수가 늘어갈수록, 직분자일수록 권위적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권위의 문제는 칼로 무 자르듯, 선명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복잡하게 얽혀있고 단순하게 정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들 앞에서는 태도가 무척 중요합니다. 신중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초심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권위를 부여해 준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권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 왕도 자신을 왕으로 따르는 백성들의 진정한 목자로 살고자 노력했고, 그 가운데서 모든 권위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고, 종교도 마찬가지고,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는 권위가 생기게 마련이지만, 그 권위를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세례요한의 권위를 충분히 인정했다면 고민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오는 권위에는 민감하여 백성들 눈치는 많이 살피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권위에는 둔감했습니다. 지금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서 백성들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늘로부터 온 권위를 제대로 판단하고 있으면 인정해 주고,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면 교정해 줘야 할 영적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눈치만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입니다’라는 무능한 대답, 부끄러운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있는 권위가 어떤 권위인지 한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여우가 들어와 포도나무를 짓밟지 않도록 산울타리를 둘렀습니다. 포도주를 쉽게 제조할 수 있도록 즙 짜는 틀도 만들었습니다. 망대를 지어 포도 서리하러 오는 도둑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에 필요한 일체의 시설을 완벽하게 구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 땅을 사고, 울타리를 두르고, 포도주 틀을 만들고, 망대까지 세웠으니 모든 사람들이 ‘포도원 주인’ 또는 ‘창업자’, 요즘 말로 ‘회장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유에서 그냥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얼굴 없는 주인’ 같습니다. 이 ‘한 사람’은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내주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소작농들과 약속한 때가 되자, 종을 몇 명 보냅니까? 딱 한 사람 보냅니다. 여러 사람을 보내면 훨씬 권위가 있어 보일 것 같은데, 소작농들에게 압박감을 주기 싫었는지, 그들과 신뢰의 관계성을 맺고 싶었는지 아무튼 딱 한 사람만 보냈습니다.
조선시대에 명나라로부터 사신이 오면 그 사신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조선의 왕과 관료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접대해야 했습니다. 조선이 당시 명나라 황제를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세무 조사가 두려운 것처럼, 본문의 소작농들에게 가장 두려운 사람은 소작료 받으러 오는 주인의 종일 것입니다. 그런데 소작농들은 종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뭐, 이 정도면 막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다른 종 한 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욕보였습니다. 이런 작태는 소작농들의 주인에 대한 적대감이 분명하고 계약 파기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간도 쓸개도 없는 사람처럼 다시 종을 보내는데 이번에도 한 사람만 보냅니다.
비유의 핵심 주제가 ‘권위’인데, 비유의 주인은 너무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 무시받고 있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욕보이기까지 했다면 강력하게 조치하여 권위를 바로 세워야 마땅해 보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다른 종을 보내고 계속해서 또 다른 종을 보냅니다. 보낸 종을 더러는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데도 불구하고 종을 계속 보냅니다.
그러다가 6절을 보십시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이런 주인은 현실감이 너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이런 소작농들에게 아들을 보내는가? 지금까지 그렇게 반응했던 사람들이 아들이라고 과연 존대할까요?
우리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주인이 혹시 바보는 아닐까?” 농부들을 다 쓸어버렸어도 몇 번을 했을 상황에 그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보낸다니? 우리는 여기서 주인이 원했던 것은 단순히 소작료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작료가 목적이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주인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주인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농부들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들이 아들을 존대하면 주인은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반역과 악행을 기꺼이 용서하고 농부들과 새롭게 다시 출발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농부들과는 달리 주인은 농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바보여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에 눈먼 포도원 주인은 마침내 아들을 보냅니다.
