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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간 데 있고
제5부 有朋自遠訪來
6789
해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즈음이면 우리 집 화단에 철쭉꽃이 색등을 켜놓은 듯 화사하게 뜰을 밝힌다. 어느 해인가 오사카 사는 큰아들 빼고 둘째 셋째와 기념촬영을 했던가 보다. 내가 해직 당할 무렵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우리 아이들은 허기와 추위와 충격 속에서 종잡을 수 없는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그게 참 가슴 아프고 미안하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과 우리 집 잔디밭에서 술잔을 나누며 비분강개하고 울화통을 터뜨렸던고. 내가 배불뚝이 된 데에는 우리 잔디밭에서 동지들과 삼겹살을 너무 자주 많이 구워먹었던 일도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던가 싶다. 특히 철쭉꽃이 색등을 밝힐 때면 더 자주 술벗들을 초대하곤 했다. 어느 해 봄엔가는 6789를 불러서 다사로운 봄의 한 때를 즐겼다.
원래 청호중학교에서는 789였다. 모두 46년생 동갑나기. 나는 7남매의 장남이었고, 미술과 문국만 선생은 8남매의 장남, 영어과 임 동일 선생은 9남매의 장남이었다.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형제간들이 많았다지만 한 학교에서 많은 남매들을 거느린 장남, 그것도 인품들이 넉넉한 동갑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인연이 아니었다.
우리는 잠시 헤어졌다가 유달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는데 이번에는 46년생 6남매의 장남 음악과 정대지 선생이 합류하여 모임 이름이 6789로 바뀌었다. 새판잡이로 전교조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들이었지만 과감하게 분회원이 되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퇴직한 후로는 머리 허연 정 선생이 서울로 떠나고 다시 789로 졸아들어 함께 ‘화백회’ 모임에 들어가 유유자적 산천경개를 유람하며 노년을 즐기는 중이다.
별호사 가족
나는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사랑하는 박승옥 변호사에게 ‘별호사’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저 어지러운 8,90년대에 6,7년 동안 끈질긴 법정투쟁을 거쳐 신명여상에서 집단 해임된 교사들을 전원 복직시킨, 쇠심줄처럼 끈질긴 변호사였다. (부록 17 참조)
임기준 목사님은 말년에 별호사의 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아 가끔 서울에서 내려오셨다.
정권율 선생이 노화중학교로 발령받았을 때 따라가서 얻어먹은 봄 도다리 맛을 잊을 수 없다. 정 선생은 교육민주화운동에 나보다 훨씬 먼저 뛰어들었다. 별호사와 함께 오랫동안 사서삼경 연구에 몰두하고 별호사의 장학재단 일을 도맡아 추진하고 있다. 이제 나도 별호사의 장학재단 이사를 맡았으니 신명 교사들뿐 아니라 이제는 정 선생과 나까지도 별호사의 패밀리(가족)가 된 셈이다.
별호사의 고향 소안도 미라리 학교는 폐교되어 펜션이 되었다. 별호사 초청으로 거기에서 하룻밤 묵었다. 류훈영 선생은 나를 그림자처럼 마크하는 보호자 겸 경호원이다. 어려운 시절에 지회장 감으로 지목했던 사람이 경기도로 전근 가는 바람에 부랴부랴 대신 지회장을 맡아 고생했다.
다재다능한 장근천 선생은 사립학교 분회 지회 활동으로 오래오래 지금까지 고생이 많다. 지조 굳은 선비라 해야 맞을 것이다.
정맹자 선생은 함평 사립 고등학교에서 해직 당했다. 목포로 발령받은 덕분에 갑자기 자주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나 때문에 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투덜거리며 웃는다. 나보다 한참 아래라 아직도 교원평가다 일제고사다 어수선해진 학교 현장에서 참교육에 고뇌하고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맹렬 교사다.
