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멀씀(2022.3.6.) 말씀/ 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의 복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오늘은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째로 평화의 복을 다루신데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일곱은 완전 수입니다. 이는 화평의 복이 최고의 복임이며, 화평케 하는 자야말로 가장 온전한 자임을 말해주고자 하시는 것 입니다. 화평(평화)이란 히브리어 샬롬과 같이 쓸 수 있는데 이는 개인의 안녕 혹은 국가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평화를 최고의 선이요 복으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화평은 예수님이 이제까지 말씀하신 모든 천국의 복들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혼자 행복하고 화평을 누리는 것은 반쪽입니다. 이제 나를 넘어 화평케하는 자로 살아갈 때 비로소 완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최고의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그럼 화평케 하는 것이 왜 최고의 복이 됩니까(9b)?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십니다. 이제까지 다른 복들은 다분히 보상적인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가 되면 ...이런 복을 받을 것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자는 천국을 얻을 것이요.. 받을 것이요..”.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존재의 복입니다. 아들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의 자화상이요 상속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자화상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와! 아들이란 존재는 무엇을 안 해도 그 존재만으로도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큰 축복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닮은 인간을 위해 행복의 에덴동산을 창설해주시고 온갖 좋은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함께 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아들이 죄를 짓고 타락했을 때도 아버지의 사랑은 변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책임지시고 아담과 이브를 위해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입히셨고, 화염 검을 두어 에덴 동산을 지키게 하시고, 여자의 몸에서 날 구원자를 약속하시고, 때가 되자 사랑하는 아들 독자 예수님을 실제로 보내주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위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구원의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라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기계나 종이라면 이럴 수 없습니다. 로마서 8:15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아들이란 존재는 바로 이런 특권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아들이란 존재라면 왜 다시 화평케하는 자라야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고 합니까? 아들은 조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이유를 오늘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두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탕 자는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그리고 주린 후에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15:18b).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리고 스스로 품군이 되고, 거지가 되어 돌아갑니다. 아들이면서도 스스로 보기에도 아들이란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탕자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 아들을 맞이하고,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소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아들 생각과 달리 아들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그대로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모든 아들의 지위를 그대로 회복시켜주십니다. 왜 죄를 짓고 나뿐 짓만하고 아버지를 속썩인 자인데 이렇게 대우합니까? 집에서 착실히 일만 했던 맏아들도 항의를 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4). 종이라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곤장을 때리고 엄한 형벌에 처했을 것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란 바로 이렇게 잘하나 못하나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아멘!
러시아 뻬테르부르크의 이르미타즈궁에 렘부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헨리누웬이 그 그림을 보고 영적 감동을 받아 책 한 권을 썼습니다. 탕자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너덜너덜한 속옷에 한쪽 신을 달아 뒤꿈치가 모이고 한 쪽은 맨발로 아버지 품에 꿇어 기대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옆에는 형을 비롯하여 네 명의 구경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애로운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오른 손으로는 따듯하게 아들을 품고, 왼손은 크게 벌려 아들을 감싸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광이 돌아온 아들의 등과 아버지의 두 손을 인상 깊게 비춰줍니다. 헨리누웬이 에르미타즈 박물관에서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온 종일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을 감상을 하고 ‘탕자의 귀향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실 그림 속에 탕자가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행복해 하는 존재입니까? 이제는 아버지 집에 거하면서 늘 안도의 숨을 쉬며 참 평안을 누리는 존재입니까? 아버지 집의 소망으로 모든 절망을 극복하는 존재입니까? 이런 아들 됨을 누리고 있습니까? 물론 대답을 안 해도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는 아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들이라고 다 아들 됨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자는 아들 됨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도 아들 됨을 누리지 못하고, 서자 출신도 아들 됨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아도 아버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아버지와 관계성이 파괴 되어 있는 사람은 아들 됨의 영광과 특권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이 그 비밀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들됨의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가장 잘 누린 분이 예수님 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 3: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마 17:5). 예수님이 이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화평케하는 일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화평의 일을 이루셨습니까? 엡 2:14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 이신 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예수님은 자기를 치는 로마군인들과 싸우지 않으시고, 사람들과 사우지 않으시고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못 막히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허시고 원수 관계의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의 피로 인하여’입니다. 로마서 3:25절은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그래서 예수의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 하는 것 입니다. 과거에 화목 제물로 짐승의 피가 필요했던 것처럼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해서 피 흘리는 희생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 -6). 화평케 하는 일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신 가장 위대한 역사이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며 따른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화평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들입니다. 부족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아들 됨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화평케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롬 5:1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성 파괴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과 관계성 회복이 필요합니다. 고전5:18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화평케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화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은 죄 때문입니다. 시기 미움, 살인 강도 간음, 투기 욕심,거짓 죄 없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화평할 수 있습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피로 화목하는 것입니다. 히 9:14을 보십시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나를 위함임을 믿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다시 관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184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이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여러분,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재판정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피고이고 예수님은 원고이십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의 재판관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권고하십니까?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재판장에게 넘겨지면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마5:25,26절).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자리에 가기 전에 예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관계회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막혀보세요. 인생 문제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 않습니다. 생명문제, 풀리지 않습니다. 죄문제, 풀리지 않습니다. 장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막히는 것입니다. 목자님과도 막히고, 동역자와도 막히고, 자녀들과도 막히고, 사람들과도 막히고, 심지어는 지나가는 개나 돼지 소와도 관계가 막힙니다. 그냥 놔두지 않고 두둘겨 팹니다. 관계성이 끊어져서 산다는 것은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일입니다. 관계성 단절, 그 자체가 전쟁이요 지옥입니다. 잠언을 보십시오. 다투는 여인과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났다고 합니다(잠21:9). 그러나 관계성이 풀리고 화목하면 반대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행복합니다(잠언 17: 1). 하나님과 관계가 풀리면 가락지를 끼우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신분이 회복되고 다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해야할 급하고 중한 일들이 많지만 먼저 하나님과 관계회복에 힘써야 합니다.
