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血天大帝
<1> 불속에서 깨어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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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치치루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법을 터득하고 난지 7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새벽 어스름한 빛에 감긴 채 천천히 밝아오는 아침을 맞는 총독의 저택은 여전히 화려하고 웅장했으며,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느긋한 이 나라 사람들의 성품상, 새벽이란 결코 그 고요가 깨질리 없는 순간이었다. 볕이 들지 않아 차가운 공기는 뼛속까지 으슬으슬 춥게 만들었고, 뜰을 딛을 때마다 밤새 맺힌 이슬이 톡톡 튀어 올랐다.
치치루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바닥에 누운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야, 일어나.”
그를 깨우는 목소리에 치치루는 억지로 눈을 떴다. 아직 어두운 방 안에서 등불을 비추어 든 채 밝게 웃고 있는 하티마가 보였다. 그녀는 어디 먼 길이라도 떠나는지 평소와는 달리 단단히 챙겨 입고 있었다.
치치루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몇 시야?”
“벌써 날이 밝았어. 곧 출발해야 해.”
그녀의 대답에 치치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집을 떠나 이 나라의 수도에 있는 왕의 궁전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일찍 길을 떠나야 할 줄은 몰랐다. 치치루는 길게 하품을 하며 두 팔을 길게 쭉 뻗고 한껏 기지개를 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지낸지 벌써 7년째였다. 그는 분명 사람이 아닌 한 마리의 붉은 새였지만, 그는 지난 7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지를 정확히 이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하티마가 최선을 다해 그를 가르쳤다. 덕분에 사람의 외모를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아 치치루는 식탁에 앉아 손으로 먹는 법을 익혔고, 팔을 이용해 나무 위로 기어오른 적도 있었으며, 두 다리로 빨리 뛰어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치치루는 겉으로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그저 이 나라 사람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머리색과 이국적인 외모를 타고난 18살(그는 하티마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을 하티마와 같은 연배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이, 치치루와 하티마의 성장 속도는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다)의 청년이었다.
하티마는 치치루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려주었다. 그의 키가 훨씬 컸기에 하티마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어깨를 만져야만 했다. 치치루는 눈을 감고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이런 식의 접촉을 아주 좋아했다.
“이제 깼어?”
“거의.”
치치루가 웃으며 말했다. 하티마는 곧 출발하니 얼른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방을 나갔다. 휙 돌아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꽤나 매혹적이었다. 치치루는 그런 하티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곧 그녀를 따라 방을 나갔다.
야소다르만과 하티마, 치치루와 저택의 하인 오십 여명 정도로 구성된 일행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수도를 향해 출발했을 때는 슬슬 잿빛 하늘로부터 햇빛이 들고 있을 때였다. 일행은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 두 대에 모든 짐을 옮겨 싣고, 마차 한대만 대동한 채 나아갔다. 야소다르만 총독과 하티마, 그리고 치치루 세 사람이 함께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하인들은 전부 무장한 채 천천히 걸어서 일행을 뒤따랐다. 이들이 창과 활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 이유는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으로부터 총독과 그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짐을 실은 수레에는 왕에게 바칠 지역의 귀중한 토산품과 암염, 산호로 만든 아름다운 장신구와 보석 등으로 가득 실려 있었고, 여행 중간에 먹을 요깃거리와 마실 물도 있었다.
마차에는 창문이 뚫려 있었으므로 치치루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일행이 얼마나 잘 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날이 밝자 푸른 조명 속에 잠겨있던 것 같은 바깥이 환해지면서 창밖을 잘 볼 수 있었다. 무더운 날씨 아래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자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척박한 황무지를 지나가다보면 진흙으로 벽을 덕지덕지 바른 초라한 농촌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집들이 사라지고 갈수록 산과 넓은 평원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교외로 들어선 것 같았다.
점심때가 되자 일행은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자리를 편 채 점심식사를 했다. 차파티(밀가루를 얇게 밀어 구운 빵)에 매운 카레를 찍어먹던 치치루는 저쪽에서 총독과 일행의 인솔자가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
“이 정도 속도로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겠나?”
“아마 문제없을 것입니다요. 조금만 가다가 투올라 마을 서쪽으로 빠지면 금방이니까요.”
인솔자는 확고한 목소리로 서두르는 총독을 안심시켰다. 야소다르만은 현명하고 느긋한 사람이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어쩐지 모르게 굉장히 서두르는 듯 했다.
치치루는 먹던 것을 내려놓고 반대편에서 열심히 식사 중이던 하티마를 불러 살짝 물었다.
“너희 아버지 왜 저렇게 서두르시는 거야?”
“뭐가?”
하티마가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 되묻자 치치루는 연신 지도를 펼쳐든 채 더 빠른 길을 찾고 있는 총독을 가리키며 말했다.
“평소에 궁전으로 가실 때는 굉장히 느긋하셨잖아. 가끔 마차에서 내려 걸어가실 정도로. 그런데 이번에는 많이 조급해하시는 것 같아. 가족들을 전부 데리고 가서 그러시나?”