소년 김 선생
별호사는 김광헌 선생을 소년 선생이라 부르는데 소년이기는커녕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소년이라는 속뜻은 소년처럼 순수하고 때가 안 묻고 사람을 사귈 때에도 계산을 따지지 않고 항상 누구한테든지 성심성의를 다하여 진실 되게 헌신적으로 대하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얼큰해지면 흘러간 옛 노래를 흐느끼듯 애절하게 부르는 소년 선생, 울타리에 수세미를 올려 가을이면 선생들마다 몇 개씩 안겨주는 소년 선생, FTA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무는 농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모든 것에 울분을 토하는 욕쟁이, 백과사전적인 박학다식, 뛰어난 기억력, 자이로스코프처럼 평형을 잘 잡는 가치관, 가히 경세지재(經世之才)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기둥감이요 대들보감이다.
우리는 압해도 송공리 포구의 몽골 텐트 단골 술집을 참 많이도 다녔다. 소년 선생이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면 별호사는 ‘오 솔레미오’나 ‘돌아오라 쏘렌토’를 불렀다. 우리는 또 송공에서 배를 타고 안좌도로 건너가 다리로 연결된 팔금도 암태도 자은도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함께 하는 시간과 우정은 정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교사대회 가는 길. 김광헌 선생은 행사와 회의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석한다. 그는 연설가가 아니고 행동파다.
왼쪽이 임정선 선생, 해직 김영희 선생이 진도 농부한테 시집가자 그 집 농장에서 생산된 버섯을 유달중에 판매하는 일은 오롯이 임 선생 몫이 되었다. 거침없이 활달하고 밝고 대범하고 배드민턴 잘 치고.
영산강은 갈대꽃 필 때 배경이 가장 훌륭하다. 왼쪽이 하영균 선생. 가거도 근무할 때 생선회 뜨는 법을 배웠다. 일식 주방장을 능가하는 솜씨다. 우리 집 옥상 탁구장에 술벗 20여 명을 초청하면 하 선생이 회 뜨고, 뼈 다지고, 낙지 좃고, 육수 내서 탕 끓이고, 유부초밥 만들고, 어죽 쑤어서, 아주 끝내주고 죽여준다.
부드럽게 아주 살며시
이용원 선생의 동서가 무안 도리포에서 횟집을 운영한다. 나와 동갑, 이 선생 덕분에 금방 친구가 되었다. 도리포는 목포에서 한 시간 걸리는 꽤 먼 거리이지만 나는 내 부탁을 들어줄 만큼 만만한 기사가 보이면 도리포로 가자고 꼬드긴다. 횟값은 실비로 받지만 떠나올 때면 무언가 서운하다고 자꾸 말린 숭어나 문저리도 싸주고 숭어알 말린 비싼 어란도 그냥 싸준다.
서헌 선생은 언젠가 우리 집 잔디밭 삼겹살구이 때 놀러 와서 술 몇 잔에 얼굴이 벌게지기에 별로 못 마시는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대주가로 변모했다. 새 조합원이 드물어 노화현상을 보이는 전남에서 그래도 가장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차세대 전투기라고나 할까. 고윤혁 선생과 함께 ‘행복하계’ 계원이다. 배드민턴 모임인데 모임 이름이 퍽 마음에 든다.
테니스만 쳤던 이용원 선생은 배드민턴 모임 ‘행복하계’ 계원은 아니지만 혼자 스스로 행복하다. 너무나도 소리 소문 없이 인생을 부드럽게 웃으며 꾸려가는 사람이다. 혼자 행복한 게 아니라 주위에 행복한 사람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닌다. 불우한 사람을 돕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각별하면서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성미다.
갤로퍼 교주
나는 갤로퍼를 몰고 다니는 조창익 선생을 ‘갤로퍼 교주’라고 불렀다. 복직해서 해남으로 그의 차를 타고 다니던 몇 해 동안 나는 조 선생이 남의 차를 성급히 앞질러가는 광경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항상 서행하며 손짓으로 뒤차를 먼저 가라고 양보하는 장면은 여러 번 목격했다. 요컨대 이해심, 관용성, 봉사정신이 누구보다 강했다. 견문이 넓어 박학다식하고 지조가 강철 같고 추진력이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겸손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훌륭한 조 선생은 항상 분회원들을 구름같이 몰고 다닌다. 요컨대 사람이 잘 따르는 것이다.
