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개인이 만든 정의, 이기적인 정의. 그래, 그래 알겠다. 뚜루뚜루, 길을 가며 오직 자신에게 향기로운 목적을 향해. 저, 고무적이고 위대한 발걸음을 보존하는 것이야 말고 사회의 정의이고, 그 발걸음을 계속하는 것이 개인의 도덕을 이루기 위한 정의로움 아니겠는가. 수도 없이 머리 아픈 철학적 질문과 답변은 오로지 나의 자유를 책임지기만 하면 된다.
진리, 옳음, 도덕. 그 위에 개인이 선다. 이 놀라운 현상을 기록하는 것이 정의이고 철학의 역할이다. 사회적 목표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정의는 파괴되어야 한다. 누가 십자가 전쟁의 고통을, 나치즘의 홀로코스트를 반복하고 싶겠는가. 이미 너무 상대의 강요에 지친 인류는 개인이 만족하는 것을 이륙하기를 바랬다. 이 바람의 실현이야 말로 정의이지 않겠는가.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현재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그저 새로운 문제를 겪고 있는 시발점에 서있을 뿐일지 모른다. 과거보다 낫다고 해서 현재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과연 중립을 실천하며 폭력의 사용 빈도를 낮추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니 겉으로 보이는 잔혹한 인류는 사라진지 오래 일 지 모른다. 과거의 특정 잘못을 극복했다고 해서 현재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문제가 사라졌다고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 않을 법은 없다. 총을 쏜 사람은 없지만, 전쟁이라는 파국은 사라지지만 사람들은 이미 혼돈이라는 새로운 전쟁을 맞이했다. 생각하고 팔수록 텅텅 비어 있는 자신의 가치관을 마주하고, 중요한 판국에 어떤 주장도 하지 못하는 공동의 정의를 마주한다.
낙태가 옳은가? 동성결혼이 옳은가? 하는 질문에 어떤 답도 하지 못하는 수천 억년 진화 역사의 산물을 바라본다. 그러고 선 하는 말이 “개인의 선택에 맡겨 봅니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에 선택하라는 답변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래서 내가 이쪽의 찬과 저쪽에 반에 선다 하면 그 논리는 무엇인가? 어떤 변증을 들고 오고, 어떤 반박을 들고 와 봤자 그저 취향에 따른 여흥에 불과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와중에 말하는 것이 개인적인 도덕성은 배재하라는 말이다. 그럼 나에게는 무슨 기준이 남으며, 어떤 판단이 남는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는 상황이다, 판단은 개인의 것이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면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배재하란다. 제기랄 상황에 그냥 모르겠다 하고는 내가 생각하는 옳음을 말한다. 상대방이 다 듣고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취향은 그렇군요. 저의 취향은 그 반대입니다. 재밌죠?”
그렇지만 사람들은 판단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저 개인의 기준으로 하는 정의롭지 않은 판단이라 할 지 몰라도 말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목적을 따져 보기도 하고, 개인이 보기에 미덕인 것을 더욱 따라야 한다며 다양한 변증을 한다. 사회적, 정치적 인식과 판례들은 이 부분에서 슬쩍 발을 빼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그 구성인(사회, 정치)들 조차 개인으로 들어가면 사실 한쪽으로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럼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중립적인 줄 알았던 사회는 사실 가면 쓴 편애가들의 집합이었을 뿐이다. 저마다 이미 개인의 정의를 정해 놓고는 이 개인의 정의를 존중할 수 있는 것이 사회의 정의라 말한다. 앞 뒤가 맞지 않는다. 정의를 뛰어넘은 정의가 있고 그 정의는 존중에 불과하다. 존중이란 단어는 아무런 힘이 없어서 저 주장, 이 주장에 입 맞추어 아주 손쉽게 변한다. 그렇게 변하는 것이 정령 정의란 말인가? 그리고 애초에 속으로는 자신의 정의를 품고 있으면서 그 상위의 개념이 있다고 말하는 것, 애초에 개인의 정의를 보장하기 위해 사회의 정의가 만들어지는 현상에서 과연 진실로 개인이 귀하게 여기고, 옳다고 여기는 정의는 개인의 정의일 것이다. 정의를 위한 정의. 정의를 지키기 위한 정의. 그렇게 해서 지켜진 정의는 그저 개인의 취향으로 추락하는 이 꼴을 사람들은 과연 만족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여러 문제에 따라 사람들은 혼신의 변론과 반박을 하고 그것이 분명히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이를 그저 개인의 도덕성이라 포장하려 들지 모르지만 이건 그저 말 뿐이지 사람들은 전혀 자신의 개인의 문제로 이 옳고 그름이 판단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형식 뿐인 자유와 형식 뿐인 중립에 사람들은 지쳐가고 그럼에도 개인의 정의를 실현하려 오늘도 애를 쓴다. 사회는 이에 대해 그저 무반응으로 있을 수는 없다. 어떤 형식이 되었건, 무슨 이유가 되었건 어느 개인의 도덕적 취향의 문제를 중립성을 뚫고 인정하고 추구해야 한다. 이 판단은 두가지 형태로 이루어 진다. 개인들이 합하여진 다수의 의견을 따르거나, 조금 더 자유주의 적으로 개개인을 보장할 수 있는 자유주의, 중립성 사회의 이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쪽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불의함을 느낄 수 있다. 첫째로 결국 다수의 힘으로 사회 정의가 받아 드려 진다면 전혀 중립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아주 쉬운 정의론에도 반박 되는 형태를 띄운다. 