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희망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1. 고대 근동인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 히브인들의 주위 민족들의 종교에서 영혼불멸의 개념이 있었다는 고증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집트인들은 영생에 대한 희망으로 인하여, 죽은 자의 영혼이 돌아오면 죽은 시신이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미이라이다. 또 그 미이라를 보존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피라밋이다. 가나안 지역의 종교는 영생의 의미를, 바알이 해마다 지하세계에 내려 갔다가 다시 지상의 삶으로 되돌아 오는 부활로 보았다. 즉 그들은 죽음과 삶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는 것으로 보았다.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관은 짜라투스트라의 개혁을 받아들인 뒤 유일신 신앙관과 더불어 직선적 역사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선의 신 아후라마즈다에 의해 인간은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나, 악한 신 앙그마메뉴에 의해 죽음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곧 악을 극복한다는 개념과 일치하였다. 이런 점에서는 창세기의 첫 부부의 이야기와 거의 같은 맥락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망은 선하신 신을 도와 악을 물리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도덕성이 중요되었고 죽은 후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불교에서나 바빌론 포로기 후의 유대인 사상에 사후심판의 사상이 나타는 것은 페르샤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라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 구약성서에 나타난 죽음 인간이 살아 있는 혼(soul)이 된 것은 육신(흙)에 호흡(영)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즉, 혼= 육신+영 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육신이 영과 결합할 때 살아 있는 존재 곧 혼이며, 육신에서 영이 떠날 때, 그 혼은 죽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처음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으나, 그들은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능동적으로 살기 원했기 때문에, 영생의 열매를 못 먹더라도, 지식을 열어주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인간은 이성과 자유의지(=능동)에 의해서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는 존재임을 알려준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이 선고된 것은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지식을 터득하게 되면, 그 지식을 신의 방법대로 사용해야만 자연은 보존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짧은 지식으로 자연을 훼손시키고 자연의 원리에 역행하게 되는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에 그들은 시한부의 생명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죽음을 선고한 이유이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방식을 기술하고 있으며, 불순종은 죽음에 이른다고 설명한다(신 30:15-20).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실 수 있다고 믿었다(시 68:20). 하지만 의로운 사람들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구약성서의 대부분에서 말하는 의인의 특권이란 그들이 장수하며 많은 자녀를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또한 구약성서에 서 "열조들과 함께 잠들다"라는 표현은 죽음에서 언젠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는 희밍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예언서에 나타난 부활사상 구약성서에 부활에 관한 가장 명시적인 구절은 다니엘서에 나타난다. 다니엘 12:1-3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 구절은 보통,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시 오실 때에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된다.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점은 의인들의 부활 뿐만이 아니라, 악인들이 부활을 받아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죽음으로 인하여 모든 악한 행실이 해소될 것이라는 파수대의 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악인에 대한 심판의 부활이란 현재 그의 삶의 방식이 단지 시간이 지남으로써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시켜서라도 반드시 죄의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경고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사야 25:8에서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는 말씀으로 인생을 지배하던 최대의 적인 죽음에 대한 놀라운 정복이 있을 것임을 시시하는데, 사도 바울은 이 본문을 인용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4) 고 하였다. 호세아 6:2에서는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고 하였는데, 여기서 부활의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적 차원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기록은 시로-에브라임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이며, 이스라엘이 강제적으로 그 전쟁에 연루되어 이스라엘 민족이 좌절을 맛보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틀에 살리시고 사흘에 일으킨다는 것은 시체가 사흘 째 매장하던 관습을 염두에 둔 것이다. 4 성문서에 나타난 부활사상 욥기 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 구절은 다니엘 12장과 같은 정교한 통찰력은 없지만, 욥이 몸의 부활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는 인상은 피할 수 없다. 