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항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이해>
2.7 구국 투쟁과 단선단정 반대투쟁을 경과 하면서 남한 민중의 반 미 반 이승만 투쟁은 무장투쟁 단계로 발전하여 갔다.
2.7구국투쟁 이후 남한 각지에서는 농촌을 거점으로 한 야산대라는 초보적인 무장조직이 등장하였다.
야산대는 광폭한 탄압을 헤치고 효과적으로 투쟁을 벌여나가기 위한 민중의 자위조직으로서 정치활동을 위주로 낮은 단계의 무장 항쟁을 수행하여 나갔다.
이러한 야산대의 활동은 4.3 제주 민주항쟁 등 지역적 봉기라는 계기를 맞이하면서 급속히 본격적인 유격전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볼 때에 본격적인 무장 항쟁의 불길을 당긴 4.3 제주 항쟁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여순 봉기 그리고 계속되는 군대 내의 반란 등은 장시 해당 지역과 군 내부의 불가피한 사정에 따른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4.3 제주 항쟁은 가혹한 미 군정의 학정과 그것의 영속화를 의미하는 단선단정의 추진이라는 상황 하에서 유일한 최후의 선택으로서 감행되어졌다.
다시 말해서 학정의 노예로 전락되느냐, 아니면 스스로 무기를 들고 싸우느냐 하는 절박한 상황 하에서 남달리 의지가 굳은 제주 민중은 기꺼이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수 봉기도 동포에 대한 학살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냐, 아니면 총부리를 압제자에게 돌릴 것이냐 하는 막다른 기로에서 선택된 결과였다.
이후 대구 주둔 6연대에서 발생한 일련의 군 장병 반란사태도 역시 동포에 대한 계속적인 학살 강요와 자신들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탄압 위협 하에서 발생하였다.
이렇듯 일련의 봉기는 민중들이 처해 있던 현실로부터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봉기에 참여한 무장 세력이 대거 유격대로 전환함으로써 본격적인 유격전의 막을 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무장 항쟁의 전진 속도는 당시 남로당 등이 계획했던 것보다 상당히 빨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지역적 무장봉기의 발생이라는 새로운 정세에 대한 적응과정에서 나온 것으로서 상당히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출발한 유격전은 거듭되는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승만 정부를 정치적으로 패퇴시켜 남감으로써 승리를 향해 접근 해 갔다.
우리는 이러한 당시 남한 민중의 치열한 무장 항쟁 과정 속에서 외세와 그 주구세력들이 저지른 온갖 죄악상에 대한 분노와 함께 엄청난 희생에도 굴하지 않고 전진을 거듭하는 민중항쟁의 장엄한 순간들을 접하며 깊은 감동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금악벌판으로 몰고 가 집단몰살하고 수장한 데 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 기둥에 묶어두고 표창연습을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버린 그날
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 버린 그 가을 숲
서귀포 임시 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을 뽑아버리던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광장 앞에서는 사지가 갈가리 찢겨져
본격적인 무장 항쟁의 첫 도화선을 마련한 4.3 제주 민중항쟁의 진정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적어도 해방 이후 제주도를 둘러싸고 있었던 전반적 상황과 그 속에서 전개되었던 일련의 사태, 그리고 제주도의 특수한 역사적 전통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일본 식민통치 하에서 제주 민중의 절반 정도가 강제적인 징용, 징병과 불가피한 이민으로 인해 삶의 터전에서 뿌리가 뽑힌 채 이국만리 머나먼 곳에서 온갖 고초와 수모를 강요받아야 했던 것에서 단적으로 들러난다.
이 사실은 제주도가 일제하에서도 집중적인 핍박의 대상이 되었음과 동시에 더 이상 발붙이고 살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해방이후 제주도의 경제 상태는 여전히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전재민들이 대거 귀향함에 따라 인구는 두 배 가까이 늘어났지만 생산능력은 오히려 줄어들게 됨으로써 가공할 물가 상승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생산능력의 저화는 남한 전체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는 하였지만 특히 제주도는 식민지 경제의 파산과 남북의 분단으로 인해 민중들의 생활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
예컨대 그동안 북에서 생산 공급되던 탄소가 부족하여 야간 고기잡이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또한 고구마를 사들였던 주정공장과 제주시에 전력을 공급해 오던 발전소가 석탄 부족으로 거의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제주조가 도로 승격하면서 가중되게 된 조세부담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제주도 민중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심각한 불만을 느끼게 된 것은 이 같은 경제 곤란보다는 그것을 자신의 요구대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에 의해서였다.