이에 대한 소작농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오자, 소작농들은 금방 알아봤습니다. “상속자가 온다. 자! 우리가 그를 죽이자. 그러면 그의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그래서 아들을 잡아 죽였고 그를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누가 봐도 답은 명료합니다.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할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입니다. 소작농들의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던 시도가 다 헛것이 되었습니다. 자기들 것이 되지도 못했을 뿐더라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특권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어리석습니다. 바보가 따로 없습니다.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 소작농들이야말로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이 비유에서 ‘그가 사랑하는 아들’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당신이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았느냐?’라는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반역한 세상을 얼마든지 다 쓸어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죄인들을 당장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끝까지 우리 인생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아들을 이 죄 많은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믿을 때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존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나 자신이 주인 되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 정도로 여겼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성문 밖으로 내다 버렸습니다. 이 스토리는 처절한 비극으로 끝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10,1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버림받고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돌을 선택할 권한이 건축자들에게 있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머릿돌을 세우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좌지우지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집을 지을 때 보면, 모퉁이에 기촛돌을 놓아 그걸 기준으로 하여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점차 집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계획 가운데서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기준석)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실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머릿돌(capstone)’이란 표현을 통해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인 교회의 머리가 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의미를 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12절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인 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이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알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은 ‘잡고자 하되’입니다. 그들은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교만과 탐욕에 이끌려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파멸로 향하는 길로 내리닫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에 자기 스스로가 주인이 되고, 자기가 영광 받고자하는 욕망이 얼마나 강력하고 끈질긴 것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 대목입니다.
누가 주인인가, 누가 주도하는가, 또 누가 영광 받는가 하는 문제는 자기 자신의 내면 문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권위와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는 종교 영역까지도 각 영역마다 주도권과 영광에 대한 다툼이 치열합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주도권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들 안에서도 갈등과 분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유인 교회를 특정인이 사유화하여 주인 행세하고, 주도권을 지고자 하고, 영광 받고자 하다가 사단이 나는 경우입니다. 결국 누가 주인이고, 누가 영광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가정에서도 자녀와 부모, 아내와 남편 사이에도 권위가 필요합니다. 권위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권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권위를 내세워 자녀들을 내 소유물인 양, 아내나 남편을 내 소유물인 양 생각하며 자기가 주인으로서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것인 양 생각하며 그들을 통해 자기가 영광 받고자 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나 아내, 남편은 하나님이 내게 선물로 보내시고 잠시 이 세상 사는 날 동안 맡겨주시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주신 존재들입니다. 근본적으로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내가 주인되어 내 것으로 만들고 영광 받고자 욕심 부리다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주인이시지만 갑질하는 주인은 아닙니다. 인자하고 너그럽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정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주인 되고자 하는 행동의 결과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기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주인으로 섬기는 것!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 알고 보면 행복의 길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포도원의 새로운 농부들입니다. 진멸 당한 옛 농부들의 과거를 교훈 삼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사랑과 헌신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존대하며 온전히 믿으며, 순종하의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저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당장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일단 후퇴하여 작전을 세우고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 몇 사람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오직 참된 것만을 가르치는 분이라는 극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묻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그들이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것을 예수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그들의 질문이 왜 시험이 되었을까요? 만약 세금 바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될까요? 세금 납부에 거부감이 큰 식민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반대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면 어떻게 됩니까? 납세 거부를 선동한 죄목으로 로마당국에 체포당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대답해도 큰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에 내몰린 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에서 무엇을 보고자 하셨을까요?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 앞면에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초상과 함께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가이사 티베리우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뒷면에는 “지극히 높은 대제사장”이라는 명문과 함께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가 종려나무 가지를 쥐고 앉아 있는 평화의 여신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데나리온에 새겨진 형상과 명문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형상과 명문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가이사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당시 유대인들은 데나리온을 볼 때 분개했습니다. 황제를 신의 아들로, 지극히 높은 대제사장으로 그 동전에 명백하게 새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하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일수록 “나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라 믿고, 대제사장은 성전에 계신 분이지, 로마 황제가 아니다. 그러니 이런 동전으로 세금을 낼 수 없다.” 뭐,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가이사의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야, 로마 황제와 하나님께 적절하게 바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란 무슨 의미입니까?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습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은전은 가이사에게 되돌려주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로마가 세금을 거두어 황제가 호위호식하는 데만 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세금은 로마제국 내에서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고 복지정책을 펼치는 데 쓰였습니다. 유대인들도 그 혜택의 일부를 누리는 만큼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가이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가이사는 하나님의 것을 가로챌 권리가 없습니다. 경배와 찬양과 절대적인 순종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드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현재 가이사는 신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가로채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나 자신을 드려 경배하고 섬길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확인하는 표지로 다만 소출의 얼마를 요구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고 우리의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을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내가 움켜쥐고 더 차지하려고 용써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것이 되질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섬기고 모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하게 하고, 우리가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영접하므로 일생 합당한 감사와 사랑과 헌신의 마음과 표현을 드려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이런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감사가 충만한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