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만에 영화 한 편이 뚝딱 만들어지는 광경을 본적이 있나? 독립영화 감독들이 그 도전에 나섰다. 유명 독립영화 감독이 연출하고 일반 지원자들이 스탭으로 참여해 만든 이 5편의 문제작은 인디포럼2007에서 상영됐다. 이틀간의 일정동안 따라잡은 영화현장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와 곳곳에 흥건한 열의로 질퍽거렸다.
“아, 도대체 언제까지 찍을 건데?” “30분 안에 끝내겠습니다!” “아까도 30분이라고 했잖아!” “아저씨!” “왜!” “죄송해요.” 훤칠한 체격에 투명한 눈망울을 가졌으나 별로 관대하진 않았던 페르시아 황제 모씨가, 천천히 두 팔을 벌려 “나는 관대하다”라고 내뱉었을 때 스파르타 군인들의 심정도 이랬을까. 테르모필레 협곡 대신 종로 한 구석 좁고 가느다란 골목길에서 벌어진 실랑이는 좀체 끝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교회로 통하는 골목 중간에서 단편영화를 촬영하고 있자니 관리인 아저씨가 질색을 하고 달려온 것이다. 크게 양보해 촬영을 허락하고 30분을 약속했는데, 기약한 시간이 다 지났으니 빨리 촬영 접고 떠나라는 말. 하지만 야속한 아저씨, 그 약속된 시간이 바로 3분 전이랍니다. 그는 조금도 관대하지 않았다. 아저씨를 겨우 안심시키고 나니 이번에는 그 옆 건물 교회 부속 유치원에서 아주머니가 뛰쳐나왔다. 애들 보는 앞에서 이게 시끄럽게 뭐하는 거냐는 꾸중이 이어졌다. 간신히 설득해서 아주머니를 들여보내자, 유치원에선 잠시 끊겼던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더 이상 내게 원하시면 안 돼요.”
4시가 가까워오자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니 PD-150캠코더의 뷰파인더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연기를 하는, 슬레이트를 똑딱이는, 골목 양쪽에서 행인을 통제하는, 오케이를 외치는 감독과 배우와 스탭들의 눈빛에선 흔들림을 찾아볼 수가 없다. 굳게 앙다문 입 주위로 번진 웃음마저 너무 강렬해서 그 위에 어떤 감정도 끼어들 새가 없어 보인다. 하나같이 뽕이라도 맞은 것 같다. 빨래판 복근도 없는 그들을 이다지도 굳건하게 지켜주는, 이 알 수 없는 열의와 연대감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들이 처음 만난 건 고작 이틀 전. 5분 분량 시나리오를 만들고 각기 맡을 파트를 정하고 콘티를 짜고 캐스팅을 마친 게 바로 어제다. 오늘 안으로 촬영을 끝내 편집, 시사까지 하는 사상 초유의 강행군이다. 이건 비밀인데 그들은 심지어, 아직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 나 원 참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잠시 시계바늘을 이틀 전으로 돌려보자.
첫 번째 날, 오리엔테이션
5월 7일 월요일. 서른 명 남짓의 인파로 미디액트 대강의실이 시끌벅적하다. 인디포럼2007과 미디액트가 함께 주관하는 영화제작 워크숍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다. 4월 13일부터 5월 6일까지 모집된 이들은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내일부터 독립영화 제작현장에 투입된다. 한국 독립영화계의 든든한 허리 역할을 하고 있는 김곡, 김선, 윤성호, 양해훈, 박동훈 감독이 각기 한 개 조씩을 인솔해 책임연출을 맡고, 5, 6명의 조원들이 제작부, 연출부, 촬영, 스크립터 등의 역할을 하는 식이다. 참가자들은 시나리오, 콘티 작성부터 소품 준비, 캐스팅, 로케이션, 촬영, 편집에 이르기까지 독립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속성으로 경험한다. 각 5분 분량으로 완성된 다섯 편의 단편 옴니버스영화는 인디포럼2007 폐막식 날 상영될 예정이다. 사실 말이 속성이지 거의 광속에 가까운 계획이다. 3일째 되는 날 촬영과 편집, 시사까지 하려면 반나절 안에 촬영을 모두 끝내야 한다는 의미. 5분 분량이라도 버거운 일이다.