해방 직후 제주 민중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조금도 굴함이 없이 새 조국 건설을 위한 놀라운 열정을 불태웠다.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시발로 각 지방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거기에서 선출된 대표위원에 의해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와 함께 도 부녀동맹, 교육자동맹, 노동조합, 소비조합, 제주문화협회 등 각종 대중단체가 잇달아 조직되어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주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활동을 벌여 나갔다.
이리하여 해방된 조국의 지방자치기관을 자신들의 손으로 건설한 제주 민중들은 스스로 치안을 유지하고 구일본인의 재산을 접수함과 동시에 일본군에게서 몰수한 군량미를 빈민에게 무상 분배하는 등 애국적 시책을 쳐 나갔다.
따라서 인민위원회의 지도 아래 이루어지는 정책과 사업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있을 수 없었다.
제주 민중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기 위한 각 급 학교를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 나갔다.
그리고 학교나 부락에서 강습회가 개최되어 잃었던 모국어와 빼앗긴 역사를 되찾는 학습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나아가 문화인들의 자주적 역량에 의해 “제주신보”가 발간되었다.
해방 후 약 2개월 남짓 기간에 이루어 낸 이상과 같은 성과를 보면 제주 민중은 이미 높은 정치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해방을 위한 제반 운동을 능히 추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제주민중의 꿈과 노력도 역시 새로운 지배자 미 군정의 반동적 정책에 의해 급속히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
일단의 미군 진주와 함께 여타의 남한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때 도민의 기세에 눌려 숨을 죽이고 있었던 민족반역자들은 새로운 주인인 미 군정의 앞잡이가 되어 설쳐대기 시작했다.
미군은 제주도에 도착하는 즉시 이들 민족반역자들을 축으로 하여 법원, 검찰, 그리고 경찰 등 각종 폭압기구를 창설하였다.
이와 함께 미 군정은 그동안 도민들이 자주적으로 관리해 오던 도민의 공공재산으로서의 구일본인 재산, 즉 적산을 송두리째 강탈하여 자기들 손에 거머 쥐었다.
이렇게 하여 이곳 제주섬에서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작업이 미국인의 손에 의해 공공연하게 진행된 것이다.
미국인 마크 게인 조차도 그의 ‘일본일기’에서 당시의 불미스런 사태진전에 대해 “나는 번뇌와 부끄러움으로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탄압하는 데 있어서 단연 으뜸간다 할 수 있을 야만적인 경찰국가가 우리 국가와 함께 탄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왔다.”고 토로 했다.
제주 민중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추진하였던 제반 사업을 완전히 물거품으로 만드는 조치와 함께 여전히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던 인민위원회와 각종 민주 단체에 대한 파괴 공작이 감행되었다.
본격적인 탄압의 첫 신호탄이 되었던 것은 이른바 ‘한라산’ 사건이었다.
그동안 제주민중들로부터 규탄의 대상이 되어왔던 제주 시내의 친일파들은 미군이 진주하자 비밀리에 한라단이라는 테러단을 조직하여 민주세력을 압살하기 위한 음모에 골몰하고 있었다.
미군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와 성원에 의해 여전히 끄떡없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던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이들 ‘한라단’ 들에 의해 습격을 받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여기에 격앙된 젊은이들은 그 다음 날 ‘테러배격’을 외치며 도 군정청 앞에서 항의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시민들이 대거 합세하였고 그에 따라 시위대는 순식간에 크게 불어났다. 마침내 민중의 분노가 하나로 결집되어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라단 깡패들은 그날 밤 또 다시 인민위원회를 습격하여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민중의 자위단체인 보안대는 어쩔 수 없이 자위의 일환으로서 그들을 힘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보안대의 자위 조치 소식을 들은 미군과 경찰은 수십 대의 지프와 트럭에 나누어 타고 기관총과 소총으로 쏘아대면서 인민위원회를 포위하고 마침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곤봉을 휘둘러 댔으며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모든 서류와 비품을 압수하고 50 여명의 애국자들을 투옥해 버렸다.
이 사건은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군정과 친일파들이 민주단체를 파괴하기 위한 일환으로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군정은 이 ‘한라단 사건’을 통하여 전체 제주 민중에게 본격적인 탄압을 개시함과 동시에 피의 대량 학살을 예고하는 불길한 서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제주 민중과 미 군정의 충돌은 단계적으로 확대되어 갔고 그때마다 미 군정의 탄압은 강도를 더해 갔다.