한번은 하당에서 짬빡 조 선생과 목포여중 분회원들을 만나 합석했다. 사랑 표시를 하는 왼쪽이 권혜경 선생. ‘산장의 여인’을 부른 가수와 이름이 똑같아 나는 그미 별명을 ‘산장의 여인’이라 부른다. 2012년 목포 지회장으로 수고가 많은 ‘철의 여인’이다. 남자는 지조, 여자는 절개라지만 요즘은 ‘산장의 여인’보다 지조가 굳지 못한 남자들도 많다.
조창익 선생과 어깨를 나란히 한 아주머니가 임향진 선생. 조 선생과 함께 무안에서 해직되어 사무실을 지키며 고생이 많았다. 농민운동가와 결혼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유달중에서 그미와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컴퓨터가 막히면 그미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인생의 동반자
무안 학마을 부근이다. 우리는 함평 장에서 순대를 사가지고 왜가리가 꽥꽥거리는 저수지 옆 구멍가게 평상에 앉았다. 마을 어르신이 지나가기에, “약주나 한 잔 하시지요.” 금방 동네 어르신들이 열 명 가까이 평상에 모였다. 함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순대 안주에 소주를 마셨다. 윤석우 선생은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다. 내가 가는 곳마다 5분 안에 모르는 사람들과 친해지면 혀를 살살 내둘렀다.
94년 해남중학교로 복직해서 윤 선생을 만났다. 1주일도 못 되어 친해졌다. 당시 그는 국문학 박사 학위 논문 준비 중이어서 학교 수업하랴 공부하랴 비쩍 마르고 허약했다. 테니스를 권했다. 함께 그의 차로 퇴근하여 목포 시립테니스장에서 몇 달 동안 레슨을 받았다. 샤워하는데 아들이 윤 선생 허벅지를 만져보더니, “엄마, 아버지 다리가 굵어졌어.” 부인도 아주 좋아하더란다.
그와 사귄 지 어언 스무 해가 다 되어간다. 윤 선생 차를 타고 단둘이 참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나로도, 고금도, 소록도, 완도, 청산도, 보길도, 진도, 자은도, 비금도, 장흥 보림사, 나주 다보사, 도갑사, 무안 짚불구이, 임실 옥정호 빙어, 어찌나 자주 만나던지 부인들이 서방 빼앗겼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일산으로 전근간 뒤 좀 조용해졌다.
소설가, 시인, 타고난 미성. 반할 만큼 예쁜 달필. 용타스님의 개인교습을 받는 불제자, 몸에 밴 예절, 철저한 장인정신, 이제 나는 그가 빠진 세상을 상상하기조차 싫다.
자칭 취미생활이라면서 해마다 내 납작모자를 사서 선사한다. 벌써 스무 개 넘었다.
신부가 될 뻔한 교사
2005년인가, 유달중에서 문국만 선생 따님 결혼하는 광주로 가려고 차를 탔다가 유달중 김용재 선생의 친구 박석근 선생을 처음 만났다. 박 선생이 운전했다. 조도고등학교 근무한다 했다.
“조도는 태풍 한 번씩 오면 큰 고기가 나온답디다. 언제 조도 고기 한 번 먹어봅시다.”
“그러시지요.”
흔쾌히 승낙했다. 얼마 후, 진짜로 박 선생이 싱싱한 생선을 목포로 가져왔다. 용당골 식당에 거창하게 한 판 차렸다.
그 후 시인 박 선생은 부지런히 메일을 보내왔다. 메일에 그만큼 정성이 담기고 치열한 사람은 처음 봤다.
-다리는 발품도 팔지 않고 책상머리에서 앉아서/별과 꽃과 사람을 다 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가을에/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길에서/ 별도 만나고 꽃도 만나고 사람도 만납시다.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답니다. <거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끝물의 과일 위에서/ 있는 대로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9월의 햇살을 몹시 사랑한다.>
-지금 막 교무실로 들어오는 후배교사가 한 마디 던집니다.
"오늘 날씨가 무지하게 좋습니다."
그래서 특유의 오버하는 목소리로 제가 받았지요.
"그래 나는 이런 날이면 바람나고 싶어진다네."
여름방학, 나는 버스로 혼자 조도에 들어갔다. 박 선생 단골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처음 맛보는 ‘거북손’이 참 좋았다. 관사에서 하룻밤 자고 나로도로 갔다. 나로도는 도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는 다시 녹동을 구경하고 거기에서 하룻밤 자고 돌아왔다.
