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플리삭의 영화 포스터 ‘로마의 휴일’.
영화 ‘로마의 휴일’(1953)에서 배우 오드리 헵번이 연기한 공주 앤은 경호를 뿌리치고 로마 시내를 활보한다. 개봉 5년 뒤 헵번의 영화 속 용모를 예지 플리삭이란 폴란드 디자이너가 4개의 그림 조각으로 나누어 그려냈다. 갸날픈 발이 달린 빨간 사다리꼴 도형(치마)과 꽃 든 손이 달린 회색빛 획 한점(팔), 길게 내려온 검은빛 덩어리(머리카락), 자유롭고 명징한 헵번의 눈·코·입 윤곽선으로 분할한 이미지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그려진 헵번이 로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아래 서있고, 문 위에 그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수행원들의 모습을 그려넣은 영화 포스터가 완성됐다. 이는 1960년대 이후 세계 그래픽 디자인 명작으로 길이길이 남게 된다.
경기 양평 이함캠퍼스 미술관에서 지난해 11월23일부터 열리고 있는 국내 최초의 대규모 폴란드 포스터 기획전 ‘침묵, 그 고요한 외침’은 스타와 명장면 중심의 역대 할리우드 포스터 공식을 뒤엎은 독특한 영화 포스터들을 보여준다. 폴란드가 공산국가이던 시기 제작된 포스터들은 자본의 흥행 논리와 담을 쌓고 강렬한 은유와 암시를 깔면서 직접 영화 장면을 디자인하고 주제를 형상화해 만든 수작업 작품들이다.
폴란드 디자이너 발데마르 시비에르지의 영화 ‘선셋대로’ 포스터.
옛 무성영화 스타 시절의 인기와 영광을 되찾으려는 망상에 빠진 퇴물 배우의 사연을 담은 1950년 작 할리우드 영화 ‘선셋대로’를 작업한 폴란드 디자이너 발데마르 시비에르지의 포스터 또한 짙은 눈썹과 메두사의 꿈틀거리는 뱀처럼 산발한 머리칼 묘사로 여성 배우의 광기를 그려냈다. 이런 영화 포스터를 필두로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진 폴란드 현대 포스터들은 세계 포스터 디자인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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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이함캠퍼스를 만든 오황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이 10여년간 수집해 소장한 1만점의 폴란드 포스터 중 200점의 그래픽 포스터들을 선보이는 자리다. 시안쿠크, 토스카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등 현대 시각 디자이너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폴란드 대가들의 작업들이 나왔다.
폴란드 포스터는 대중을 의식해 설명적인 부분만 강조됐던 기존 포스터 제작의 관성을 뒤엎고 1950∼60년대 세계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주제의식과 시적인 미학을 강조하는 새로운 관점의 전환을 일으켰다. 60년대 이후 ‘폴란드 포스터 학파’란 고유명사로 명명된 이런 흐름은 함축적이고 개념적인 방식의 작가주의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 색면콜라주 같은 서구 모더니즘적 요소들을 과감하게 끌어들이면서도 아날로그적인 수작업과 강렬한 풍자와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폴란드 포스터 학파의 대표작들을 선별해 내보인 1부 전시장. 추상표현주의 양식을 과감하게 도입한 헨리크 토마셰프스키의 1956년 작 ‘폴란드 포스터 전시회’ 포스터(맨 왼쪽)를 필두로 발데마르 시비에르지의 1957년 작 할리우드 영화 포스터 ‘선셋대로’(왼쪽에서 두번째), 얀 레니차의 오페라 ‘보체크’ 포스터(맨 오른쪽) 등이 보인다. 노형석 기자
핵심은 폴란드 포스터 학파 대표작들을 선별해 내보인 1부 전시장이다. 추상표현주의 양식을 과감하게 도입한 헨리크 토마셰프스키의 1956년 작 ‘폴란드 포스터 전시회’ 포스터를 필두로 발데마르 시비에르지의 1957년 작 포스터 ‘선셋대로’ 등을 볼 수 있다.
오페라 ‘보체크’ 포스터는 폴란드 현대 포스터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얀 레니차가 1964년 디자인한 아르누보 스타일의 포스터로, 폴란드 현대 포스터의 대명사가 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폴란드 포스터 학파의 마지막 작품이자 이후 새로운 흐름의 기점이 되는 작품으로도 거론된다. 발데마르 시비에르지가 전기의 저릿한 흐름처럼 기타 거장 지미 헨드릭스의 머리칼을 창백한 블루톤의 꼬불거리는 선들로 형상화한 인물 포스터도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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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작곡가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의 포스터.
2부에서는 은유와 암시, 호기심과 상상력, 레터링과 이미지의 통합, 회화적 서정성, 콜라주와 페이퍼 컷 아웃 등 열가지 열쇳말로 폴란드 포스터 주요 작품들을 분석한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을 수의의 간명한 줄무늬로 전달하는 타데우스 트렙코프스키의 ‘마지막 무대’ 오프셋 포스터(1948)의 감흥은 충격적이고 비장하다. 폴란드 포스터 학파 디자이너 10명과 거장 빅토르 고르카의 에스키스(스케치)와 포스터를 살펴보는 3·4부에 이어, 외세의 침탈과 전쟁의 비극을 겪은 폴란드 근현대사의 그래픽 연대기라 할 수 있는 현지 포스터의 20세기 역사를 돌아보는 5부, 수도 바르샤바의 거리 포스터 예술 현장을 재현한 6부로 전시는 마무리된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를 괴물처럼 묘사한 1918년 작 포스터 ‘볼셰비키의 자유’.
1차 세계 대전 뒤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와 나라의 독립을 놓고 숙명의 전쟁을 벌였던 까닭에 트로츠키와 레닌을 괴물과 악마처럼 묘사한 당시 전쟁 독려 포스터에서 보이듯, 우리가 아는 유럽사·디자인사의 통념과 다른 폴란드의 독특한 근대사와 예술문화사를 엿볼 수 있다. 포스터들이 붙은 폴란드의 한 기차역 내부를 재현한 전시장 통로 공간의 포토존도 눈길을 끈다. 6월22일까지.
포스터들이 붙은 폴란드의 한 기차역 내부를 재현한 전시장 통로 공간의 모습. 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