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창작반에서 지난해에 부교재로 사용한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의 저자 옥지구 시인의 신작시와 발표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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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세 개의 태양
옥지구
울지 않으면 잘 지내지 못하는 어느 가족이 있다
모래를 고온으로 가공하는 세 개의 태양
젊음의 화려한 끝자락에서 술병을 얻어 화력을 잃은 아빠 태양 이후
어두워진 집의 미로
수심이 깊어지기 전에 모래를 지켜보는 빛이 강렬해지는 생존자 태양들
춘이는 구속력이 깊어졌고 상이는 보호력이 과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 내가 왜 아픈 손가락이야
독하게 살아라 울지 말고
모래는 춘이와 상이의 화력에 저항해서 창문이 없는 구석으로 사락사락 흩어진다
춘이와 상이의 빛은 서로 비껴가지 못한 채 부딪치고 홧홧해진 불꽃이 미로에 흘러내리고 벽의 실금마다 잔열이 남았네
할머니 할아버지 아직 밝지 않은 내 미래를 불태울 작정이었어?
숨이 막혀서 터질 것 같은 비명을 애써 삼키고 몰래 새로운 꿈을 설계하고 기개가 빠르게 커질수록 색이 바라는 춘이와 상이의 머리카락
아가, 우리 늙음을 돋보기로 들여다보지 마
세공을 견딘 모래가 구슬로 환생하고
투명해진 유리 속에서 구슬픈 빛 하나 솟아오르네 할머니 할아버지 너머의 어둠으로 스러지지 마
춘이와 상이는 투명해진 구슬을 눈물로 닦고, 또 닦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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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
함구의 땅 외 1편
옥지구
해명이 길어질수록 마침표는 무거워진다 어디 가, 아직 하고 싶은 말을 다 수확하지 못했어
서둘러 뻗은 손끝이 방향을 잃기 직전이네 공생의 서약 아래 쌓아둔 양식이 부질없구나
내 심장에서 날카롭게 피어난 칼
컷, 우리가 일구었던 땅에 칼을 꽂는다
찌이익, 서로 주고받았던 신뢰에 금이 갔다
와르르 데구루루, 반대편에서 돌멩이가 떼로 굴러온다
진심은 이제 배신자가 되었다
그 여파로 땅이 갈라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벌어진 틈에 숨겨두었던 오해들이 만개하다 뿌리의 혹취(酷臭)는 수채화처럼 사방으로 흘러 퍼지네 날카로운 가시가 돋는 줄기는 불화의 징조
주저앉아버린 나를 내려다보는 네 눈 이제부터 너의 할 말을 알아내지 않겠다 건조한 땅에 깊게 박혔던 칼을 빼낸다 칼날이 부러졌고 시간을 허비했네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고뇌하지 않겠다 어두워진 보름달이 아청빛을 발산해도 이미 설기(雪氣)의 기운이 드리워지고 있다 차갑고 누추한 땅에 따뜻한 비가 내려올 리가
―《열린시학》 202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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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사람들은 사랑받은 방법이 간단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언니, 하얀 색연필은 음··· 너무나 깨끗해서 곤란스럽다 말수가 없어서 어수선하네 투명해서 눈치가 보여 걔랑 같이 있으면 들킬 것 같아 얼룩이 묻어 있는 그림일기장은 낡았고, 누린내가 좀 쿰쿰해
조만간 하고 싶은 말이 사라질 것 같다
계속 붙어있는 이상,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겠지
딱밤으로 하얀 색연필을 튕겼다 현관문 밖으로 번지점프처럼 저 멀리
미술 학원의 수강생 삐삐° 언니는 체온이 떨어질 위기에 처한 하얀 색연필을 건졌다
하얀색은 말이야, 희귀해서 쓸모가 많아 특별해,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 근데 너처럼 모든 사람이 잊고 있지
여러 색깔의 뮤즈야, 같이 융화하고 싶어 하지
짙은 채도의 부드러움을 발견하고 옅은 채도의 존재감을 지켜 줘
모든 이야기는 인간 세계에서 태어난 거야 하얀색이 없으면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물질이 없어
도화지 밀가루 캔버스 종이 소금 설탕
눈송이 쌀 우유 치즈 이빨 흰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이미 자존감의 강력한 지원군이지
너도 이제부터 스스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긍정해 보는 게 어때?
―《열린시학》 202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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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론>
시는 침묵의 발원지에서 터져 나온 파열음이자 생존 욕구다.
옥지구
모국어 수어(手語)도 외국어 구어(口語)도 편하지 않아 문장을 뭉텅뭉텅 잘라 말한다. 언어를 갖지 못했던 시절 가정불화를 겪었고, 인공와우 수술 이후에도 소리라는 개념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까운 이들을 붙잡지 못했던 경험은 소통의 단절에서 초래되었다. 가족은 내가 청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일곱 살에 타지로 보냈다. 그곳에서 14년 동안 사회복지사들의 관리를 받으며 말과 청능 훈련을 거쳤다.
농인에 대한 폐쇄적인 인식을 가진 가정과 오디즘 사회의 억압 속에서 분출구는 없었다. 매일 눈치를 보느라 경계심을 풀 수 없었고, 이는 생각과 감정을 즉각 표현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 언어의 경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짧게 말하기와 환상적으로 말하기를 안전장치로 삼은 게 최선이었다. 역설적으로 소통의 단절과 소외라는 한계는 시 쓰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시를 쓰는 것은 완벽한 소통을 바라서가 아니라, 제약이 많은 언어 속에서 내면의 언어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다. 하고 싶은 말을 누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것은 나를 오래 살게 하는 도구가 된다.
- 옥지구 | 199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유치한 장난을 연구하는 내향인.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다.
시집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출판사 핌, 2024), 일기 에세이 『어차피 삶은 이미 아름다워 질 준비가 돼 있어』(부크크, 2024)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