교사를 하기에는 너무나 마음씨가 곱고 순수하다. 오히려 신부를 했더라면 더 적성에 맞지 않았겠느냐고 물으니 그런 말 많이 들었단다. 사실은 참교육 교사로서도 너무나 자상하고 따뜻하고 훌륭하다.
우리 시대 마지막 교사
1988년 목포여중에서 고영의 선생님을 뵈었다. 사진은 목포여중에서 홍도 여행가서 찍었다. 선생님은 쉬는 시간이면 과학실에서 붓글씨를 썼다. 그 옆에서는 제자 선생님이 서툰 붓놀림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수업하는 교실을 지나가며 들여다보면 늘 조용했다. 한창 몸이 근질근질한 여학생들이 어쩜 그리 침 맞은 지네처럼 온순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이 두고두고 수수께끼였다.
1997년 복직해서 해남우수영중학교로 전근 가자 거기 계셨다. 두 번째로 모시는 영광을 누렸다. 날마다 도시락을 싸서 그분의 과학실 귀퉁이 휴게실에서 함께 먹었다. 여학생들이 끊임없이 휴게실로 놀러와 쫑알거렸다. 도시락을 먹고 나면 학생들이 커피를 타주었다. 커피 타기 전에 컵을 뜨거운 물로 덥혀야 한다는 요령도 고 선생님한테 배웠다. 고 선생님은 늘 바쁘고 피곤하셨다. 가끔은 점심 후 끄덕끄덕 졸았다.
목포여중에서 왜 고 선생님의 수업 시간이 예배당처럼 조용한지 그 수수께끼가 세월이 흘러 우수영중에서 두 번째로 모시면서 풀렸다.
첫째, 끝없는 제자 사랑. 둘째, 온갖 정성. 셋째, 봉사와 헌신. 넷째, 근면. 다섯째, 탄탄한 실력과 폭 넓은 교양. 여섯째, 건전한 가치관과 인생관. 일곱째, 건강. 마지막으로 고결하고 아늑한 영혼. (부록 18 참조)
내가 보기에는 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거의 완벽하게 갖추신 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우리 시대 마지막 교사’로 일컫는다. 물론 나 같은 평범한 교사는 흉내 내기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분은 교직에 걸리적거리는 장애가 될까 봐 30대부터 교장 승진을 포기하셨단다. 목포여중에서 교사협의회 회장을 맡아주시라고 청하자 자격이 없다고, 젊은 사람들이 하라고 극구 사양하셨다. 그러나 나 보기에는 참교육이라는 말이 없을 때부터 그분은 참교육을 몸으로 실천하신 분이었다. 교육방송에서 스승의 날 특집으로 고 선생님을 찍으려 하자 재삼 사양했지만 우리들이 적극 추천하여 찍었다. 그분의 교육 행적과 수업 광경은 ‘소걸음을 걷는 선생님’이란 제목으로 전국에 방영되었다.
우수영에서 고 선생님을 모시고 ‘우조모(우수영을 좋아하는 모임)’가 만들어졌다.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고 선생님은 우수영에서 퇴임하셨다. 아직도 우수영에서 텃밭을 가꾸시면서 구름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신다. 어느덧 팔순이 가까우시다. 나는 고 선생님이 오래도록 우리 울타리가 되어주실 것을 간절히 기원한다.