비경쟁 독립영화축제인 인디포럼2007의 가장 중요한 의제는 ‘독립영화 보는 일은 일종의 의무, 부러 봐줘야 하는 것’이라는 강박에 빠져 독립영화가 타자화, 게토화되는 것을 지양하고, 그 재미와 즐거움을 관객과 온전히 나누자는 것이다. 이전까지 인디포럼이 상업 영화와의 대비를 통해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올해는 경계를 풀고 독립영화의 저변과 지류를 확장해나가는 것에 주안점을 뒀다. 인디포럼2007의 상임작가인 윤성호 감독은 “이제는 언론도 미덕 없는 독립영화까지 ‘독립영화니까’라는 이유로 감싸지 말고, 상업 영화보다 더 확고하고 날선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그런 맥락에서 바라볼 때 대중과 보다 가깝게 호흡하면서 독립영화 잠재관객을 확대하려는 목적의 이번 워크숍은 인디포럼2007의 정수를 담고 있는 핵심 프로젝트라 할 만하다.
여느 영화제의 집행위원장 격인 상임의장 이송희일 감독이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그도 원래 한 개 조를 맡기로 했었지만 전체를 총괄하는, 이를테면 교장선생님 같은 역할을 하기로 했다. 독립영화 전반의 상황과 역사, 제작과정에 대해 개괄하는 강의가 시작됐다. 다른 감독들이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라고 판단했는지 밖으로 하나둘씩 나가버리자 이송희일 감독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실은 지원자들의 프로필을 토대로 조를 편성하기 위해 나간 건데. 나중에는 곱게 앉아 취재하고 있던 애꿎은 기자까지 “졸지 않았냐”며 타박이다. 과연 교장선생님다운 자세다. 강의가 끝난 후 조 편성에 따라 나뉜 참가자들은 내일 아침 9시까지 시놉시스 한 편씩 준비해올 것을 기약하고는 각자 흩어졌다.
두 번째 날, 프리프로덕션
5월 8일 화요일. 해가 밝기 무섭게 미디액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가장 중요한 건 시놉시스 채택과 캐스팅, 콘티, 스케줄, 역할 주지, 편집 시 쓸 음원 등을 결정할 실질적 작전회의. 특히 조원들이 가져온 시놉시스 중 하나를 채택해 시나리오로 발전시키는 게 시급하다. 하지만 영화 경험이 없는 참가자들에게 ‘신 2개 이하, 역할이 있는 등장인물 3명 이내, 물리적인 일정에 맞으면서 개성이 보이는 시놉시스’를 하룻밤 만에 써오는 건 쉽지 않다. 결국 조원들이 써온 시놉시스의 특징들을 한 데 모으거나 아예 그 자리에서 의견을 모아 새로 창작하는 식으로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조 모임 사이사이에는 캠코더 사용법과 동시녹음 시 주의해야 할 사항 숙지 및 실습, 프리미어 프로그램을 이용한 영화편집의 이해에 대한 박흥열 촬영감독과 이정민 편집기사의 강의가 진행됐다.
조별로 모여 회의를 진행하는 각 팀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면서 재밌었는데, 감독들의 서로 다른 성격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사실 김곡, 김선, 윤성호, 양해훈, 박동훈 감독은 '독립영화계의 무한도전', 이라 해도 될 만큼 캐릭터가 또렷해 보인다. 김곡 감독이 노홍철이라면 김선 감독은 하하, 윤성호 감독은 박명수, 양해훈 감독은 정형돈, 박동훈 감독은 정준하라고나 할까. 물론 유재석은 이송희일 감독이다(하지만 그는 이날 일정 막바지에 모습을 드러내, 밥을 샀다).
