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뢰침/최명임
하늘이 두레박 던져 물 한 동이 퍼 올리고 싶은 푸른 호수 같다. 그 아래서 아이들이 팔랑개비처럼 뛰고 논다. 반나절이 지나 별안간 구름이 구물구물 일어나더니 빗줄기가 쏟아지고 바람이 후줄근히 다 젖는다. 아이들 다급한 뜀박질 소리도 빗물에 젖는다. 구름이 휘모리장단에 놀아나고 동맥 같은 광선이 잇따라 뻗친다. 하늘 어디 굵은 혈관 하나가 툭 터져버린 듯, 날벼락이 땅으로 떨어진다.
화들짝 놀라 하늘을 바라본다. 다시 번쩍하더니 번개가 나의 심장으로 뻗쳐온다. 연이어 천둥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지축을 흔든다. 우산을 던지고 달려야 하나, 자칫 더 나섰다가는 날벼락을 맞을 것 같다. 갈피를 못 잡는데 건너 건물 꼭대기에 피뢰침이 눈에 들어온다. 아슴아슴 보이는 벼락받이에 안심하고 우산을 곧추세운다.
어느 해 날벼락이 나의 지붕으로 떨어졌다. 불행이 도미노처럼 따라왔다. 남편이 하던 일이 내리막을 치달았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그가 차를 몰다 사람을 치었다. 연이어 그의 몸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악성종양을 발견하였다. 불벼락은 사방으로 파편을 날리며 기고만장하게 굴었다. 심장으로 날아든 파편은 비수가 되어 꽂히고 아무리 가슴을 꽁꽁 싸매어도 속울음이 새어 나왔다. 부모님이 일군 옥토와 그와 내가 애써 일군 땅과 집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빈 몸으로 세 아이를 데리고 남의 처마 밑에 들어서는데 뜨거운 불길이 온몸을 훑어 내렸다.
큰아이가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했다. 첫 발령을 받은 날부터 불행과 암팡지게 마주 섰다. 이년 후에 둘째가 대학을 졸업하기 바쁘게 동참하였다. 아들은 힘을 덜자고 휴학계를 내고 자원입대하였다. 두 딸은 잃어버린 땅과 집을 찾아주겠다며 기개를 세웠다, 지쳐 돌아오는 아이들의 눈빛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나의 노동도 밤이 없었다. 세 사람의 노동의 대가는 오롯이 빚잔치에 들어갔다. 이러다가 아이들의 삶까지도 악천후에 휘말릴까 봐 벼락 맞은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몇 년을 방황하던 그가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나 넥타이를 고쳐 매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은 구두를 내놓았더니 불행이 실마리를 다 푼 듯 총총히 물러갔다. 세 아이도 곁을 떠나 제 울안에서 행복을 짓고 있다. 나는 날씨만 흐려도 장대비 올라나, 번개만 쳐도 벼락 맞을라, 겁이 나지만, 요리조리 피해 가며 사는 법도 제법 이골이 생겼다.
피뢰침은 몸집이 작은 데다 가늘고 뾰족하다. 한파에 얼면 툭툭 부러질 것 같고 삼복염천엔 녹지 않을까 의심도 한다. 천둥벼락을 감당하라고 세워놓긴 했어도 벼락 치는 날엔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저 가는 쇠붙이가 어찌 하늘의 사나운 심사를 감당하나 싶은데 뾰족할수록 받아치는 힘은 더 강해진다. 강철의 심지이니 어련하랴.
벼락받이는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온 몸으로 하늘과 맞선다. 벼락을 맞는 순간 화염에 휩싸인다. 불덩이 속에서 의지를 세워도 십만 볼트의 엄청난 전류에 곁가지마저 감전되어버린다. 아득한 정신으로 불벼락을 받아 땅속으로 배설하고 깨어나면 언제 그랬나 싶게 기개를 세운다.
피뢰침은 불행받이다. 불벼락을 찰나에 받아 내는 것 같지만, 그 순간 지옥 불을 경험한다. 오늘을 감당 못하면 내일은 오지 않아 희망 하나로 버티어낸다. 활활 타버릴 것 같은 나의 하루는 십 년 같았다. 가늘고 여려 보여도 쇠붙이 같은 근성이 있었다. 수수만년 불행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이 땅을 지켜온 후예답게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몸짓으로 불덩이를 배설하였다.
