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영원한 내 친구다
(추억의 사진 한 장)
사진 설명⁄ 1956년 봄 소풍, 부산 영도 유원지에서 친구 박영환과 함께.
전쟁이 일어난 지 3년만인 53년 7월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하지만 피란 수도 부산은 아직도 피란민들이 넘쳐나는 혼돈의 도시였다. 나는 그때 남포동 노점 매대 위에서 양키 물건들을 내리고 ‘건설’ ‘백구’ 같은 사제(私製)담배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주 고객은 중구와 영도 쪽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아주머니들이었다. 부유스름하게 밝아 오는 새벽, ‘국제시장’에서 물건을 잔뜩 산 아주머니들이 머리에 인 무거운 다라이를 내 매대 위에 내려놓고 잠시 쉬면서 주섬주섬 담배를 골라 담았다.
사제담배는 엄연한 불법이었지만 전매청 담배로는 수요의 채 30퍼센트도 감당치 못했기에 당국에서도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장사가 잘되었다. 물량 확보에 신경을 써야 할 정도였다. 차곡차곡 돈이 모이자 고향의 논도 몇 마지기 샀다. 여유가 생기자 학교에 가고 싶었다. 몇 군데 야간 고등학교를 수소문했는데 다들 중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게 없었다. 행상과 노점을 하면서 문교부 인가가 없는 서대신동의 K 고등공민학교에 다녔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다시 알아보았더니 대청동 언덕배기에 새로 세운 학교에는 그것 없이도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늦을세라 한걸음에 달려가 학생증을 받았다.
하지만 학기가 시작되고 한참 지나서 들어갔으니 아이들과 안면을 트기도 쉽지 않은 데다 공부도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오늘 사진 속의 주인공인 박영환 군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그는 나보다 먼저 들어와서인지 발이 넓었다. 잔뜩 움츠려 있던 내게 여러 아이를 인사시켜 기를 살려주는가 하면 뒤처져 있던 학과 공부도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내가 탈 없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친구의 덕택이라 할 수 있다.
졸업 후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즈음 나는 노점 자리 뒤쪽 건물의 30평짜리 가게를 빌려 H 상회라는 큼지막한 간판을 걸고, 구멍가게 아주머니들이 국제시장에서 사 오던 비누, 성냥, 양초 같은 생필품 도매업을 시작했다. 사재 담배를 팔면서 사귄 아주머니들의 성원으로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거기다 손수레 여섯 대로 구멍가게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싣고 가게를 찾아가는 행상 부대를 만들었는데 그게 또 적중했다. 아침에 나갔던 손수레 부대가 저녁녘에 들어오면 돈 갈무리하기에 바빴다.
내가 그리 잘 나갈 때 영환 군이 찾아왔다. 졸업 후 처음이었다. 반가웠다. 한데,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후줄근한 모습에 창백한 얼굴이었다. 군에 입대한 지 열 달 만에 결핵으로 의병제대를 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결핵은 난치병이었다.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광복동 옆 골목에 있는 결핵 전문 병원인 최 내과로 데려갔다.
통원 치료하는 동안 자주 만나게 되면서 친구의 내력도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서울대 법대 교수였는데 전쟁 초입에 납북되어 가시고 서울중학교에 다니다가 피란 중에 김천중학교에 편입했다고 했다. D고교에서 나를 만났을 때는 수영 쪽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일했다고 했다. 지금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가 동사무소 일을 도와주면서 꾸려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음 영환 군을 만난 것은 30대 후반이었다. 잘 나가던 내가 환도(還都)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20대 젊은 나이에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의기양양 뻗어내기에만 정신이 팔렸으니 환도는 먼 나라 얘기였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모두 들 서울로, 서울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저물녘 장터 마당처럼 텅 비어버린 도시, 결국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시골로 내려가 팔 년 동안 곡물 수집상을 하고 서울에 입성했을 때 어찌 알았는지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대구에서 아내와 일남 이녀를 거느린 다섯 식구의 가장이었다, 아내는 음악, 본인은 영어, 둘 다 중학교 선생님이었다. 결핵 완치 후 동아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사법 고시에 도전했으나 연거푸 낙방. 다급한 생계를 위해 학사 경찰에 들어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곧장 그만두고 중등교사 영어 자격증을 얻어 교사의 길을 밟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 나도 아들 넷을 둔 여섯 식구의 가장이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두 집 가족의 소풍을 겸한 상견례를 가졌다. 친구네 가족이 대구에서 올라와 화양리 어린이 대공원에서 만났다, 양가에서 준비한 김밥, 과일 등을 먹으며 참 멋진 하루를 보냈다. 그날 친구 부인인 신 선생이 나더러 “지아비가 어려웠을 때 큰 도움을 주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라며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거기다 친구가 보탰다. “철수,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내가 병원비를 도와준 기억이 났다. 나는 잊고 있었는데 친구가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니 되레 내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참 빠르게도 흘렀다. 그도 나도 어느새 팔순 고개를 넘었다. 친구는 오래전 뇌종양으로 아내를 잃었고 나는 그보다 이태 전에 마흔 살 장남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뼈를 깎는 듯한 애통함도 20년이라는 세월 앞에서는 종잇장처럼 얇게 사위어지는 걸까, 둘 다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친구는 단독 주택의 독거노인, 하지만 그는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다. 종합복지관을 비롯한 두 곳에서 영어 회화 강사로 출강하고, 실버 합창단 멤버로도 활약하고 있다.
친구와 나는 오래전부터 카톡 문자를 통해 서로의 일상(日常)을 공유하고 있다. 친구가 새벽녘에 합기도 수련을 하고 여느 날과 같이 이발소에 들르고 점심은 누구랑 먹었다던 가 같은 얘기들을 보내오면, 나도 아침나절 뒷산에 올랐던 얘기며 정원 손질한 소소한 일들을 친구에게 띄운다. 일상의 공유, 내게는 더할 수 없는 뿌듯함이다. 그 뿌듯함을 끊임없이 내게로 보내주는 박영환, 그는 영원한 내 친구다. (에세이21 2022년 봄호 게재)
첫댓글
오늘 아침 선생님 글을 보고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됩니다.
선생님 글은 솔직담백해서 좋습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은 지난 시절의 순수했던 순간들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좋은글입니다~^
김윤권 선생님,
댓글 고맙습니다.
영종도 '하늘 문화센타' 수영장 에서 김 선생님과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는 상상을 해봅니다.
늘 건강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김영옥 선생님,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저께 강철수 선생님께서 올리신 이 글을 읽었는데, 오늘도 잊어버리지 않고 문득 문득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글이란 이렇게 쉽고 진솔한 글임을 다시 한번 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동장군이 오셨네요. 건강 잘 챙기시고 좋은글 또 올려주십시오.
임무성 선생님.
격려 고맙습니다.
격려에 힘입어 좋은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