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희와 닭
김윤미
나의 엄마 명희는 그녀만의 독특한 닭 요리 비법을 갖고 있다. 다른 재료 없이 오로지 간장과 청주, 다시마로만 맛을 내는 이 닭 요리는 그녀가 결혼하면서 시댁으로부터 전수받은 요리다. 결혼하기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딸들에게 가르쳤고, 그 딸들이 올케인 명희에게 가르쳤다. 평소 밥상에서 먹을 수 있는 요리는 아니었고, 일 년에 네댓 번 제삿날과 명절에만 상에 오르곤 했다. 명희의 남편 태수는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이라고 말하길 좋아했지만, 사실 그것은 대대로 떠밀려온 노동 과제에 가까웠다.
재료는 단출하지만 한 시간 내내 부지런히 양념을 고루 끼얹어야 하는 노동집약형 요리였고, 그 노동은 언제나 제사의 주체가 되는 집안사람이 아닌 며느리의 몫이었으므로. 아마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무슨 무슨 치킨이나 하다못해 ‘찜닭’ 같은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얻지 못하고 단지 ‘닭’으로만 불린 것은. 딸 여섯에 막내아들 하나인 집에서 그 유일한 아들 태수와 결혼한 명희가 떠안은 거대한 박복 꾸러미 안에 그 이름 없는 닭 레시피가 딸려 있었다.
그녀는 기제사 두 번에 명절 두 번, 일 년에 네 번씩 ‘닭 노동’을 충실히 수행해 냈다. 명희는 얼굴 한 번도 못 본 남의 집 어르신 영정 사진 앞에 간장 끼얹은 닭을 꼬박꼬박 올렸다. 속살까지 배어든 짭조름한 간장 맛과, 다시마와 청주가 빚어낸 깔끔한 감칠맛이 일품인 그 요리는 명희를 제외한 가족들 모두가 좋아했다. 그래서 명희는 가끔 제사가 아닐 때도 냄비 앞에서 숟가락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여섯 시누이 중 한 명에게서 “윤미엄마야, 내 너거 집닭 쪼매 해다 주면 안 되나.” 하는 전화가 걸려 올 때가 그랬다. 그들은 그 요리가 제법 고되다는 것을 잊었거나 잊은 척했다. 분명 자기 집안 제사 요리인데 입버릇처럼 ‘너거 집닭’이라고 말하는 데서 ‘우리 집안 제사는 유일한 아들과 결혼한 너의 몫이다’라는 사실이 명희에게 끊임없이 각인되었다.
나는 누구보다 그 닭 요리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명절과 제삿날은 나에게 다름 아닌 ’닭 먹는 날‘이었다. 태수는 제사상 앞에 서서 닭만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네가 우리 집 아들 손주 역할을 해야 한다’라며 손에 잔을 들려주고 술을 따랐다. 그러면 나는 상 가운데 앞쪽에 피워진 향 주위로 잔을 세 번 돌린 후, 자못 근엄하고 진지한 손길로 상에 잔을 올렸다. 그리고 태수를 따라 꾸역꾸역 절을 했다. 하느님 부처님도 아닌 음식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그 몇 초 동안 빌게 되는 소원은 대체로 ‘엄마 아빠 안 싸우게 해주세요’ 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일 년에 몇 번 음식과 술을 먹으러 우리 집에 온다는 그 조상님들은 영 끗발이 없는지 음식을 푸지게 차려내도 소원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제사를 마친 후 나와 여동생이 맨손으로 전이나 과일을 집어 먹는 동안, 명희가 비닐장갑을 양손에 끼고 닭과 다시마를 손으로 길게 찢었다. 나는 그 잘 찢긴 살들을 덥석 젓가락으로 집어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쌀밥에 올려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고등학생 때부턴 퇴주잔에 담긴 청주를 태수와 명희가 안 보는 틈을 타 닭과 함께 곁들여 몇 모금 들이켰다. 그렇게 먹고 나면 낮잠이 솔솔 밀려와 배를 퉁퉁 두드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닭 한 마리 정도는 네 가족이 앉은 자리에서 충분히 다 먹을 수 있는 양이었지만, 우리에게 허락되는 닭은 언제나 반 마리뿐이었다. 영희는 닭의 절반을 정확히 잘라 포일로 감싸두고 나머지 반만 가족에게 찢어줬다. 포일에 싸인 닭은 명희의 여섯 시누이 중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셋째 시누이에게 배달할 제사 음식 꾸러미 중 가장 중요한 구성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먹을 것도 모자란데 왜 그걸 고모에게 갖다주냐며 언제나 투덜거렸다.
