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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암자에서 하룻밤 (천장암 홈 페이지) 원문보기 글쓴이: 천장암
“신은 있나? 2600년 전부터 없다고 했다 종말은 오나? 거부나 기다림은 어리석다” |
[기고]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물음 대한 불학연구소장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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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1910~87) 회장이 타계하기 한 달 전에 천주교 신부에게 내밀었던 24개의 질문이 백성호 기자에 의해서 <중앙일보>에 공개되었다. 이 질문지는 1987년 박희봉(1924~88) 신부에게 전해졌고, 박 신부는 정의채 교수에게 전했다. 그 후 정의채 교수는 20년 넘게 질문지를 간직하고 있다 2년 전 제자인 차동엽 신부에게 전했고 드디어 차 신부가 여기에 답을 달았다. 무려 24년 만에 공개된 이 질문지와 답변을 불교계 인터넷 신문 <불교닷컴>기자가 나의 사무실로 들고 왔다.
24년 전의 질문이 이렇게 내 책상위에 놓인걸 보니 ‘이것은 무슨 인연인가’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이 질문들은 천주교 신부님에게 전달된 질문이지만 내게도 생소하지 않은 질문들이다. 나도 출가하기 전에 교회에 다녔는데 그때 내가 목사님에게 했던 질문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십대의 고등학생이 물었던 질문이 이제 출가자가 된 사십대의 내가 답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창조주에 관한 불교적 관점을 궁금해 하시는 분들에게도 이 답변이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답변의 어떤 부분은 나의 생각이지만 인용한 경전은 모두 초기경전인 ‘니까야’에서 가져온 것이다. 출처 표시 D13은 디가니까야 13번째 경이라는 의미이다. 질문이 많다보니 어떤 질문은 답변을 생략하기도 했다.
불교는 神 인정 않고, 답하는 것도 어리석다
답변을 달기 전에 불교의 기본 입장을 말해두고 싶다.
불교는 창조신을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신의 문제에 답을 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라고 본다. 신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붓다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인의 비유’를 들어 그 어리석음을 꾸짖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 어떤 사람이‘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소리치며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그 미녀가 어디에 사는지 물었다. 그는 그 미녀가 어디에 사는지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미녀의 이름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를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그녀의 키, 몸무게, 피부색깔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는 이 모든 질문에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다시 그에게 그녀를 한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 미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는 ‘그렇다네.’ 라고 말했다.
붓다는 “이렇게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바로 ‘나는 神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神을 알지도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확고하게 ‘나는 神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D13)
이것이 불교에서 바라보는 창조주에 대한 시각이다. 창조신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불교에서는 쓸데없는 망상에 속한다. 붓다는 神의 존재유무에 대한 관심은 지금 네가 직면한 고통을 소멸시키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충고한다.
물론 불교경전에도 많은 神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모두 탐진치를 가지고 윤회하는 중생으로 그려지고 있다. 불교에서 관심의 대상은 神이 아니라 인간이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4성제는 인간은 괴로움속에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성스러운 괴로움의 진리(dukkha ariya sacca)’이다. 그 고통의 원인은 ‘갈애’ 때문이다. 이것이 성스러운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이다. 여기에서 괴로움이란 성스러운(ariya) 괴로움이며, 진리(sacca)로서의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원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말은 ‘괴로움’과 ‘갈애’ 그 자체가 성스럽고 진리라는 것이 아니고 현실과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나타난 병과 그 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했을 때 치료가 가능한 것과 같다. 병이 완치될 수 있는 것처럼 ‘갈애’는 극복될 수 있는데 갈애를 소멸하는 방법은 성스러운 8정도이다.
8정도의 정념(正念) 수행은 일체의 전제(前提)를 두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흡에 대한 관찰은 ‘있는 그대로의 호흡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은 살아있는 동안 발견되는 자연스런 현상이지 생각, 개념, 이미지, 믿음이 아니다. 만약 호흡을 관찰하는 동안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은 즉시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 된다.
그렇게 계속되는 관찰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발견하게 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제행무상 諸行無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호흡이 관찰되는 그 자리는 선과 악, 여자와 남자, 기독교신자 불교신자라는 개념에서 자유로운 자리다. 단지 들어가고 나오는 호흡이 있을 뿐! 이러한 관찰은 개념을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개념이 들어 올 수 없게 한다.
이 방법을 꾸준히 실천하면 생각이 일어났다 소멸하는 과정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내 안에 있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관찰하여 지혜와 평화를 얻는 방법, 그것이 불교이다.