후반부의 '육체 밖에서'는 '육체로부터' 라는 뜻이다. 그래서 신세계역에서는 "여전히 내 몸으로 하느님을 뵈리라" 고 번역하였다. 시편 16:10에서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즉 그의 영혼은 무덤에 버려진 상태가 아니라,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임을 믿는다는 표현이다. 5 외경 마카베서에 나타난 부활사상 마카베오하 7장에 보면 일곱 아들과 그의 어머니가 순교하면서 현재 시제로 설명되어 있다. 7명의 아들은 안티오쿠스 왕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죽는 과정에서 정당한 신앙의 보상으로 그들은 부활되어 새 생명으로 일으키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기록이다 반면에 그들에게 고문을 가하는 왕은 그 오만함에 대하여 댓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결론 인간은 죽기 때문에 영원히 살고자 하는 희밍이 발생한다. 그래서 죽음의 이유를 찾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한 자들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 의미있게 이루어지려면 인간이 먼저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예수의 이러한 1인칭 선언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11:25, 26) 이 말씀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에게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 '문자 그대로 직설적인 말' 이라는 뜻으로 보기에는 힘들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왜냐하면 "죽어도 살겠고"란 부활을 이야기 하는 것이므로 미래의 일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살아 있는 자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란 말씀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전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를 다각도로 생각해 볼 때, 이 표현을 요약하면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부활이 되며, 살아 있을 때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동의반복의 댓구로 이루어진 구절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좀 더 세밀한 이해를 위해서 앞 부분을 빈칸으로 만들어 봅시다 ( ) 이면 죽지 않고 계속 삶이 가능하다 만일 죽었다 하더라도 부활이 가능하다 이 말이 현실적인 인간 생명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전제를 일단 하고, 앞 부분인 ( )이면 죽지 않고< 계속 삶이 가능하다> 만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람이 계속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은 늙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하다. 인간은 왜 늙어서 마침내 인체 기능이 정지되어 죽게 되는 지 그 이유를 먼저 생물학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인체의 가장 기본 단위가 되는 하나의 세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지금부터 약 1백년 전에야 비로소 세포를 관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되었다. 이 때 생물학자들이 “세포는 하나의 소우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하나의 세포가 몇 조(兆) 개나 되는 분자라는 훨씬 더 작은 구성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세포의 구조를 관찰하면서 놀라운 질서와 설계의 구조들을 발견하였다. 이제 인간 세포의 내부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유전자 각 세포는 중앙권력기구라 할 수 있는 핵(통치체)이 있어서 세포의 부분에 암호로 지시를 보내며 이 암호는 염색체에 내장되어 있다. 그리고 염색체는 단백질과 DNA(데옥시리보핵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DNA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1860년대 부터 알고 있었으나 분자구조는 1953년이 되어서야 밝혀지게 되었다. DNA에는 유전정보를 담은 언어가 있는데 이 언어를 파악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10년 정도 경과된 후이다. 이보다 약간 앞서 1930년대에 유전학자들은 개개의 염색체 끝부분에 염색체가 안정을 유지하도록 돕는 짧은 DNA 배열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여기서 끝부분을 의미하는 단어가 "텔리메레"인데 끝을 의미하는 '텔로스'와 부분을 의미하는 '메레스'의 합성어이다. 이 텔리메레의 기능은 구두 끈의 끝부분에 매듭과 비교된다. 구두 끈의 끝부분이 플라스틱 등의 자질로 이루어져서 끈이 풀어지지 않고 제 기능을 원활히 할 수 있게 역활을 한다. 그렇다면 구두 끈의 끝이 닳아서 끈이 헝클어진다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구두 끈으로서의 기능을 다한 것이다. 이 텔리메레가 어느 순간 닳아서 소실되면 세포가 죽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경우 이 텔리메레가 점점 짧아져 기능이 정지되기까지 약 50회의 세포분열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것은 세포의 분열이 어느 정도 일어나면 죽게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모든 동물은 그 죽음의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으로 과학자들에 의해 인식되어졌고 이 정해진 수명이 일어나는 것을 "헤이플릭 한계"라고 명명했다. 이는 헤이플릭이라는 박사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헤이플릭 한계를 정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인체는 노화하지 않고 세포가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겠는가? 