삶의 진수(眞髓)
복직 후 우수영중학교에서 김진수 선생을 만났다. 학교 신문을 발간하는데 삽화를 부탁했다. 흔쾌히 정성을 다하여 그려줬다. 그의 그림은 항상 시원시원하고 선이 굵은 대담한 필체였다. 그림에 씩씩하고 힘찬 기운이 넘쳐흘렀다. 김진수 선생 자체가 힘찬 기백이 넘쳐흐르는 사람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좋아해서 조근조근 잔잔한 담화를 즐기는 점은 나와 비슷하기도 했다. 게다가 미술과지만 음악을 좋아해서 기타도 잘 치고, 감수성이 풍부해서 맛깔스런 토속어를 동원하여 시도 잘 쓰고, 이 세상을 참으로 부드럽고 따뜻하고 다정하게 건너는 사람이었다. 그의 주름 잡힌 눈매를 들여다보며 봄바람처럼 훈훈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너무나 편안하여 졸음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우수영중학교 있을 때에는 고영의 선생님과 셋이서 참 여러 번도 진도대교 아래 횟집에 가서 뿔소라 안주에 소주를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가 도서실에 화분을 기르자 야생화를 여러 번 캐다 주었다. 노루귀, 꿩의발톱. 천금성. 끝내 그는 야생화에 반해 돌아다니다가 전남들꽃연구회 회장이 되었다. 창립기념일에 광양 놀러갔더니 동호회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는 행사를 기획하고 마무리하는 데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들꽃 연구는 한약 연구로 이어져 그 방면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광주 교외 대촌에다 손수 설계하여 예술적인 집에서 살더니 이제는 또 화순에다 멋들어진 저택을 마련하였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인생을 다정하고 따뜻하고 격조 높고 우아하고 맛깔스럽게 살 수 있는지 그는 삶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화백회
‘화백회’라는 모임 이름은 류훈영 선생이 지었다. 화려한 백수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우리 동생한테 자랑했더니 웃었다. 화려한 백수란 본래 돈도 많고, 골프도 치고, 여자 친구도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 하였다. 우리한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화려한 백수라고 자부하면 그만이지 뭐 별것이겠는가. 무엇보다도 외로운 사람들끼리 서로 볼을 비비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만이지 뭐 별것이겠는가.
나는 화백회가 너무나 좋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나 식사를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서너 달에 한 번쯤은 휴양림으로 제주도로 함께 여행도 다니는 모임이 너무나 만족스럽다. 함께 늙어가는 사이고, 교직에 있을 때에는 누리지 못한 한가함까지 얻었으니 한들한들 참 여유롭다.
임 박사, 문 박사, 전 박사....... 나는 회원들에게 모조리 박사의 칭호를 붙여서 호칭했다. 박사!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더니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한다. 박사가 별것이간디. 학문에 정진하여 박사는 되지 못했지만 다들 인생에 정진해서 70 가까이 이르렀지 않은가. 경험이 풍부한 인생의 박사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나는 한 때 ‘이 몸이 죽고 죽어’파였는데 요즘은 ‘이런들 어떠하리’ 파라고 킬킬댄다. 나이 들다 보니 눈도 침침하고 가는귀도 먹고 삼라만상이 희미해진다. 그냥 세월의 파도에 맡기고 살아간다고나 할까.
목포에는 나보다 열 살쯤 아래 동지가 많다. 그들도 곧 퇴직하여 인생 박사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발을 받쳐놓고 그들이 ‘화백회’에 들어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사는 날까지 함께 꺼떡꺼떡 살아보더라고.
동지는 간 데 없고
어차피 누구나 한 번씩 가는 길이지만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들을 회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나와 함께 전교조를 시작한 동지들은 대부분 간 데가 있어서 언제나 맘만 먹으면 만날 수 있지만 간 데가 없는 동지들, 불러도 대답 없는 동지들이 벌써 여럿이다. 인생무상, 나무관세음보살, 인샬라.
그 중에서도 망월동 묘역에 누워 있는 고 엄익돈 동지의 묘소에 가면 더욱 애달프고 죄송하다. 우리는 1989년에 해직되었지만 엄 선생은 ‘해직교사 원상회복’ 전남 추진위원장을 맡았다가 1992년에 해직되었다. 세상에나! 해직당한 사람 복직시키라고 외친 사람을 또 해직시키다니 얼마나 심기가 불편하였을까. 그는 해직 후 전남지부에 상근하다가 1994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우리는 해마다 4월이면 그의 묘소에 참배하고 참교육의 대동 세상이 올 때까지 고인의 뜻을 받들어 더욱 가열차게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여수 동지들은 해마다 공들여 제수를 마련해온다. 나는 말려서 찐 참돔이나 서대 안주에 음복을 하면서 왈칵 치미는 설움을 주체하지 못한다. 참으로 4월은 잔인하고 서러운 달이로구나.
