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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강진 白蓮寺 [조용헌 박사의 명당순례(6)]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29 15.03.14 10: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조용헌 박사의 명당순례(6)ㅣ강진 白蓮寺]

구강포의 소소한 바다풍경 한눈에 관조

 

글·사진 조용헌 동양학자·칼럼니스트

 

인간 본능 회귀 자극하는 듯… 인근에 다산초당 있어 교류도

 

1950년대 중반에 조계종 종정을 지내던 동산(東山) 선사.

일제시대 때 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가 ‘마음병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느냐?’ 는 백용성 스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했다. 동산의 제자가 바로 해인사 성철 선사였다. 동산 스님은 가끔씩 주변 시자들도 모르게 잠적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범인들도 머리 복잡할 때가 많지만, 도를 깨우친 선사도 사판(事判)에 시달리다 보면 조용히 어디로 가서 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다 같은 사람이니까.

 

동산 스님이 어디로 사라졌다 하면 주변에서 여기 저기 수소문하러 다녔다. ‘도대체 어디로 잠적하신 것인가?’ 그러다가 나중에 찾고 보면 꼭 강진 백련사에 계셨다고 한다. 강진 백련사를 그렇게 좋아했던 분이 동산 스님이다.

 

충북 단양이 고향인 동산이 왜 그렇게 바닷가 절인 백련사를 좋아했을까. 백련사 앞에 펼쳐진 포구의 풍경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백련사 앞으로는 망망대해로 넓게 펼쳐진 바다가 아니라, 구강포(九江浦)라는 포구의 풍경이 보인다. 돛단배가 드나드는 모습이 보이는 조그만 만(灣)의 풍광이기도 하다.

소상팔경 가운데 하나가 ‘원포귀범(遠浦歸帆)’ 아니던가. 멀리 포구로 되돌아가는 돛단배를 바라다보면 인간은 그 어떤 원초적인 심정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

 

 

▲ 강진 만덕산이 둘러싸고 있고 구강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백련사가 자리 잡고 있다.

 

 

내가 10대 초반 시절에 이발소에 머리 깎으러 가면 커다란 거울 위에 돛단배가 포구로 돌아가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때는 이 심심한 그림을 왜 걸어 놓았는지 몰랐지만, 이제 중년이 되어 세상사 풍파에 시달려 보니까 그 이발소 그림을 비로소 이해하겠다. 자기가 태어난 유년시절의 추억이 보존되어 있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귀소본능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이 ‘원포귀범’이 아닌가 싶다.

바다와 돛단배와 동네 마을과, 인간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를 젓고 돛을 내리고 올리는 모습이 모두 어우러진 풍광이다. 대자연과 인간의 땀이 어우러져 그림을 만들어 낸다고나 할까.

 

자연만 있고 인간의 땀이 없으면 얼마 못 가 진부해질 수 있다. 풍광 속에 인간의 땀이 보여야 그 풍광이 의미 깊게 다가온다. 강진 백련사 앞의 풍광은 그 원포귀범의 전형이다. 백련사 대웅보전 앞의 건물 이름도 ‘만경루’(萬景樓) 아닌가.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는 누각’인 것이다. 구강포 전체를 끌어안고 있는 누각이다. 동산 스님이 백련사에 와서 숨어 있곤 했던 것도 이 만경루에 앉아서 구강포를 관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꿈결 같은 아름다운 풍광을 마주 하고 있으면 인간은 어떤 심정이 될까? 무심(無心)이 될까? 좌절과 분노와 인생 헛살다 간다는 허망함이 모두 사라진 그 어떤 진공 상태로 되돌아갈까? 유년 시절의 걱정 없고 즐겁기만 했던 동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사 한 세상이 모두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는 이치를 눈으로 보여 주는 것일까?

 

대웅전 앞 건물이 만 가지 경치 보는 ‘만경루’

 

백련사 뒷산은 만덕산(萬德山)이다. 월출산에서 꾸불꾸불 내려온 산맥이 해남 미황사로 가던 중간에 한 자락 꿈틀대면서 만들어 놓은 자리가 백련사 터다. 백련사는 옛날에는 해상 물류의 중심지였다. 배로 짐을 실어 중국이나 개성으로 다닐 때는 이 백련사 앞의 구강포가 아주 좋은 위치였다.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배를 타고 올라가면 강진에서 개성까지는 2~3일이면 갈 수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이 근방에 청자 가마 터가 많았던 이유도 배에 싣고 개성으로 쉽게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자를 육로로는 운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이 백련사에서 백련결사(白蓮結社)가 이루어졌다.