각 조 분위기는 감독의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특히 김곡 감독이 이끄는 5조의 경우는 그 개성이 아주 도드라졌다. 1분에 한 번씩 터져 나오는 폭소는 5조 분위기를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요 전 날 첫 번째 모임에서 김곡 감독이 쉴 새 없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통에 조원들은 대화는커녕 서로 통성명도 하지 못한 터다. “통성명을 왜 하지 않았나, 앞으로 당신의 별명은 통성명“이라는 공격성 질타에 김곡 감독은 “우리는 관념과 형이상학의 세계를 떠나 실용과 즉자성을 추구한다”고 호탕하게 답했다. 그 대답마냥 5조의 작업속도는 가공할 만했다. 웃고 떠드는 동안(둘째 날은 조원들도 함께 대화하고 웃을 수 있었다) 어느새 콘티가 완성되고 각 담당 파트도 결정됐다. 캐스팅은 김곡 감독과 인연이 있는 두 배우를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고 광화문 국세청 주변에 헌팅까지 다녀왔다. 어차피 내일은 어느 한 조를 택해 촬영과정을 추적해야 하니 김곡 감독의 5조를 쫓기로 결정했다.
크랭크인한 날 크랭크업하기
대망의 마지막 날. 이들이 만들 영화 내용은 이렇다. 이빨이 닳아 더 이상 사람의 피를 빨지 못하는 뱀파이어 주인공은 아사 직전이다. 거리에 서 있는 여자를 물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고 심지어 무시까지 당한다. 한때는 이빨이 스치기만 해도 사람들이 추풍낙엽으로 쓰러졌는데. 숱한 인파가 오가는 광화문 거리 한복판에 벌러덩 쓰러져 있던 뱀파이어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결심으로 일어선다. 그러다가 골목 한 구석에서 틀니를 팔고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그거라도 구입해 사용해볼까 머뭇거려보는데. 제작진이 밝히기를 꺼려한 결말은 5월 16일 수요일 저녁 7시 30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인디포럼2007 폐막식에서 직접 확인해보자. 흐릴 것이라는 기상예보와 달리 예상 외로 맑은 아침 날씨다. 어제 헌팅해둔 국세청 뒤 숲길에서 첫 번째 촬영이 시작됐다. 카메라를 잡은 옥지원 씨의 눈빛이 진지하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 중인 그녀는 이틀 치 수업을 '째고' 워크숍에 참가했다. 앞으로 영화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 생각인데, 그에 앞서 좋은 기회일 것 같아 찾아왔다고. 뱀파이어를 무시하는 역할로 잠시 등장하는 제작부 스탭 윤효진 씨도 처음해보는 연기치곤 꽤 수준급이다. 평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서울아트시네마 인터넷 카페에서 이번 워크숍의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3일 휴가를 냈다. 날씨도 좋고 앵글도 좋고 다 괜찮은데 의외의 문제가 발생했다. 바람이 한 번 불때마다 나무에서 진드기 애벌레가 비 오듯 떨어져 인간의 육체에 뚫려 있는 구멍이란 구멍으론 다 들어가는 거다. 머리카락에 잔뜩 들러붙은 애벌레를 털어내다가, 법석 피우는 건 기자뿐이고 스탭들 모두 촬영에 몰입해 있는 게 미안해 가만히 섰다.
기어코 진짜 난관을 만났다. 뱀파이어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사용되는 날 선 송곳니 모형이 자꾸 입에서 떨어지는 것. 단단하기도 하거니와 딱히 접착될 만한 여지가 없어 난감했다. 결국 뱀파이어를 연기하는 배우 박지환 씨의 잇몸에서 출혈까지 일어나는 불상사가 생겼다. 그는 이번 인디포럼2007 개막작인 <유령소나타>에도 출연한 배우로, 요 전날 출연해달라는 김곡 감독의 전화를 받았을 때 “하도 크게 말해서 뭔 소리인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감독에 대한 굳건한 신뢰 하나만을 믿고 이번 워크숍 작품에 참여했다. 이빨 모형을 어찌 붙여야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풍선껌으로 조악하게나마 고정해두고 촬영을 계속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의 회상 장면에서 “이빨만 스쳐도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필요해 김곡 감독부터 취재기자에 이르기까지 카메라를 잡은 옥지원 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길바닥에 널부러지는 연기를 해야 했다.