하지만 딸의 어떤 칭얼거림에도 명희는 그 반 마리를 내놓는 법이 없었다. 명희에게 그들의 존재는 시누이 여섯이 아니라 시어머니 여섯이나 다름없었기에. 태수가 술을 마시고 여섯 누나들 중 한 명에게 전화해 시비라도 걸면, 여섯 명이 차례로 명희에게 전화해 다그쳤다. 대체로 ‘술 좀 그만 마시게 해라’와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명희가 가장 바라는 바이자 명희의 힘으론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딸은 많고 돈은 없는 집 귀한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재산을 물려받는 대신 ‘Son of Kim’이라는 쓸모없는 명예만 가진 태수는, 하필 여섯 누나들이 죄다 잘 사는 남자들과 결혼해서 자신만 가난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주 술을 마셨다. 그런 꼴을 보다 못한 누나들이 가끔 소액의 돈을 보내줘서 많은 급한 일들이 해결된다는 사실 때문에도 술을 마셨다. 그래서 자기 마누라인 명희가 누나들에게 더욱 기를 못 편다는 사실 때문에 또 술을 마셨다. 그건 명희와의 잦은 싸움으로 이어져 집안엔 욕과 고성이 자주 오갔고, 가끔은 물건들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고, 어떤 때는 명희의 머리가 헝클어지고 몸에 생채기가 남았다. 명희는 딱 한 번 나와 여동생의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법원 앞까지 갔었는데, 이혼 서류 한 장을 가방에 챙겨갔지만 꺼내 보지도 못하고 그냥 되돌아왔다. 아마도 명희는 서류를 낸 이후의 삶에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양손에 잡힌 아홉 살짜리 손 하나와 네 살짜리 손 하나가 그녀의 수많은 계획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그 이후 명희가 감히 이혼을 시도했었다는 소식이 여섯 시누이의 귀에 들어갔고, 그중 성격이 가장 불같은 막내 고모가 우리 집에 쳐들어왔다. 태수는 일터에 나가 없고 명희와 나와 동생만 있는 평일 오후, 경주에서 부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막내 고모는 우리 집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자마자 욕을 내뱉었다. 그건 내가 태어나서 그때까지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보지에 가시나 밖에 안 들어서 딸만 줄줄 낳은 년이!”
아들 둘을 낳은 고모의 당당한 사자후가 명희와 나와 내 동생의 고막을 후려쳤다. 그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가시나였다.
내가 스물한 살이 되던 2003년 태수는 결국 술 때문에 채 오십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황망하고도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죽은 사람은 없어져도 죽은 사람의 제사와 죽은 사람 집안의 제사는 없어지지 않았다. 제사를 주도하던 태수가 없어도 명희는 태수의 집안 제사를 여전히 챙겨야 했다. 여전히 불 앞에 서서 닭에 한 시간씩 간장을 끼얹어 가며. 제법 머리가 큰 내가 그 사실에 대해 그때 즈음부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집안에 유일하게 제사 지내던 남자가 죽었으면 제사도 그만 지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왜 집안사람도 아닌 엄마가 제사를 계속 챙기냐며. 그러면 명희는 들을 사람이 나와 동생뿐인데도 누가 들을세라 내 입을 막곤 했다. 마치 큰일 날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아무리 뜯어말려도 제사는 이어졌고, 닭은 제사상에 꼬박꼬박 올라왔다. 나는 투덜대다가도 닭을 입에 넣고 나면 얼마간 잠잠해졌다. 제사가 싫은 것과 별개로 닭은 언제나 천연덕스럽게 맛있었으니까.