우리는 고 엄익돈 동지의 추도식이 끝나면 또 잠시 자리를 옮겨 고 윤영규 위원장님의 묘소를 참배한다. 평범한 교사로 살기를 거부하고 5.18 의거에 참여하고, 전교조 깃발을 앞장서서 흔들다가 옥고를 치르신 분, 굴곡 많은 대한민국 역사에 엄정한 역사의 한 매듭을 분명히 지으신 분, 이제 망월동에 고요히 누워계시니 새삼 그립고 목이 멘다.
망월동 묘역에는 또 고 조준승 동지가 누워 계신다. 여수의 윤양덕 선생, 무안의 장제술 선생, 목포의 윤보현 선생, 하나둘씩 동지들이 떠나갈 때마다 문득 나는 허전하고 쓸쓸해진다.
부록 17 (주간 목포시민신문 ‘목포 읽기’)
창공에 빛난 별
교사들도 봉급을 타니까 근로소득세를 낸다. 어림잡아 총수입의 5 내지 10 퍼센트 정도. 나는 정년퇴직이 가까워질수록 꽤 많은 세금을 냈다. 부양가족도 별로 없고, 종교단체 기부금도 없고, 의료비 감면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세금 많이 내는 것을 조금도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학비 들어가는 일도 없고, 종교 안 믿으니까 시주나 헌금할 필요도 없고, 감면 받을 만큼 의료비 들지 않았으니 건강해서 좋다. 그러니 세금 많이 내는 것이 사실은 가장 싸게 먹히는 셈이지 않겠는가.
나와 가깝게 지내는 변호사 한 분이 있다. 목포에 사무실을 차린 지 스무 해가 다 되어 간다. 그분은 전교조 초창기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교조뿐 아니라 항상 소외당하고 핍박받고 억울하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앞장서서 변호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 변호사는 ‘창공에 빛난 별 - 산타루치아’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밤하늘에 요요히 반짝이는 별 우러러보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분에게 ‘별호사’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분이 미국에서 사온 배율 높은 고성능 망원경 덕분에 달도 구경하고 금성 화성도 구경하고 은하수나 견우성 직녀성도 구경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50년 만에 한 번이나 볼 수 있다는, 달과 목성이 가까이 접근한 장면까지 구경하는 행운을 누렸다. 세상에! 그냥 육안으로 보는 달하고, 망원경을 통하여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는 달하고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신세계를 접한 듯 진한 감동이 찌르르 밀려왔다.
우리의 고향은 목포이지만, 우리들의 원초적인 고향은 은하우주의 중심부이거나 카시오페아자리 안드로메다자리 넘어 몇 억 겁, 몇 억 광년 떨어진 빅뱅의 현장일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이기지 못하여 대폭발을 일으킨 우주의 재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일상에 쫓긴 보통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볼 줄도 모르고, 높고 낮은 곳에 총총히 들어박혀 깜박이는 별들을 우러러보며 삶의 시작이나 끝을 곱씹을 틈도 없이, 허겁지겁 땅만 내려다보고 살아간다. 별호사의 망원경은 보통사람들의 허둥거리는 일상에 던지는 통쾌한 일격이나 다름없다. 모름지기 우리들은 가끔씩 하늘의 별들을 우러르며 삶의 시원에 대한 깊은 통찰과 명상에 잠겨야 할지도 모른다.
별호사는 벌써 십 년 넘게 몇몇이서 동아리를 만들어 대학교수를 모셔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사서삼경 강론을 듣는다. 또 노동형제들과 함께 노동법을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요즘에는 또 법전 연구 등에 필요하다고 그 어렵디 어려운 라틴어를 공부 중이다. 바빠서 그만두었지만 광주 모 대학에도 잠깐 출강했고, 법률관계 저서도 여러 권 째 펴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연구와 연마로 심신을 가다듬는 노력은 누구나 본받을 만한 점이다. 그분은 또 재단법인을 만들어 목포시내의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들 몇 십 명에게 정기적으로 꾸준히 장학금을 대주고 있다. 나보다 나이는 적지만 ‘후생이 가외’라고 그분의 부지런하고 겸손하고 올곧고 다사로운 인품 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진다.