▲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생전에 천주교에 던진 24가지 질문과 차동엽 신부의 답을 보도한 12월 17일자 중앙일보.ⓒ중앙일보 지면 캡쳐 |
[24가지 질문에 대한 허정 스님의 답변]
1.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 불교는, 창조신이라는 단어는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것을 추구하여 창조해 낸 개념이라고 본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처님이 사셨던 2,600년 전에도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시대였다. 내 안의 영원한 것을 아트만(atman)이라 불렀고 밖의 것을 브라흐만(Brahman)이라고 불렀다. 부처님은 이것들이 사실이 아닌 개념일 뿐이라고 보고 아트만과 브라흐만을 부정하셨다. 이것을 무아(無我)사상, 연기의 법칙이라고 한다.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 이 질문에 대한 차 신부님의 대답은 불교와 비슷한 점이 있다.
“로고스(Logos)는 ‘존재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 요한복음서의 첫 구절은 ‘태초에 존재 원리가 있었다’가 된다.”(차동엽 신부)
그 존재의 원리는 연기법의 원리를 떠오르게 한다. 붓다는 연기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있다. 이것은 여래들이 출현하거나 여래들이 출현하지 않거나 그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S12:20)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 불교의 연기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한다’는 조건발생의 법칙이다. 다양한 조건에 의해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무한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진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불교는 진화의 시작 즉, 최초라는 시간개념은 설정하지 않는다. 최초라는 어떤 지점을 설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라고 본다. 불교의 시간관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수축과 팽창으로 설명하며 하나의 우주가 생성되었다가 파괴되는 기간을 겁(kappa)이라고 부른다.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 불교는 2,600년 전에 이미 창조신을 부정했다. 현대의 과학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 불교는 생명이 합성되고 무병장수의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이 평화와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과 생각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외부의 대상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환경이 인간의 행복에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한다면 설사 그가 천국에 있어도 그 천국은 지루한 천국이 될 것이다.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 이 질문에 대해서 ‘신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혹은 ‘고통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통로’라고 대답하는 것은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주의 깊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해 한 순간 잘못된 의도를 일으켜 악업을 짓게 된다. 신이 자유의지를 준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잘못된 의도를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자신 탓이다. 불교는 이 원리를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한다.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 차 신부님의 답변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인간이 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악인이 되었다고 한다. 자유의지를 준 신은 잘못이 없고 오로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린아이 손에 칼을 쥐어주고 어린아이가 다치거나 남을 다치게 한 것은 오로지 어린아이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그 상처를 입은 어린아이가 죽어서도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니 끔찍할 따름이다. 불교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죄를 짓게 된다고 한다. 그 자유의지를 신에게 받은 적이 없으므로 신을 탓할 수는 없다. 오로지 스스로가 주의 깊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해서 탐욕에 휘둘리고 분노에 압도되고 어리석음에 빠져서 악업을 짓게 된다.
7.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 6번과 같은 질문이다. 죄를 지을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고 죄를 지으면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 이것이 神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 구약성경은 1,000년 동안 사람의 입을 통해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이듯이 불경도 입으로 암송되어 오다가 불멸 후 500년이 지났을 때 문자화된 것이다. 그러나 불경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직접 들은 가르침이다. 그래서 경전은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what), 어떻게(how), 왜(why)라는 육하원칙에 따라 서술되고 있다. 이것을 전통적으로는 육성취(六成就)라고 한다. 불교경전에 나타난 2,600년 전의 생활 모습과 사상이 워낙 정확하기 때문에 고대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 인도에서 초기경전은 인도의 역사를 이해하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 “벼락이나 천둥이 칠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는다. 마취 직전, 수술대에 누운 이들도 기도를 한다. 무신론자도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한다.”라고 차동엽 신부가 언급한 내용들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신을 몰랐던 사람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신을 찾는 것은 단지 그들이 ‘신’과 같은 어떤 존재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위안이 필요하기에, 도움이 필요하기에 존재하는 신은 인간이 만든 신이지 ‘신이 거기에 있다’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본다.
무신론자가 위급한 상황에서 ‘신’을 불렀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언어가 발달하지 않은 원시시대라면 무엇이라 부르든지 그 이름이 ‘신’의 의미가 되었을 것이고, 현대의 사회생활 속에서는 무신론자라도 신이라는 단어를 모를 수 없기에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주 옛날에 벼락이나 천둥이 칠 때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노하여 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 보다 힘이 센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며 섬기기 시작했다. 그 힘이 센 존재들을 각자의 언어로 이름 지었다. 그것이 인간이 처음으로 두려움 속에서 만들어 낸 신이라는 개념이다.”라고...
원래 종교(宗敎)라는 용어는 능가경(楞伽經)이 중국에서 번역되면서 처음으로 쓰여졌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신(神)과는 무관하게 '훌륭한 가르침'이란 의미로 쓰여져 왔다. 19세기 말 서양 종교학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Religion을 번역할 때, 같은 의미의 동양문화권 용어가 없음으로 일본학자들이 불교 용어인 宗敎를 Religion으로 번역한 것이 처음이다.