 

고려 말에 2개의 불교 결사(結社)가 유명하다. 하나는 순천 송광사의 수선결사(修禪結社)이고, 또 하나가 바로 강진 백련사의 백련결사인 것이다. 고려 말의 결사는 불교 쇄신운동이기도 했다.

수선결사가 참선 위주의 방법이었다면, 백련결사는 염불 위주의 방법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마음을 관조하는 참선보다는, 부처님 명호를 큰 소리로 부르는 염불 결사가 더 대중적이다. 백련결사에는 스님들도 있었지만, 당시 해상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도 많이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 강진 백련사에서 구강포 항구 일대가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중국의 여산(廬山)에서 혜원 스님이 주도해 백련결사가 처음 시작되었다. 고려에서는 강진 백련사에서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는 고성염불을 통해서 수행하는 백련결사가 그 전통을 이어 받았던 것이다. 수선결사에 참석했던 멤버들이 귀족적이었다고 한다면, 백련결사는 좀더 서민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시골의 향반들과 출세가 막힌 불만세력도 있었고,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하던 해상세력들도 같이 참여했다.

 

이 백련결사에서 8명의 국사가 배출되었다. 팔국사(八國師)다. 송광사(修禪寺)에서는 16국사가 배출되었고, 백련사에서는 8국사가 배출되었다. 송광사는 산 속의 결사였다고 한다면, 백련사는 바닷가의 결사였다.

산과 바다였다는 차이가 있다. 고려 말에 왜구들이 고려 해안지역을 마음대로 들어와 노략질하던 시대에 구강포를 바라보는 해상 요충지인 백련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결사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상 물류 노선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군사적인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나 싶다. 종교는 어느 선으로 올라가면 군사도 되고 정치도 된다. 인간 만사는 둘이 아닌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백련사는 사연이 있다. 백련사 옆으로 30분 정도 고개를 넘어가면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유배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처음 유배를 왔을 때는 정신없이 몇 년간 술만 마셨던 다산이 마음을 추스르고 공부에 정진하던 곳이 다산초당이다.

 

서울에서 잘 나갔던 다산이 변방 오지 시골에 와서 어떻게 마음을 달랬을까. 마음 달래는 데는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있어야 한다.

상대가 1명만 있어도 사람은 희망이 생기고 삶의 재미가 생긴다. 먹물은 이야기가 되는 상대를 만나기가 어려운 법이다.

 

당시 백련사에는 아암 혜장(兒庵 惠藏·1772~1811)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었다. 다산보다 10년 연하였다. 당시 승려는 천민계층이었다. 10년 연하의 천민계층인 중이 당대의 주류지식인이었던 다산과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다. 다산이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져서 만난 친구가 아암 혜장이었다. 아암 혜장이 그만큼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아암(兒庵)이라는 이름도 다산이 지어 주었다.

아암은 성질이 급했던 모양이다. 마치 아이처럼 단순하고 성질이 급한 10년 연하의 혜장을 다산은 어린 아이 아(兒)자를 써서 ‘아암’이라고 지어 주었으니 말이다. 당시에 어울리기 어려웠던 유학자와 승려가 이렇게 교류했다.

 

다산은 차 마시며 유배의 고통 견뎌내

 

백련사와 다산초당의 거리는 걸어서 약 30~40분 걸린다. 평지가 아니라 적당한 높낮이의 고갯길이다. 높낮이가 있어야 사고도 유연해진다. 고갯길을 올라가면서 하는 생각과 내려오면서 하는 생각이 다른 법이다. 나는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갈 때마다 친구 집의 거리는 이 정도가 적당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너무 가깝게 붙어 있는 것도 재미가 적다. 그렇다고 2시간 이상 너무 떨어져 있으면 생각났을 때 훌쩍 놀러가기가 부담스럽다.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는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한 호흡을 깊이 쉬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이다. 다산과 혜장은 안개 낀 날에도 이 고갯길을 넘어 서로의 거처를 왕래했을 것이다. 눈이 쌓인 어느 겨울날이라고 가지 않았을까. 갔다 오다가 중간에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났던 날도 있으리라. 더군다나 숲길이다. 도시의 아스팔트길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그 길의 품격도 다르다.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숲에서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기록에 의하면 다산은 아암 혜장으로부터 평소에 읽지 않던 불교경전, 즉 능엄경, 기신론 같은 불경들을 소개받았던 것 같다.

아암은 다산으로부터 주역에 대해 배웠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춥고 낙담했던 시기에 다산이 백련사로부터 충전을 받았던 결정적인 식품은 차(茶)였을 것이다. 백련사에는 차 밭이 있었다. 차는 남부지방에만 자라는 식물이다. 경기도가 고향이었던 다산은 남도 유배시절에 차를 알았다.

다산은 백련사 주지였던 아암 혜장에게 차를 보내 달라는 ‘乞茗의 詩(걸명의 시)’를 보내기도 했다.