일반적으로 변호사들은 꽤 소득이 높은 편이다. 변호사이니까 절세의 방법을 누구보다도 훤히 꿰뚫고 있을 법하건만 별호사는 소득을 털끝만치도 감추지 않고 성실하게 신고하여 꽤 많은 세금을 국가에 바친다. 별호사가 항상 목을 꼿꼿이 세우고 보무당당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원초적인 힘도 어쩌면 성실한 세금 납부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또는 소득이 많은 사람일수록, 별호사처럼 성실 신고로 세금을 제대로 낼 때가 온다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뇌물을 주고받는 풍속마저 사라진다면야 물론 더 바랄 나위 없이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가 될 것이다. (2009. 6. 2)
부록 18 ( 주간 목포시민신문 ‘목포 읽기’)
우리 시대 마지막 교사
나는 고 선생님을 우리 시대의 ‘마지막 교사’라고 일컫는다. 우리 다음 시대에야 또 뛰어난 교사들이 얼마든지 나오겠지만, 내가 교직에 몸담았던 지난 40년을 되돌아보면 고 선생님보다 더 훌륭한 교사를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보다 열 살 위니까 올해 일흔넷, 고 선생님은 십여 년 전에 정년퇴임하신 후 해남 문내면 시골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산자락에 조립식 주택을 짓고 너른 텃밭을 일구며 살고 계신다. 무 배추 양파 마늘, 당신께서는 해마다 못난 후배 교사를 잊지 않고 손수 가꾼 무공해 농작물을 택배로 보내주신다.
그분과는 두 번에 걸쳐 목포여중과 우수영중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다. 그분이 과학 수업을 하는 교실을 지나가다 보면 항상 조용하고 차분했다. 교사의 목소리도 졸린 듯 느리고 잔잔했다. 나는 한창 웃고 떠들고 뛰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한 사춘기 학생들이 왜 그림자처럼 조용하고 닥수굿이 앉아 있는지 의아했다.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나는 고 선생님의 교육 비결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지만 해답을 얻는 데에 십 년 이십 년이 걸렸다.
첫째로는 사랑이었다. 학생들은 고 선생님이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골고루 한결같이 사랑해 준다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둘째로는 정성이었다. 고 선생님은 과학 실험기구 상당 부분을 손수 만들어 썼다. 다른 학교로 전근가면 예전 학교에 다 놔두고 다시 만들어 썼다. 그분의 손은 여러 가지 폐품을 자르고 토막 내고 구부리고 그라인더로 갈고 산소용접기로 지지느라 긁히고 찔리고 베이고 찧고 멍들어서 성한 곳이 별로 없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온갖 정성이 자기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잘 깨닫고 있었다.
셋째로는 봉사와 헌신이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도 안경테가 망가지면 과학실로 달려갔다. 고 선생님은 기꺼이 드라이버로 나사못을 돌리고 펜치로 테를 잡아 비틀어 번듯하게 고쳐주었다. 교실 자물쇠를 못 열면 만능열쇠로 끌러 주고, 또 어느 교실 청소함 문짝이 떨어져나가면 지체 없이 연장을 들고 출동하여 ‘만년묵이’로 튼튼하게 고쳐주었다.
넷째로는 근면이었다. 점심 식사 후에는 과학실 모퉁이 소파에서 잠깐 코를 곯았다. 그 시간만 빼면 하루 종일 무언가 움직이고 계셨다. 퇴근하면 또 농사일 등으로 쉴 틈이 별로 없었다.
다섯째로는 탄탄한 실력과 폭 넓은 교양이었다. 과학과 전문 지식은 물론이려니와 인생 전반에 걸친 교양과 식견을 두루 갖추었다. 나는 그분에게 서예를 배웠다. 글씨도 잘 쓰고, 트럼펫도 잘 불고, 바이올린으로는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였다. 해외여행도 많이 다니고 성당에도 열심히 다녔다.
여섯째로는 건전한 가치관 인생관이었다. 그분은 혹시라도 부자유스러운 멍에를 짊어질까 염려하여 일찌감치 승진을 포기하고 평교사로 일관하였다. 그분은 이웃들과의 대화와 정담을 무척 좋아했다. 학생들의 재잘거림에도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교사들의 일상사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 번 태어났다 한 번 가는 인생 - 제자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겸허하게 정성껏 부지런히 손발을 놀려서 이 세계에 무언가 끊임없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이야말로 이웃은 물론이려니와 스스로에게도 기쁨의 원천임을 그분은 너무나 잘 깨닫고 있었다.