10월 인민항쟁의 격랑을 헤쳐 온 제주 민중은 역사적인 3.1운동을 기념하는 집회를 추진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 군정 당국은 집회의 합법적 개최를 불허하고 나아가 이를 폭력으로 짓밟기 위한 조치로서 육지로부터 경찰을 추가로 투입하는 등 강경한 태세로 대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민중은 결연한 의지로써 대회를 강행하였다.
결국 평화적 시위를 계속하고 있던 제주 도민에 대해 미군과 경찰은 무자비한 발포 행위로 맞섰고 이로 인해 손년 한 명이 희생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유혈 참변에 대해 미 군정은 학살자를 처벌하고 민중 앞에 사죄하기는커녕 오히려 탄압을 더욱 강화하면서 민주인사들에 대한 부당한 검거를 자행하였다.
이러란 군정 당국의 가당치 않은 행위는 결국 제주 민중 전체의 격렬한 항의 투쟁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격분한 제주 민중은 드디어 3월 9일부터 일제히 총 파업 투쟁에 궐기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동맹 휴학과 상인들의 당체 철시가 그 뒤를 따랐으며 군정청 직원들도 불법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며 파업에 합류하였다.
심지어는 대정, 조천, 중문 등 도내의 각 경찰지서원들과 재판소의 직원들도 발포 경찰의 처단과 경찰 책임자의 인책사임을 요구하며 파업투쟁에 돌입하였다.
이리하여 미군인과 극소수의 친일 모리배들만 제외하고 제주도 내의 전민중이 파업투쟁에 궐기하였으며 그 결과 도내의 모든 업무는 마비되고 말았다.
이렇듯이 제주민중의 놀라운 단결력과 투쟁력에 봉착한 미 군정은 다급한 나머지 대량의 무장 경찰과 ‘서북청년회’, ‘민족청년단’ 등 악명 높은 반동적 테러 집단을 속속 토입하여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파업을 선동했던 자, 취로를 방해 했던 자, 직장에서 집회를 계획했던 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검거하라”는 지령과 함께 테러 선풍이 도 전체로 확산되어 갔다.
테러 집단은 우익 경찰과 결합하여 이른바 ‘사람 사냥’에 나섰다.
이 자들은 행정기관 소재지에 있는 관사나 민가를 불법으로 점거하여 “우리는 제2의 모스크바....제주도를 공격하러 온 멸공대다”라고 큰소리치며 온순한 주민을 “빨갱이 동조자”라고 물라 붙이며 위협했다.
이유도 없이 지나가는 행인을 짓밟아 집단 폭행을 가하기도 하고 밀실에 감금하고는 잔인한 란치를 가하여 결국은 살상까지 자행하는 만행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2000 여명 죄 없는 민중이 두 평 남짓한 유치장이나 특설 감방에 수용된 채 형을 기다리게 되었다.
또한 모든 양심적 인사들은 직장에서 쫓겨나 길거리에 내팽개쳐졌다.
아울러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단순히 저항적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추방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경찰비, 후원회비’ 등의 명목으로 각종 기부금이 강요되어 주민들의 생활고를 극도로 압박하게 되었다
.(경찰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금품을 갈취하여 부족한 자신들의 봉급을 채웠다. 또한 서북청년단 등 월남한 반공 피난민으로 구성된 테러단체들은 별다른 봉급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주민들에 대한 갖가지 공갈, 사기 등을 거리낌 없이 자행함으로써 스스로의 사복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제주 민중에 대한 미 군정의 탄압은 이제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보다 일상적인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주 민중은 이 같은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철저히 적대시하는 압제자들에 대해 대중적인 자위 투쟁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갔다.
조천면의 한 마을에서 벌어졌던 투쟁을 보면 이날 하루 종일 마을 입구를 망보던 소년선종대가 테러집단이 가까이 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미리 약속한 대로 개 울음소리로 마을에 알렸다.
마을 사람들은 즉시 있는 그대로의 무기를 가지고 함성을 지르며 길가로 달려 나갔다.
이에 간담이 서늘해진 그들은 부랴부랴 도암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같은 형태의 자위 투쟁은 제주도 전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확산되어 갔으며 그에 따라 미 군정의 탄압도 더욱 악랄해져 갔다.