현재의 백과사전에는 종교를 ‘특정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로 설명하고 있다. 국어사전에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종교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불교는 종교라고 말할 수가 없다.
10.영혼이란 무엇인가?
= “인간은 영원을 찾다가 자꾸 벽에 부딪힌다. 부딪힐수록 무한에 대한 동경은 커진다. 결국 동경하던 무한성에 ‘신’이란 이름을 붙인 거다. 그 무한성을 인격체로 여긴 사람들이 그걸 숭배하게 되고, 도움 받기를 청하는 거다. 자신이 그 벽을 넘어설 수가 없으니까. 결국 인간은 종교라는 터널을 통해 영원을 갈망하는 거다.”(차동엽 신부)
차 신부님의 이러한 설명을 들으니 앞에서 언급했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녀의 비유’가 떠오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문제는 현재에서 출발한다. 지금 여기에 보고 말하고 듣는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볼 때, 들을 때, 맛 볼 때...작용할 때 마음은 드러난다. 지금 여기에서 과거를 떠올리면 과거가 펼쳐지고, 미래를 그려 보면 미래가 펼쳐진다. 지금 여기 이 마음을 떠나면 과거도 미래도 찾을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늘 깨어있지 않으면 개념과 망상 속에 마음이 숨는다. 그래서 순간순간 깨어있는 것, 이것 말고 수행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영혼’이라는 생각도 ‘神이 있다’는 생각도 사실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선가(禪家)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사라지는 이것이 바로 생사(生死)’라고...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 나는 종교를 ‘자력의 종교’와 ‘타력의 종교’, ‘믿음의 종교’와 ‘이해의 종교’로 나누고 싶다. 불교는 ‘자력의 종교’이며 ‘이해의 종교’이다. 자력의 종교라는 것은 신이나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고 스스로 수행하여 깨닫는다는 것,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해의 종교’란 이해되지 않으면 모른다고 할지언정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물론 불교에서도 믿음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때도 믿음을 2가지로 나누어 사용하는데 하나가 ‘근거 없는 믿음’(amūlikā saddhā)이고 다른 하나는 ‘근거 있는 믿음’(mūlikā saddhā)이다(M95). 근거 없는 믿음이란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에 부응해서 생기는 믿음이고, 근거 있는 믿음이란 욕망 없이 사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생기는 믿음이다.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 천주교에서는 ‘천주교 밖에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가 그 후에 입장이 바뀌었다고 한다. 입장이 바뀌는 것은 대단한 용기라 생각되면서도 의구심이 든다. 시대에 따른 인간의 해석이 진실이 되는 종교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도 욕계, 색계, 무색계의 무수히 많은 천상세계가 있다. 그 천상세계는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 천상세계의 樂을 설명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그곳에 가라고 권유하지는 않는다. 그 세계도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존재들이 사는 윤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 차동엽 신부가 펴낸 <잊혀진 질문> |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이고 모든 종교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善)의 정의와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다르다. 아마 이것이 자신의 종교가 최고라고 주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불교에서 최고의 선, 최고의 행복은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 즉, 열반이라고 표현한다. 이 열반의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이라 하여 세속적인 행복과 구분된다. 궁극적인 행복은 믿음으로서는 성취하지 못하며 진리(眞理)를 본 자만이 경험하는 것이다.
최근에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불교계에서는 <종교평화 선언(초안)>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선언은 모든 종교는 공동善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소박함에서 출발하는 평화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본다면 각 종교에서 정의하는 행복의 의미와 행복에 이르는 길이 다르다고 본다.(이 글을 쓰는 이유도 다르기 때문에 쓰고 있다) 현실적으로 종교평화를 이루려면 각 종교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종교 간의 평화는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 불교는 인과의 법칙 차원에서 윤회를 말하고 있지만 윤회를 믿어야만 불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살아온 사람의 경우 ‘만약 다음 세상이 있다면 천당에 태어날 것이고 만약 다음 세상이 없다 해도 이 사람은 현생에 원한 없고 악의 없고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 것이다.’라고 설명한다(A3:65).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지은 행위 즉,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신(神)이나 절대자가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 불교에서는 인과의 법칙이 꼭 일정한 시간 안에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단기적인 것, 중기적인 것, 장기적인 것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원리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악인이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현상이 우리의 눈에 보이기도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과를 모르기에 악행을 지으면서도 두려움이 없다.