나의 독립과 결혼 이후, 우리 집 제사상에서 별안간 닭이 사라진 적이 있다. 아마 엄마도 이제 나이가 들어 손 많이 가는 음식은 줄이기로 했나 보다 싶은 내 짐작과는 달리, 명희의 입에선 전혀 뜻밖의 이유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보지 운운하던 그 막내 고모가 명희에게 전화를 걸어 더 이상 ‘우리 집안’ 제사에 닭을 올리지 말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고모가 전했다던 그 구체적인 이유가 아주 신묘했다.
“윤미엄마야. 보살님이 그라는데, 우리 자매들끼리 자꾸 싸우는 게 제사상에 닭을 올리가 그렇다 카더라. 닭이 막 부리로 쪼는 동물 아이가. 그래서 자매들이 부리로 콕콕 쪼듯이 싸움이 난다는 기라.”
여섯 고모들은 자매 수가 많은 만큼 서로의 사이도 다사다난했다. 자식 자랑을 하다 싸우고, 돈을 빌려줬다가 갚네 마네 하며 싸웠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싸우고 나면 약속이나 한 듯 명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 둘째와 싸운 넷째 고모가 전화했고, 셋째와 싸운 막내 고모가 전화했다. 명희는 여섯 사람 간 복잡한 감정싸움의 화살표를 섬세하게 파악해야 했다. 어떤 시누이와 통화할 때 어떤 시누이 얘기를 꺼내면 안 되는지 기억하고, 그런 전화가 걸려 왔을 땐 함부로 한쪽 편을 들거나 비난에 동조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꼼꼼한 명희는 실수하는 법이 없어서 마치 유능한 콜센터 상담원 같았다. 그토록 각양각색으로 싸워대던 고모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각자 주치의 수준으로 의지하는 점쟁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섯 명의 점쟁이들은 담당 고모들에 따라 호명되는 타이틀도 다양했다. 동자님, 도사님, 할매, 보살님 등등. 그중 막내 고모의 운명 주치의가 보살님이었고, 그 보살님이 제사에 닭을 올리지 않아야 자매간의 싸움이 멈춘다는 준엄한 처방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닭이 먹고 싶다는 다른 고모들의 성화 때문에, 그리고 제사에 닭을 못 올리게 막았던 막내 고모가 2년 후 세상을 떠나면서 닭은 다시 부활했다. 나는 명희에게 닭 안 먹어도 되니 이제 제사를 그만 지내든 하다못해 간소화라도 좀 하자고 줄기차게 간청했지만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순 없었다. 두 번이었던 기제사를 한 번으로 줄인 게 명희에겐 할 수 있는 타협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마저도 이래도 되나 싶은 듯 불안해하는 명희와 통화하던 어떤 날, 나는 이렇게 물었다.
“제사도 그나마 조상 덕 보려고 지내는 건데. 엄마 그렇게 열심히 제사 지내서, 살면서 조상 덕 좀 봤어?”
덕 봤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이라는 건 그녀도 나도 모를 수 없다. 조금 뜸을 들인 명희가 대답한다.
“덕 안 봤으면 진작에 죽었을지도 모르는 거,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
나는 무슨 말을 더 보탤 수가 없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명희가 보낸 스티로폼 택배 속에 담긴 닭을 꺼냈다. 오래전 명희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비닐장갑을 끼고 닭을 죽죽 찢어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먹을 저녁 식탁에 올렸다. 닭은, 애석하게도, 여전히 맛있었다. 식탁에 앉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