제주 민중이 정치적인 대중 투쟁과 초보적인 자위 투쟁의 단계를 넘어서서 보다 짜임새 있는 무력저항 형태로 진입하게 된 것은 암담하기만 한 미국의 통치를 영속화하게 된 단독선거 실시가 확실해진 시기였다.
미 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 청년단체들의 야수적인 탄압에 의해 새 조국 건설의 꿈은 물론 인간으로써의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처참하게 유린당한 제주 민중들에게는 미국과 이승만 일파의 음모에 의한 단선단정을 저지하느냐 못하느냐가 곧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제주 민중은 미국과 이승만 일파의 단독선거 음모에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나섰고 이에 대해 미 군정은 일관되게 폭력적 탄압으로 맞섰다.
광범위한 제주 민중들은 안덕면 사계의 모래벌판에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집회를 가졌다.
바로 그때 안덕지서의 경찰대와 테러집단이 갑작스럽게 공격을 가해왔다.
잠재되었던 분노가 폭발하면서 집회에 참석 중이던 민중들은 즉각 돌멩이와 몽둥이를 가지고 그들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윽고 도망하는 지서장을 잡아 무장해제하고 민중재판에 부쳐 민중이 고혈을 빨아 먹던 잔인함을 심판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압제자들은 더욱더 강압적으로 대응해 왔다.
미 군정은 충남, 전남지방으로부터 응원 경찰관을 계속 제주도로 증파하면서 토벌작전을 위한 모의훈련에 돌입하였다.
이와 동시에 전 도를 둘러싸고 검거망에 걸린 사람은 가리지 않고 ‘빨갱이’나 ‘동조자’라는 꼬리표를 붙여 체포하고 진학한 고문을 가하여 죽였다.
2.7 구구 투쟁 직후 조천면 일대에는 경찰에 의한 집중적인 탄압이 가해지면서 다수의 주민이 체포되었다.
그리고는 남녀 구분 없이 감방에 섞어 놓고 부녀의 면전에서 남자를 발가벗겨 생식기를 흔들어 돌리게 하는 등 실로 비인간적인 만행을 강요했을 뿐 아니라 잔혹한 고문에 의하여 전도유망한 청년의 생명을 빼앗기도 하였다.
잇달아서 대정면 일대에 유혈의 대탄압을 전개하고 몸서리치는 테러를 가함과 동시에 양운하라는 주민을 고문 끝에 이윽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주민들 중에는 스파이가 있어서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다.
일례로 금룡리 박행구는 양모라는 자의 밀고로 테러 집단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는 참변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제 제주 민중은 눈물로 나날을 보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절규, 비명, 신음소리와 날카로운 채찍소리뿐이었다.
이러한 폭정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점점 높아지고 그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제주 민중은 오랜 기간에 걸쳐 외세와 봉건적 착취세력에 항거해 왔던 불굴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와 그에 항복한 봉건왕조에 대한 최후의 저항기지가 되었고 가까이 조선 말기에는 6 차례에 걸친 민중봉기의 경험이 있었다.
또한 해방 직후 제주 민중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귀환자들은 그들이 겪었던 혹독한 시련을 통하여 강인한 투쟁력과 진보적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극도의 압제적 상황과 결부되어 제주민중으로 하여금 전면적인 무장 항쟁으로 나아가도록 몰아붙였다.
드디어 제주 민중은 유일한 최의 선택으로서 무장봉기를 위한 준비 작업에 하나같이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핵심적인 유격대 조직이 행정의 말단기구까지 만들어지고 민중의 저항 자위투쟁을 더욱 강화하는 조치가 주도면밀하게 취해졌다.
물 샐 틈 없는 경계망 속에서 무기와 군량미를 획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권력의 추악함을 증오하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갈망하는 전 제주 민중과 애국적인 장병, 경찰관,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에 힘입어 이러한 난관들도 하나씩 해결되어 나갔다.
확실히 민중들은 서로 단합하여 유격대의 손발이 되고 눈이 되고 귀가 되는 일에 기꺼이 호응하여 나섰다.
이는 당시의 절망적 상황 하에서 유격대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어주고 있었다는 점에서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권력측도 예전에 없던 규모로 경계망을 넓히고 집요한 ‘주모자 소탕’작전을 전개하면서 쌍방의 힘에 의한 대결은 점점 불가피한 것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