둘째는 화평케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히 12:14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면 이제 우리도 마땅히 화평케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과 원수 관계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불안하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람들과 화목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5:19절을 보면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영광스러운 직책을 주셨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화목케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된 이후 세상은 원망 불신, 미움 시기 다툼 전쟁이 그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폭력, 총기난동, 전쟁, 사기 강간, 자살방조 싸이트가 극성을 떨치고 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국가 민족 국가간에 싸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보십시오. 끊임없는 비방 거짓, 김누리 교수 책을 보면 대한 민국 갈등 구조 지표 최고라고합니다. OECD 30 개국 중 한국의 갈등지수 3 위로 2021년 3월,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한국은 ⓪보수와 진보 (85.4%) ⓪빈곤층과 부유층(82.7%) ⓪노인층과 젊은 층 (60.9%) ⓪남녀 (48.8%) 등의 분야에서 최고의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기구(OECD)가 30개국의 갈등지수를 산출한 결과, 멕시코(69.0%) 1위, 이스라엘(56.5%) 2위, 한국은 55.1%로 3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 구조는 이익 관계로 생기기 때문에 희생적 중재 없이 저절로 평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는 인간을 화목하기 위해서 짐승의 피를 흘렸고, 예수님 역시 어린양으로 화목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롬 3:25 ). 화평하는 역사에는 반드시 화목 제물 희생이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킹은 흑인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가족들과 함께 희생을 당했습니다. 흑백인종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투쟁한 만델라는 27년간이나 옥중생활을 하였고, 민주 투사 김대중은 반대 당에 의해서 수없이 고문을 당하고 태평양 바다에 던져지는 찰라에 구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화평케 하는 아름다운 역사의 이면에는 이처럼 엄청난 희생과 죽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가 비워지고 육신이 죽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화평케 하기 위해서는 희생적인 섬김이 필요합니다. 원수관계가 풀리려면 누군가가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쏟아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 물질, 시간 모두가 하나님과 화평을 위해 드리는 희생 제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희생 제물을 받으시고 양들 가운데 화평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몸으로 드리는 제사,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 제사라고 하였습니다(롬 12:1 )
요즘 로마의 원대식 서교사님, 유숙영 선교사님이 아침 큐티를 나누면서 말씀 묵상 신앙과백과 간증을 보내오는데 아주 은혜가 있습니다. 어려운 생활고 가운데 있는 양들이 물도 안 나오는 컨테이너에 사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며 돕고자 애를 쓰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에 더 돕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한 백만원 선교지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렵지만 오히려 하나님 잠잠히 바라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신다고 댓글을 보내들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김재중 집사님이 청계에 넘어왔는데 ddirl 나누다가 어머니 남기고 가신 통장에 얼마의 돈을 형제들이 나누었는데 100만원을 의미 있게 쓰기 위해서 주님께 헌금한다고 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들어 로마 선교지원금으로 보냈습니다. 두 분은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로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카톡이 왔습니다. 헌금을 보내고 나서 보니 우리 우주교회가 로마에까지 선교지원할 수 있는 것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또 빈첸초 형제는 얼굴 한번 보지 않았지만 우리 형제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돈도 써복, 좋은 물건도 사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즐겁게 놀아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면 한 영혼을 희생적으로 섬겨서 화목케 하는 일을 하는 것만큼 귀하고 보람된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저도 여러분도 세상 사는 날 동안 세상상에 가장 아름다운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최고의 복도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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