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역사
송은숙
얼음은 결정結晶이다
얼음이 어는 순간
얼음의 운명은 결정決定된다
피로에 지친 외치*가 피 묻은 옆구리를 대고 눈 위에 누웠을 때
눈 위에 켜켜이 눈이 쌓이고
오천 년간 계속 내려 쌓이고
눈과 피가 얼음의 결정을 만들기로 결정하였을 때
얼음송곳이 물레 바늘처럼 눈꺼풀을 찔렀을 때
외치는 긴긴 얼음의 잠에 빠진 것이다
그 얼음 왕국, 삼만 년 전의 공기방울을 가두고
천 년 전의 꽃가루를 거두고
삼백 년 전의 먼지를 잡아들여
얼음의 역사를 쓰는
저토록 많은 이야기를 시리게 끌고 다니는
얼음의 자연사박물관에
통째로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마터호른을 오르던 스무 살의 두 청년**
절정의 순간에 얼음의 결정에 갇혀
얼음의 잠에 깊이깊이 빠져든
유리를 깨고 얼음에 입맞춤하고 싶은
하얀 꽃의 얼굴이
마침내 발,견,된,다
* 1991년 알프스산의 빙하에서 발견된 기원전 3,300년 전 신석기시대의 미라. 일명 아이스맨.
** 2015년 스위스의 마터호른 빙하에서 70년 전 실종된 일본인 등반가 마사유키 고바야시(21세)와 미치코 오이카와(22세)세)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시집 『얼음의 역사』2017. 현대시기획선
투명종이
송은숙
오징어로 만든 투명종이가 발명되었다네
투명은 빛이 그대로 투과하는 일
머뭇거리지 않고 논스톱으로 지나가는 일
그래서 저 바위와 물풀에 부딪쳐 비로소 되돌아오거나
한없이 한없이 앞으로 나가거나
그 막막함 투,명이라는 말에 투망처럼 걸리네
먹물통을 지닌 오징어가 투명해지다니
먹물 죄다 쏟아 길게 피 흘려야
텅 비어야 될 것 같다네
투명종이에 글을 쓴다면, 궁금하네
그 글도 투명해져 보이지 않을까
허공에 뜬 씨앗처럼 글씨만 까맣게 도드라질까
내장이 비쳐 보인다는 젤리피시처럼
마음의 실핏줄 이리저리 엉겨 있을까
지난해부터 꽃이 비치지 않않네
몸속의 피를 죄다 쏟아부었으니
나 이제 투명해진 건가
기억은 어디에 기록될까
기억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기 위해
살갗에 끝없이 새겨나간 메멘토의 사내처럼
나도 팔뚝에 문신을, 어깨에 시를 새겨볼까
오징어처럼 미끈하게 빠져나갔는지
보이지 않아, 투명해진, 내 분홍의 날들이
시집 『얼음의 역사』2017. 현대시기획선
송은숙 시인
대전에서 태어나 충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울산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수료하였다. 2004년 「개처럼 걷는다」외 2편으로 <시사사>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으며, 2012년 첫 시집 <돌 속의 물고기>를 간행하였다. <화요문학>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