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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는 나누고 있는가?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5장)
기름과 달란트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관한 묵시적 말씀인 마태복음 24장에 이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세 개의 비유가 25장에서 전개되는 중입니다. 세 비유에서, 주님의 오심은 결혼 잔치(25:1-13)이고, 멀리 갔던 주인의 돌아옴(25:16-20)이며, 마지막 심판(25:31-46)입니다. 지난주에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이 가진 ‘기름’에 주목하면서, 남과 나눌 수 없는 온전한 마음인 기름이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충분한지를 물었습니다.
두 번째 비유를 읽는 오늘, 타국으로 오래 출타한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이 가진 ‘달란트’에 초점이 놓입니다. ‘기름’이 겉으로 확인되지 않는 내적 진정, 관계, 사랑과 같은 것이라면, ‘달란트’는 주고받는 물질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화(財貨)의 성격을 지닌 지식, 재능, 양식 등을 달란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탤런트(talent, 재능)”로 정착된 달란트의 중요한 특성은 “주고받음”에 있습니다. 기름은 (신랑을 비롯한) 누군가로부터 얻어낼 수 없는, 나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것이라면, 달란트는 주인에로부터 받은 것이며 나누거나 다시 돌려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과 성취로 갖게 된 무엇이 아니라, (신을 비롯하여)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점에서, 달란트는 선물(은혜)의 속성이 짙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다 (14-15)
당신이면 어떻습니까? 먼 여행을 떠나는 주인으로부터 재산을 받아 맡게 된 세 명의 종 중의 한 명이 당신이라면요? 주인은 어떻게 하라는 한 마디의 지시도 없이 당신에게 달란트(당시 남자 노동자의 일당을 한 데나리온이라 할 때, 한 달란트는 15-20년의 임금에 상당)를 느닷없이 맡겼습니다. 타국으로 간 주인과 연통할 길은 없어, 달란트의 사용에 관해 주인과 상의할 수 없습니다. 귀환에 관한 어떤 기약도 없으니, 계획을 세우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 돈으로 사업이나 장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노련한 장사꾼들도 곧잘 재산을 탕진하는 마당에, 경험도 없는 종이 사업을 벌이는 것은 밑천을 털어먹는 첩경입니다. 장사해서 이윤을 남기라는 주인의 지시도 없었는데 굳이 위험한 사업에 뛰어들 필요는 없습니다. 실패해서 손해를 입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낭패이지만, 행여 사업이 잘되어 수익이 난다 해도 문제입니다. 그 수익은 누구의 것인가요? 수익을 주인에게 다 드리자니 아깝고, 이익 일부분을 내 것이라 한다면 도둑의 혐의를 받을 것입니다.
유대 사회의 교훈집인 미쉬나에 따르면, 지인으로부터 돈이나 귀중품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면, 땅을 파고 묻어놓았다가 돌려주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심 없이, 확실하게 부탁을 이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맡은 돈을 땅에 묻었다는 자체가 워낙 존경받을 결단이라서, 혹시 묻힌 돈이 도난당하더라도 변제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전통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에게서 받은 한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둔 종은 의인의 법도를 따른 사람입니다.
달란트로 장사하여 달란트를 남기다 (16-17절)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두 종은 각각 위탁받은 돈으로 장사를 시작합니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주인의 명령 없이 내려진 결정이었다는 점에서 논란의 소지가 될 행동이었습니다. 다행히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두 배씩 남깁니다. “남기다(kerdaino)”는 말은 ‘얻다’, ‘이익을 보다’는 뜻으로, 일차적으로 많은 금전적 이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장사해서 남기다’는 의미를 경제적 수익이 아닌 측면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타국에 간 주인이 그리스도이시고,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그분의 제자들이라는 비유의 가정 아래서는 더욱 다른 의미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복음서 어디에서도 예수께서는 경제적 활동을 통해 이득을 얻을 것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빛이다”고 말씀하셨지요(5:14). 앞선 비유에서도,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는 빛(등불)의 일을 합니다. 하나의 등불(빛)은 다른 등잔에 빛을 옮겨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빛을 나눠주고도 빛 자신은 없어지거나 작아지지 않습니다. 촛불도 그러하고, 햇빛도 그러합니다. 빛이 나누어질수록 더 많은 빛이 생겨날 밝아질 따름이며, 처음 빛이 소진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빛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달란트와 같습니다. 달란트로 일함(장사함)이 빛을 세상에 전함이라면, 그 장사는 언제나 남는 일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5:13)이라는 말씀으로도 같은 이해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녹은 소금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맛으로 스며든 것이며 음식 속의 짠맛으로 유지되고 있기에 탕진된 것이 아닙니다.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요12:24)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땅에서 썩은 밀알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생명이 되었기에, 언제나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남기는 사례입니다.