하늘은 늘 한결같지 않다. 한없이 맑았다가도 별안간 구름이 일어나고 번개가 친다. 회색 울음이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천둥 벼락이 떨어지면 인간의 삶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두려움에 혼절할 것 같지만, 그런 뒤에 하늘은 더 높아 보이고 속은 한 물길 더 깊어 진풍경을 그려낸다.
날벼락 한 번쯤 맞아보지 않은 삶이 있으랴. 그 순간은 영혼마저 녹아버릴 것 같지만, 죽을 둥 살 둥 덤비고 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제련소의 불길이 달아오를수록 순수한 철이 나오고 모루에 얹힌 쇠붙이가 망치 끝에서 운이 열린다. 우리도 한 뼘 성장하고 길을 나서면 해가 유난히 반길 테니, 지금 처절하게 저 악천후를 감당하는 것이다.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는 더욱 단단해진다. 난데없는 날벼락에 초주검이 된 몸뚱이를 어디에다 쓸까 싶지만, 벼락도 아무나 맞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하늘에게 선택받은 행운은 아닐는지. 저의 정체도 모르는 못난 위인 심장도 없는 허수아비로 내내 살까 봐, 냅다 호통 한 번 지른 것은 아닐까. 한차례 벼락에 휘진 몸이 장인의 손에서 깎이고 깎여 탈태한다. 다시 한 번 다짐인 양 예리한 조각칼로 그 몸에 선명하도록 인간을 새기면 나무는 환골탈태한다.
인간이 하루하루를 먹이 찾느라 소비하고 등 따습고 배부르면 잠자기만 했을라. 문득 하늘이 일갈하는 고성을 들으며 가슴에 불덩이 끌어안고 영육의 진화론을 써 내려온 종이 아니던가. 두 발로 땅을 붙잡고 서서 이 별난 종의 열 손가락으로 조각칼 대어 땅에 각인하고 싶은 것은 나, 일찍이 ‘나’ 는 조물주가 인간을 지을 때 세포 구석구석 새겨 숨겨두었으리라. 벼락의 진수는 거기에 있었다. 우린 평생을 나를 찾아 울면 불면 살고 또 지는 것을. 나를 찾거든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탄탄한 쓰임새 되라고 불벼락으로 아둔한 가슴 한 번 내리친 것이다.
벼락받이는 늘 차렷 자세를 하고 꼬장꼬장한 눈빛으로 하늘을 째려보고 있다. 어림잡을 수도 없는 저 숫자들. 오늘같이 해 좋은 날은 긴장을 풀고 쉬어도 좋으련만.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불벼락, 그 무참한 시간이 두려워서 저리도 날을 세우고 있다.
번쩍 번쩍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천둥벼락소리로 일갈하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돌아보니 저 호통 덕분에 나의 오늘은 해종일 맑음이다.
첫댓글 "가늘고 여려 보여도 쇠붙이 같은 근성이 있었다. 수수만년 불행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이 땅을 지켜온 후예답게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몸짓으로 불덩이를 배설하였다."
피뢰침을 다시 읽으니 어려운 시국을 피뢰침이 이렇게 풀어주었으면 싶고 희망을 갖게 되네요.
그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내어 글이 깊고 자녀들이 훌륭하게 자립했으니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다는 증명같습니다. 연거푸 공모 대상에 이어 더 수필 빛나는 60에 선정되셨으니...
미리 겪어서 앞으로는 꽃길만 걸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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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임 선생님! 더수필 60에 선정디신 것 축하드립니다.
"날벼락 한 번쯤 맞아보지 않은 삶이 있으랴. 그 순간은 영혼마저 녹아버릴 것 같지만, 죽을 둥 살 둥 덤비고 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 모루에 얹힌 쇠붙이가 망치 끝에서 운이 열린다....."
가슴을 깊게 파고드는 글이었습니다. 영혼으로 써내려간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