야소다르만 총독이 특별히 서두른다는 것 외에도, 이번 궁전으로의 여정이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하티마와 치치루가 처음으로 이 나라의 왕을 배알하기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왕도 그렇지만, 특히 이 나라를 이어받을 왕자가 이번 총독의 수도 행에 반드시 그의 딸을 데리고 오라 명했다던데 이런 이유로 인해 하티마와 치치루가 총독을 따라 나서고 있는 것이었다. 치치루에게는 이들을 따라나설 이유가 없었지만, 하티마가 그녀의 소중한 친구와 떨어지기 싫어하였음으로 그 역시 따라나서게 된 것이었다.
하티마 역시 그녀의 아버지가 서두르는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풍문에 의하면 아버지가 서두르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다 치치루에게 그녀가 추측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아마 투르크 인들 때문일 거야.”
“투르크?”
“응. 아버지가 그러셨는데, 요새 투르크 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대. 곧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치려 한다는 소문도 들었어.”
하티마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치치루는 투르크 인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하티마로부터 그들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어본 적 있었다. 그들은 이 나라 사람들과는 그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로, 몸집이 크고 우락부락하며 대단히 강한 전사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을 믿으며, 엄청난 크기의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차츰 이 풍요로운 대륙을 향해 그 검은 손길을 뻗어오고 있었다. 자르지오타는 안전하였지만, 이미 이 대륙의 북쪽 지방은 거의 모두가 함락되어 투르크 인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얘기도 들어본 바 있었다.
하티마가 말을 이었다.
“아마 그것 때문일 거야. 투크르 인들이 자꾸 내려오면 우리가 위험하니까. 그들의 병사들은 대단히 강하고 또 잔인하다고 들었거든.”
그렇게 말하는 하티마의 표정에 금방 그늘이 졌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살생과 전쟁을 싫어하는 그녀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공기를 가녀린 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그런 하티마를 쳐다보고 있던 치치루는 어떻게라도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치치루는 곧 좋은 것을 생각해내고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자르지오타 사람들도 꽤 세잖아? 거기다 우리한테는 카리슈마도 있고.”
그 말은 생각보다 효험이 있었다. 하티마는 카리슈마라는 말을 듣자마자 금방 생기를 되찾았다. 흰 코끼리로 이루어진 이 나라 최강의 병력인 카리슈마(charishuma)는 언제나 그 숭고한 모습과 용맹함으로 이 나라는 물론, 대륙 전체를 지탱하는 군사적 자존심의 결정체였다. 치치루는 지금껏 수많은 전장에서 카리슈마 출격하여 거두어들였던 혁혁한 전과를 하티마로부터 많이 들어온 참이었다. 절대 패배를 모르는 하얀 거인의 군대. 그들이 있다면 천하에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인가. 하티마 역시 그런 생각을 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안심하는 것을 보니 치치루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티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들이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을 거야.”
“그러니까 우린 안심하고 밥이나 먹자고.”
치치루가 진흙 단지에서 밥을 한 움큼 집어 들며 말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 여행은 계속되었다. 일행은 양쪽으로 깎아지는 듯한 벼랑이 이어진 좁은 협곡을 지났고, 토착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고 있는 작은 마을도 지나쳤다. 점심때 먹은 카레와 빵이 다 소화되어 배가 다시 출출할 늦은 오후 때가 되자 일행은 마침내 울퉁불퉁한 흙길로부터 벗어나 잘 닦인 매끄러운 도로 위를 달릴 수 있었다.
도로가 닦여 있는 것은 이 도시가 이 나라에 가지는 특별한 의미와 의의 때문이었다. 치치루는 일찍이 이토록 매끄럽고 부드러운 도로를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사는 곳에도 도로는 있었지만 여기만큼 멋진 것은 아니었다.
집을 떠나온 지 반나절 만에 그들은 수도의 외곽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마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집이 있던 곳과 사뭇 달랐다. 사람들은 더 잘 차려입은 것 같았고, 가옥들은 훨씬 고풍스러웠다. 도시의 세련된 풍모는 길을 따라 도시 중앙부로 나아갈수록 더욱 발전해나가는 듯 했다. 밖에 나다니고 있던 사람들은 자르지오타 4대 총독의 하나인 야소다르만이 도착한 것을 보고 ‘아니, 총독이 여기로 직접 왔단 말이야? 큰일이 난 게 분명하군.’ 이라고 추측하는 식의 표정을 짓거나 혹은, 그의 마차에 탄 붉은 머리의 소년을 발견하고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총독과 함께 온 저 녀석은 누구지?’ 하고 치치루를 궁금해하는 것이리라.
마차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덜컹거리며 흔들리던 마차가 속도를 줄이고 멈추었을 때, 그들은 웬만한 농가가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문 앞에 서 있었다.
드디어 왕궁에 다다른 것이다.
첫댓글 오오 왕궁이라;; 카레가 나오니 왠지 배가고프네요 연재 마니 해주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