건강도 교사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분은 늘 건강하셨다. 하기야 항상 바쁘게 움직이니 아플 틈도 별로 없었다. 소싯적부터 평행봉과 태권도로 단련한 몸인지라 지금도 팔뚝 알통이 나보다 서너 배는 굵다.
부끄럽고 부끄러워라. 나는 그분을 조금이라도 닮아보고자 노력했지만 발뒤축에도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고결하고 아늑한 영혼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요즘 일제고사다 교원 평가다 성과급이다 해서 모든 것을 수량으로 계측하려는 풍조가 만연하는데, 교육의 질이나 교사의 자질은 수량이나 점수로 헤아리기 어려운 영역이 너무나 많다. 나는 점수보다는 교사의 감화력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교사의 고결하고 다사로운 영혼만이 학생들의 순수한 영혼을 한층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오늘도 팔을 걷어붙이고 텃밭에서 땀방울을 흘리고 계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사표 고 선생님을 흠모하고 간절히 그리워한다. (2009. 9. 29.)
맺는 말
선친께서는 날더러 ‘얼멩이체’ 같다고 한탄하셨다. ‘얼멩이체’는 건축자재로 쓰일 모래자갈을 거르는 데 쓰인다. 자잘한 모래나 자갈은 체 밑으로 빠져나가고 종잇조각이나 검부러기만 체 위에 남는다. 되돌아보니 내 인생에는 검부러기만 남았다.
나는 허무를 너무 일찍 배웠다. 나의 삼대할머니와 작은할아버지께서 나주 금성산 중턱에 산가(山家)를 짓고 나무에 금물 입힌 불상을 모시고 살았다. 물론 노년이긴 했지만 그분들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으셨다. 그냥 사는 날까지 조용히 사는 것이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죽음을 예비하는 것에 불과했다. 자정이 넘도록 두 분은 등신불처럼 우두커니 마주 앉아 장죽을 빨고 계셨다. 낮이면 나는 금성산 어느 봉우리에 턱을 괴고 앉아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새록새록 반추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허무롭다.
그래서 나는 ‘까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이라는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술, 당구, 바둑, 낚시, 화투,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 피아노, 하모니카.......오늘을 즐기다보니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걸렸다. 이제는 죄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얼멩이체에 검부러기도 별로 남지 않은 것 같다.
그 보잘것없는 인생에서 그래도 전교조가 나를 구원했다.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데 전교조를 하다 보니 좋은 사람들, 좋은 교사들을 무더기로 만나게 되었다. 특히 곤궁하고 핍박받을 때 만나서 더욱 좋다. 이해관계로 만나지 않고 추울 때 믿음으로 만난 사람들이라 오래오래 우정을 쌓을 수 있어서 얼마나 진실되고 흐뭇한지 모른다.
우리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천지사방 둘러봐도 침 뱉을 곳 아무데도 없어야.” 그랬다. 나는 평생을 가족과 친지들의 도움만 받고 살아왔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이번의 ‘동지는 간 데 있고’라는 글과 사진도 내가 은혜를 입은 여러 동지들한테 부족하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조그만 뜻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눈물 나게 정겹고 아름답다. 동지들의 앞길에, 전교조의 앞길에 기쁨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동지는 간 데 있고’ 끝)
첫댓글 참 즐거웠던 옛일이 선생님 곁에 붙어서 봄이고 새싹입니다. 넓은 선생님의 원 속에서 간혹 제가 부분집합으로 만나 연보랏빛이든 무지개빛이든 퍼지니 무대가 참 어여쁩니다. 사람을 놀라게 하고 사람을 깨닫게 하고 사람을 바로 세우는 힘은 선생님처럼 우리를 알아주고 추어주고 빛내주고 하는데 있는 것이구나 새삼 또 배웁니다. 마음만은 선생님 아래서 잔뿌리요, 생각만은 선생님 위에서 꽃봉오리가 되겠습니다. 아름다운 글 자주 보여주세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배시시 배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