빛은 자신을 주어(장사하여) 빛을 남기고, 소금은 짠맛(소금)을 남기고, 밀알은 밀알을 남깁니다.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종들이, 세상의 자본가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가리킨다면, 그들이 달란트로 장사하여 달란트를 남겼다는 얘기는 빛과 소금과 밀알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두 종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그것을 주신 분의 뜻을 따라 사용했다는 얘기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21, 23절)
오랜 후에 주인은 돌아왔고, 종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주인에게 보고합니다. 장사했던 두 종은 각각 자신들이 남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가지고 와서 고합니다. 주인은 두 종을 똑같은 말로 칭찬하며 기뻐하는데, 주인의 만족은 종들이 두 배의 수익을 남겼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그들이 “충성스럽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충성됨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앞서, 충성된 종에 대한 모범이 24:45-46에 제시된 바 있습니다.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여기에 언급된 충성된 종은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의 재산상의 이익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에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일에 힘씀으로써 주인의 창고가 축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 종을 충성스럽게 여겨 자신의 소유 전부를 그에게 맡깁니다(24:47). 이 비유에서 보자면, 주인이신 하나님의 즐거움은 소유와 재산의 증식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어쩌면 달란트로 장사한 두 종이 손실을 보았더라도, 주인은 두 종을 칭찬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이 추정은, 만 달란트의 빚을 져서 주인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친 종을 탕감하는 임금의 비유(18:24-27)를 보더라도 이런 추정은 지지받습니다.
충성스러운 종들에게 주어지는 상은 두 가지입니다. 주인이 더 많은 것을 맡기리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21, 23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함이란, 이제 모든 수고를 끝내고 보상으로 얻을 축복이 아니라, 이미 신실한 종들이 달란트를 가지고 일하면서 누려왔던 그 즐거움입니다. 주인의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달란트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 즐거움이고, 그것으로 주인이 기뻐하실 일을 한다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이미 세 번째 종보다 더 많이 맡았고, 더 맡게 될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24-25절)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던 종도 자신의 선택을 주인에게 고합니다. 그는 주인을 굳은(skleros, 엄격한) 분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처럼 했다고 해명합니다(24절). 주인은 이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호통하면서, 그에게 있는 한 달란트를 빼앗고(28절) 어두운 데로 추방합니다(30절). 그런데, 악하다는 평을 듣는 이 종은 좀 억울하지 않을까요? 맡은 재물을 땅에 묻은 것은, 추호도 주인 것을 욕심내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두려워하는(24-25절) 종은 책망을 당하지 않으려고 돈을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종에게는 사심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주인이 원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은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악함”은 ‘불의의 저지름’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음’입니다. 나누어져야 하고 사용되어야 할 달란트를 묻어둔 것이 악함입니다. 그것은 “게으름”이었고 그 게으름이 악인 셈입니다. 이런 시종(始終)의 원인은 두려움에 있고, 마침내는 자신의 믿음대로 됩니다. 주인을 두려운 분이라 여겼더니, 궁극적으로 주인은 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용하지 않은 달란트는 빼앗깁니다(28절). 사용하지 않는 능력은 사장(死藏)되고 퇴화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굳게 지키려는 것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의 달란트를 지키고자 했지만, 끝내 빼앗기고, 자신도 버려집니다. 온전히 지켜져야 할 것과 사용하고 나눠야 할 것을 제대로 구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주인(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앎에서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과 풍성함을 신뢰하는 종은 받은 달란트를 기탄없이 사용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받은 것을 지키려 합니다. 만 달란트 빚진 종을 용서하는 주인은, 어이없게도, 한 달란트를 지켜드리려 했던 종을 심판합니다.
다하여 지켜야 할 기름이 있는가 하면, 주저 없이 나누고 사용해야 할 달란트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마음과 뜻과 사랑은 남과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 재물, 능력, 은사 등은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등잔에 기름을 충분히 보전한 이들이 결혼 잔치에 참여하게 되고, 맡은 달란트를 충분히 사용한 이들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합니다.
달란트란 다함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물을 따뜻하게 하고도 시들지 않는 햇빛처럼, 모든 이스라엘을 먹이고도 모자라지 않은 만나처럼, 다 비워지고도 다시 채워지는 사르밧 과부의 항아리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고를 채우고 지키는 종들로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창고를 열어 모든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 복무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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