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갑시다 (2572) ///////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 문신
작은 손 / 문신
1
정말로 한번 만져보고 싶게 작은 손이었다
2
싸락눈이 내리는 저녁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즐거웠다
누군가의 농담에 모두들 과장된 표정으로 웃어주었고
그것만이 우리의 저녁을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축축한 것들이
우리들의 배경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떤 이는 전화를 하러 눈치껏 자리를 뜨고
그 옆자리의 친구는 화장실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빈자리의 쓸쓸함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문이 열릴 때마다 눈길을 돌리곤 했다
그때마다 낯선 얼굴을 만나고는 서둘러
쓰디쓴 눈물빛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세상이 시큰둥하게 보이는 저녁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쌓아놓은 빈 병들을 보며
가끔씩 던지곤 하던 농담도 시들해져갈 무렵
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우리들은 다시 활기를 띠며 눈에 얽힌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낭만이든,
아니면 진부한 자유이든,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즐거웠으며
즐거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조바심 나는 저녁이었으므로
또 한 친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은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더욱 단단하게 여미며
썩 괜찮은 농담을 찾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침몰하기 직전의 선장처럼 우리는
어떤 결정이라도 단호하게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창 밖의 함박눈은 우리들을 비껴서 내렸다
서너 걸음 앞에 놓인 영정 사진 한 장으로
우리들은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므로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빈 병들은 쓰러졌고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잔들이 우리들 앞에 남아 있었고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더 이상 우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날이었다
남자의 손을 보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은 작았다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처럼, 세상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제것으로 움켜쥘 수 없을 만큼 작은 손
그 작은 손위에 놓여진 동전 개수만큼 침침한 저녁이었다
[당선소감] 詩만이 내 존재 이유다
미련퉁이처럼 시만 쓰고 싶었습니다.
연애도 취직도 하지 않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시만 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시는 쓰지 못하고 어느 순간 나는 미련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이 알아주는 진짜 미련퉁이가. 그 미련퉁이가 다시 시를 쓰겠다고 합니다.
연애도 해보고 취직도 해버린 미련퉁이가 염치없이 시를 쓰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시에 무슨 매력이 있어서 그러는 건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시를 읽었습니다.
때로는 행간에 발목이 빠져 마음이 시큰거리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시는 제 등을 토닥여주었습니다.
‘스스로 아파하지 마라. 너는 너 아닌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시는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미련퉁이는 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시가 뭔지를 보여주신 이 땅의 모든 시인들과 시집과 그리고 사람들.
그러나 아직은 부족하기에 오늘 또 한 권의 시집을 샀습니다.
당선 소식에 가장 먼저 기뻐해 주신 이병천 선생님. 고맙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미련퉁이에게 시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늘 안타깝게 지켜봐주신 선생님의 젖은 눈빛이 문득 낮달처럼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눈빛이 언제 어디서라도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시를 처음으로 읽어주신 김승종 교수님, 시 쓰기를 그만둘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정도면 괜찮다고 다독여주신 이희중 교수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곁에서 저를 지켜봐준 부모님과 착한 이정민이 아니었으면 제가 시를 쓸 수나 있었을까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마음사랑병원 가족들에게 이 기쁨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딱 3일만 기뻐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련퉁이는 또 시를 써야겠습니다.
두 분 심사위원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똑부러지는 시를 쓰겠습니다.
[심사평] 삶의 슬픔 담담히 묘사
예심을 통과한 응모자 19인의 작품들 가운데서 5분의 1이 본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나머지 작품들에 견주어 비슷하기보다는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제 나름의 개성을 풍기는 것은 모든 예술작품의 첫 걸음이다.
예컨대, 모대가리금풍뎅이 한 쌍과 가시돌거미 새끼들의 삶과 죽음을 빌려서
‘애벌레 같은 아이를 안고 뛰어내린 어미’를 보여준 ‘잃어버린 길’(박여주),
‘탱탱한 가지 위에서/ 포슬포슬한 감자 위에서/ 아삭아삭한 오이 위에서/ 알싸한 쪽파 위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린 ‘세 시의 나비’(이승주),
‘열 아홉 평 진달래 아파트 가판대’에서 ‘오천원에 세 장’씩 싸구려로 팔리는 ‘30수 면사 런닝셔츠’ 같은
‘이력서’, 서양문물이 세계화의 이름으로 동양을 점령해버린 이 시대에 ‘아시아 갈대’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태평양을 건너가서 미국의 오대호 연안에 뿌리를 내렸다는 ‘여정기’(김미안) 등이
그러한 발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편의 시,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평가되기에는 모자라는 데가 있어서 아쉬웠다.
부분을 다루는 이들의 솜씨가 전체를 마무리하는 기량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당선작으로 뽑힌
‘작은 손’(문신)은 오늘의 평범한 현실을 소재로 삼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과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을 오버랩시키면서,
죽은 친구의 영안실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인이 남기고 간 ‘빈자리의 쓸쓸함’, 조객들의 허황된 농담과 공허한 웃음,
피상적인 관습이 되어버린 조문과 속내에 감추어진 삶의 슬픔이 저녁에 내리는
싸락눈처럼 잔잔한 공감을 일으킨다.
아무런 내면적 교감도 없이 겉 모습만 스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에 숨겨진
우수를 평이한 일상어로 형상화했다.
억지로 만들어낸 은유적 표현이 적어서 친근하게 읽히고, 산문의 어조에 시적 정취를 담았다.
구체적 부분에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함께 투고한 ‘숲으로 가는 곰 인형’에서도 이 작품과 대등한 수준의 저력이 드러난다.
새 시인의 등단을 축하하며, 계속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김광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