정오가 됐다. 약속시간을 한참 어긴 여배우가 이제야 도착했다. 틀니를 파는 비밀의 여인을 연기하는 배우 장리우 씨는 과거 김곡, 김선 감독의 <정당정치의 역습>에서 ‘미녀 삼총사 1호’를 연기한 인연이 있다. 그녀가 등장할 신을 촬영하기로 했던 종로구청 앞 골목에 자가용들이 주차돼 있는 바람에 새로운 장소를 헌팅해야 했고, 이에 제작부 스탭을 담당한 김태련 씨와 홍순호 씨가 나섰다. 김태련 씨는 서른여섯 살로 팀 내 최고령이다.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다가 한국에 돌아와 단편영화를 만들어볼 계획을 하던 중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참여했다. 반면 홍순호 씨는 열일곱 살로 팀 내 최연소자다. 정규 학업을 그만두고 “남들과 다른 길을 모색해보기 위해” 여러 가지 기회를 실험해보고 있단다. 영화도 그중 하나다. 두 사람이 인사동 주변에서 최적의 장소를 물색해와 촬영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촬영이 조금씩 지연되면서 스크립터의 손놀림은 한층 바빠졌다. 감독의 분신 역을 자청한 허유진 씨는 팀 내 유일하게 영화현장 경험 소유자다. 학교에서 친구들의 영화작업을 도와준 덕에 프리미어 프로그램까지 다룰 줄 알아 편집까지 맡기로 했다. 최근 개인적인 어려움 탓에 심사가 복잡했던 그녀는 평소 흠모해오던 감독님과 함께 작업하면서 좋은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워크숍에 참가했다. 이제 이 골목길에서 5개 신만 더 촬영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모두들 흥분하는 듯 보였다. 다른 팀들을 걱정하는 여유까지 부릴 정도가 됐다.
독립영화 만들고 보기의 기쁨
과연 쉬운 일은 없는 법이다. 오후 들어 급격하게 나빠진 날씨와 예상치 못한 앵글상의 문제, 그리고 골목 끝의 교회, 유치원에서의 항의로 상황이 돌변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 정도 변수는 아무것도 아니다. 김곡 감독의 지휘 아래 스탭들은 연신 싱글벙글하며 촬영에 임했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오후 5시 즈음 크랭크업할 수 있었다. 지독한 황사비를 맞으면서도 “자, 끝났습니다”라는 감독의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5시까지 미디액트에 도착해 장비를 반납하고 후반작업에 들어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곧장 발길을 옮겼다. 과연 다른 팀들은 제 시간에 모두 돌아왔을까, 몇 팀이나 돌아왔는지 내기나 해볼까, 따위 이야기들이 오가는 동안 미디액트에 도착. 예상 외로 다른 팀들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다섯 개 팀 모두 무사히 약속시간 안에 촬영을 끝낸 것이다.
원 신 원 컷으로 5분을 모두 채운 양해훈 감독의 1조만 제외하고 모든 조가 편집작업에 돌입했다. 감독들이 일 대 일로 체크하는 가운데 늦은 시각까지 편집이 계속됐다. 결국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돼서야 조별 가편집본의 시사가 가능했다. 프로젝터를 통해 상영되는 자신들의 영화가 쑥스러운 건지 자랑스러운 건지, 쉬지 않고 폭소와 감탄이 터져 나온다. 여전히 통성명을 하지 않은 5조 역시 뱀파이어의 모습이 화면 가득 들어오자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인디포럼 작가회의의 바람처럼 이들이 앞으로 해마다 이어질 워크숍의 초석이 되고 향후 독립영화의 충실한 관객층으로 편입될 수 있을까.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그리고 자본의 구속 없이 순수한 열의만으로 이뤄낸 이런 작업들이 얼마나 크고 광활한 상상력으로 보답 받는지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표정은, 이미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듯 보인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공기는 벅찼고, 희망으로 가늘게 떨렸다.
사진 김병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