공리주의에 반박하는 결로 다수의 입장에 손을 드는 사회 정의에 반발할 수 있으며 진실로 정의로운 것을 따지지 않고 그저 꼭두각시 인형처럼 여러 개인의 취향 의견에 휩쓸려 다니는, 공정한 정의 따윈 개나 줘버린 사회의 모습이 보인다. 개인의 도덕성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객관적인 중립으로만 정의를 말하려 했던 사회의 모습이 깨진다. 둘째로 중립과 자유주의를 더욱 강조하는 편의 주장을 들어 준다면 중립과 자유주의라는 취향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책에 나온 예시를 든다면 동성 결혼에 대한 예시가 있다. 동성 결혼을 찬성하고 반대하는 양측의 입장이 있다. 찬성의 입장은 동성끼리 결혼이라는 사회 계약의 덕과 영예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반대의 입장은 반대이다. 여기서 사회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입장으로 개인의 의지에 따라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찬성 쪽의 입장을 들어준다. 이때 중립을 고수하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결혼이라는 사회 계약의 근본적 목적을 평가한다. 이 평가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결혼의 목적을 동성끼리도 결혼을 할 수 있다 쪽으로 사회적 결정을 내린 것이다. 만약 정말 그저 개인의 권리로써 동성 결혼을 허용할 생각이었다면 결혼을 사회적인 요소가 아닌 개인의 선택으로 만들어 버리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일부다처제와 동물과 결혼하는 인간 등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를 마주하기에 이런 극까지 상황을 내몰지는 않는다. 이런 중립 사회의 선택을 보며 결국 중립이라 말하는 이 사회 또한 결국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이상하리 만치 편협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맞추어 여러 부분의 목적 판단과 가치 판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어난다. 개인의 도덕성을 사회 정의에 들먹이지 말라는 이 사회는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의 도덕성에 불과한 개인 자유의 신격화를 말할 뿐이라는 생각을 든다.
이로써 두가지 사실이 들어 난다. 첫째로 중립을 지킨다는 사회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그 중립을 깨야 한다. 둘째로 애초에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라는 사회 기반이 되는 정의도 그들이 말하는 개인의 도덕성일 뿐일지도 모른다. 결국 하나의 의견을 말할 뿐이며 그 의견에 반하는 내용과 주장들은 저멀리 내팽겨치니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에 모순을 알 수 있다. 일단 그들이 항상 입에 달고 사는 중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강압적이게 하나의 도덕관을 내세워 이것으로 사회 정의를 이륙하는 모습에서 벗어나려 했던 이 사상은 중립을 추구했지만 이들은 결국 어느 시점에서 중립을 깨야만 하는 특이점이 오게 된다. 그리고 그 특이점에서 이들의 선택은 하나의 도덕관을 내세워 이것으로 사회 정의를 이륙하는 것이다. 그 도덕관은 개인과 자유이며 이에 더 알맞는 측의 입장에 손을 들어 준다. 여러 종교적 사회권들이 행했던 강압적 태도를 그저 신에 자리에 개인과 자유로 대체할 뿐이다. 더 이상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너도 옳고 나도 옳아." 가 아니다. "너의 의견을 말해, 나의 의견도 말할게. 그리고 그 의견 중에 오로지 개인과 자유를 중시하는 것만 옳아." 이것은 새로운 강압적인 사회의 문이 열린 것을 선포한다. 그저 여러 도덕적 가치들 속에서 자유와 개인을 강조하고 사회의 정의라 말한 것 뿐이다.
큰 담론을 통하여 내가 얻은 결론은 마이클 센델과 비슷하다. 결국 사회에서는 핵심 정의가 필요하다. 핵심 정의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핵심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 정의다."하는 새로운 핵심 정의를 만들어 낸다. 이 글은 그저 사회에는 정의가 필요하며 그 정의는 중립적일 수 없고, 특정 부분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정의를 논할 때 개인의 주장을 배제해야 하며 개인의 도덕성은 정의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도덕성은 개인의 정의와 연결된다. 만약 사회의 정의가 그런 "개인의 정의를 보장해주며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면 이런 종류의 사회 정의 개념은 누가 만든 것일까? 개인이 만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여러 정의들과 여러 세대들의 정의론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런 개인의 숭고한 노력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개인은 개인으로 두고 중립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개인의 도덕이 사회의 정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보다 정의로운 도덕론을 스스로 갖추어 가야 한다. 이 과정은 계속 되풀이 되어야 하며 중립 같은 입에 꿀발린 말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더 옳은 것이 있으며 보다 정의로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글의 관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