 

다산은 차를 마시면서 유배의 고통을 견뎠지만, 정작 차밭에 살았던 아암 혜장은 술을 많이 마셔 병으로 일찍 죽었다. 40세에 요절한 것이다. 음차흥국(飮茶興國)이요 음주망국(飮酒亡國)이라 했던가. 왜 출가 승려가 차를 많이 마셔야지, 술을 많이 먹었을까.

‘중’이라는 천민계급의 한을 풀지 못해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머리 좋아야 무슨 소용인가. 경전을 많이 알아야 무슨 소용인가. 이렇게 천대 받는 신세인 것을! 성질이 급했던 아암 혜장은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서 일찍 죽었단 말인가! 차를 마시면 주독(酒毒)이 빠지는 법인데, 아암 혜장은 마음에 쌓인 울분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백련사 대웅전 옆에는 아암 혜장의 ‘산거잡흥(山居雜興)’이라는 시구가 써 있다. 이렇게 초탈한 시를 썼으면서도 술병이 걸려 40세에 일찍 갔다. 그것도 인생이다.

 

 

‘一簾山色靜中鮮(주렴에 어린 산빛은 정적에 쌓여 더욱 아름답고) /

碧樹丹霞滿目姸(푸른 나무숲 붉은 노을은 눈에 가득 곱구나) /

?囑沙彌須煮茗(어린 사미를 불러 차를 끓이라 이르고 보니) /

枕頭原有地漿泉(배갯머리에 원래 시원한 우물이 있는 것을)’

 

 

현 주지 여연 스님도 예사롭지 않아

 

현재 주지로 있는 여연(68) 스님도 보통 분이 아니다. 여연(如然)이라는 법명이 ‘같은 여’에 ‘그럴 ‘연’ 아닌가. 대개 법명은 그 사람의 성질을 그대로 표현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짓기도 한다. 반대로 짓는 경우에는 보강의 차원이다. 내가 보기에 여연 스님은 후자에 해당한다. 같지 않고, 그렇지 못한 성격이니까 선지식이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이다. 말하자면 쉽게 호락호락 어떤 사안에 대해서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다.

 

여연 스님은 연세대 철학과를 나와 출가한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80년대 초반에는 ‘전민련’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 과보로 남산 지하실에 들어가 통닭구이와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고문을 받았다. 감옥살이도 했다. 삶의 깊은 비애를 맛보았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품이다. 어영부영 넘어가는 성품이 아니다. 50대까지만 해도 칼날 같은 성격이었겠지만, 6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왠지 모를 톨레랑스가 풍기는 것 같다.

 

“대흥사 일지암을 복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복원했는가요?”

 

“일지암은 차로 유명한 초의 선사가 계셨던 곳입니다. 우리나라 차의 성지이지요. 추사와 초의 선사의 인연을 적어 놓은 ‘몽연록’(夢緣錄)을 보고 일지암을 복원했습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만 해도 현재 남아 있는 것이 32통입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인연이 각별했죠. 고문 후유증을 일지암에 16년간 머물면서 치유한 셈입니다.

 

 

▲ 다산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의 모습. 이곳에서 백련사까지는 숲길로 30~40분가량 걸린다.

 

 

1972년부터 차를 마시기는 했지만 일지암에 머물면서 본격적으로 차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백련사의 지적 전통과 차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다산, 아암 혜장, 추사, 초의 선사를 모두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암이 승려의 천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고 한다면, 초의 선사는 그것을 극복했다고 봅니다. 다산과 아암은 10년 차이였습니다. 추사와 초의는 동갑이었습니다. 서로 막역했죠. 다산의 지적 전통이 아암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면, 아암의 다음 세대가 추사와 초의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죠. 조선 후기에 다산에서 초의에 이르는 지적 전통은 대단한 전통입니다. 네 사람을 같이 묶어서 봐야만 당대 지성사의 흐름이 포착되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연 스님은 조선 후기 호남의 소론(少論) 명문가인 영암군 신북면의 모산 유씨(柳氏) 집안 후손이었다. 조선 초 영의정을 지낸 하정공 유관(1346~1433)의 후손들이 전남 영암군 신북면에 살았고, 숙종 조에도 당대의 논객으로 필봉을 휘둘렀고, 나중에 영의정을 지내게 되는 유상운(柳尙運·1636~1707)이 배출된 집안이다. 글씨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전남 영암군 신지도에 유배생활하면서 모산의 유씨 집안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소론인 데다가 외가 쪽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연 스님이 대흥사와 백련사에 주석하면서 한국 차계(茶界)의 최종 심판관 역할을 하는 것도 속가 집안의 논객 유전자가 작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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