물론 노화에 영향을 주는 다른 요소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은 헤이플릭 한계를 차단시키는 연구가 있고 난 다음에 생각할 문제이므로 여기서 논의하지는 않겠다. 따라서 유전생물학자들은 그러한 효소를 찾기 위해 연구를 집중하였는데 드디어 그 효소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효소의 역활은 '텔리메레'가 분열을 거듭함에 따라 길이가 짧아지는 것을 복원하도록 보조하는 것이었다. 어디서 그것을 발견했는 지 매우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암세포이다. 암세포는 헤이플릭 한계를 무시하고 세포분열을 무한하게 거듭하였는데 1980년대에 와서 그 비밀을 알게되었고 그것은 '텔리메레'의 길이를 복원시키는 효소였던 것이다. 유전생물학자들은 이 효소를 "텔리메라제"라고 명명하였다. 노화의 끝인가?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인체의 정상세포들이 이 텔리메라제를 자체적으로 형성시켜 텔레메레의 길이를 복원시키는 문제가 남은 것이다. 이 텔리메라제를 인체가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는 여러가지 복합적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 요인은 크게 나누면 두 가지 요인 즉,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이다. 외적 요인으로서는 햇빛, 공기, 물 그리고 음식 등이다. 이것은 노아 홍수 전과 홍수 후를 비교할 때에 지구 환경이 많이 변화하였다는 사실로 어느 정도 퍼즐이 맞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홍수 전의 사람들은 성서기록에 의하면 900세 이상 산 걸로 되어 있다. 이 나이가 문자적이 아니라고 판단할 정당한 근거는 없다. 홍수 후에 사람들은 수명이 급격히 줄게 되어 결국 70~80세까지 평균 수명이 된 것이다. UN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과 동일한 환경과 조건이라 전제할 때에 2030년에 태어난 아기는 평균수명이 130세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홍수 이전의 사람 아무도 1000세 이상은 산 사람이 없으며 모두 죽었고 현재의 수명이 130세라 할지라도 반드시 죽게된다. 그만큼 지구 환경을 원래의 상태로 돌린다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는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구환경을 완전히 개선한다 하더라도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내적 문제이다. 암세포에만 존재하는 텔리메라제가 인체의 일반세포에서도 활성화 되기 위해서는 단지 외부적 환경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홍수 이전의 사람들이 비록 오래 살기는 했지만 영원한 삶을 갖지 못한데서 알 수 있다. 그럼 텔리메라제가 일반 세포에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내적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체의 세포기능을 활성화 시키는 호르몬이 충분히 흐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호르몬은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도파민, 세라토닌, 엔돌핀, 다이돌핀과 같은 호르몬이다. 이 호르몬들은 햇빛, 공기, 물 그리고 음식과 같은 외부 요소로 얼마간 형성시킬 수는 있지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며 그러한 외부적 요인이 내적인 요소 이를테면 감사, 감동, 희망 등 인간의 긍정적인 정서와 결합될 때 온전히 만들어질 수 있다. 인간이 이러한 요소를 가져야만 행복하게 삶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인간이 설계된 방식이다. 어떤 방식의 삶인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진정한 기쁨이란 감동에서 오는 것이다. 자연의 놀라운 경관에서 오기도 하고 성경의 깊은 의미를 나름 깨달았을 때 오기도 하며 아이가 재롱을 부리며 안기는 순간에서 올 수 있다. 기도는 무엇인가? 자신이 무언가를 진실로 깊이 원할 때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발송이다. 기도는 결코 요행을 이루어 달라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계획은 인간이 할지라도 그 걸음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며 자기 과신의 절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다양한 하나님의 성품을 본 받게 된다. 또한 어떤 시련과 장애물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생명과 행복의 비결이다.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모든 일과 관련하여 감사드릴 점을 찾아라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그에 대한 긍정적 요인은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 긍정적 요소를 찾아 자신을 발전하게 만드는 것이 감사하는 자세이다. 이렇게 우리가 감동과 감사와 기도하는 태도를 유지 발전시킬 때 우리는 하나님다운 경건한 삶을 살게되며 우리 인체는 활성화 되어 죄 짓지 않는 아담과 같은 상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외적 요인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러한 외적 환경 요인들은 결국 새로운 자연환경으로 대치될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내적 요인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제 문제 제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 )이면 죽지 않고< 계속 삶이 가능하다> ( )에 무슨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가? ( )=감동, 감사, 기도하는 삶 감동, 감사, 기도하는 사람의 삶은 누구의 뜻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계속 삶이 가능하다> =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요인들은 모두 하나님이 시간을 통하여서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도구로 해결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