16.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명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 이 부분에 대한 차 신부의 대답은 불교와 비슷하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선인이 되기도 하고, 악인이 되기도 한다. 100% 선인도 없고, 100% 악인도 없다. 그 선택에 따라 부자는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다.”(차동엽 신부)
다만 불교와 다른 것은 자유의지는 누가 준 것이 아니고, 자신이 선택해서 나타난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7. 이태리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 세계와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인구가 많다고 좋은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온 나라가 불교를 믿는 국가에서도 사회혼란과 극악한 범죄가 나타난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게 종교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불교국가인 미얀마는 현재까지 47년 간 군부 독재에 시달리고 있으며 독재자는 불교를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종교와 정치의 이상적인 관계는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이라 본다.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 이해 없는 믿음은 맹목이어서 광신이 되기 싶다. 붓다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잘 믿어지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잘 믿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믿음은 항상 이해를 선두에 세우고 나가야 한다. 사람들은 신이 거기에 있어서가 아니라, 신이 거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신을 믿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 ; 폴랜드등 동구제국, 니카라구아등.
= 생략.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 기독교인들은 신을 믿는다. 만약 그들이 진실로 신의 전지전능함을 믿는 다면, 범죄를 저지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불교인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인과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면, 범죄를 저지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21. 로마 교황의 결정에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 “‘타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인데, 결국 수정했다.”는 차 신부의 답변에서 결국 무오류권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 불교의 독신 출가자 전통은 2,600년이 넘었다. 수행을 함에 있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많은 번뇌들 중에서 가장 첫 번째 로 나타나는 번뇌이다.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 생략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 모든 것은 변한다. 시간은 찰라의 연속이다. 그 변화의 어느 시기를 잡으면 생성이고 소멸이라 이름 할 것이다. 이처럼 변화의 어느 순간을 지칭하여 끝 혹은 종말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종말을 기다리는 것이나, 거부하는 것이나 모두 어리석다. 종말이라는 개념 속에 빠지면 ‘지금 여기’는 내팽겨 쳐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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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7005
첫댓글 위 대화가 현 시대를 이끄는 종교인의 모습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스스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니 다들 추측하는 말 뿐이고 부처님 말씀의 인용도 자기 생각을 정당화시키는 도구일 뿐이네요. 불교에 적을 두신 스님도 불법의 대의를 이해 못하시는 것 같고, 천주교에 적을 두신 신부님도 신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네요.
이러한 질문지와 답변에 물흐르듯님의 댓글 표현은 소모적인 논쟁만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박나무님은 직접 답변 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종교적 입장, 종단의 입장과 답변을 해야만 하는 예의적 차원도 같이 들어 있다고 보입니다. 질문지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되어 있으므로 각자 질문에 스스로 답변을 해보는 것이 더 좋을듯 합니다. 애초에 질문이 성립 안될 수도 있으므로 질문에 대한 반박도 있겠지만 질문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감안해야겠지요. 질문에 스스로가 답변을 해보는 것도...재미도 있을듯 하네요.^^
제 표현이 맘에 안드시나 보군요~ㅎ. 소모적인 논쟁은 시간낭비죠. 후박나무님의 입장이 개인의 사견을 넘어 불법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몇자 적어보았습니다. 질문에 스스로가 답변하는것도 좋은 방법인거 같아 조만간 정리하여 올려보겠습니다.
불법의 대의를 다 이해 했다면 부처일 것이고, 신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안다면 예수이거나 신 이겟죠.
사진발 너무 좋은대요.^^
달게 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후박 나무님의 간결하고 명쾌한 글을
잘 읽고 붓다의 가르침을 잘 배웠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
물흐르듯님/ 댓글이 길어지면 보기가 불편해서 새로 답니다.
표현이 마음에 들고 안들고 떠나서 답변 보다는 질문을 먼저 보아야 한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질문지 자체의 수준이 평이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불교는 형이상학적이거나 형이하학적인 질문에 붓다는 잘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알기 때문이지만, 요즘이야 답변을 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될 것도 없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호기심을 느낄만한 질문이기도 하다고 보이고, 그 시대의 정신 수준을 가늠할 수도 있다고 보이고, 그시대 사람이나 지금이나 정신적인 수준은 큰 차이가 없다.라는 것도 느껴지는 듯도 하고..그래서이지요.
그리고 후박나무님은 그러한 질문지에 초기불경에 입각해서 중도적인 표현으로 원론적인 점들을 무난하게 설명하셨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저에게 답변을 다라고 하면 썩 잘 달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이 성립되는지 안되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댓글을 달았던 것이지요. 질문의 수준이 곧 그 사회와 그 시대의 수준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보이기에. 시대의 차이가 있기에 '역시 누가 답하든...우문의 현답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보이지만'...답변 역시 그 시대를 벗어날 수는 없고, 그 시대 사람들의 수준을 벗어 날 수는 없다고 보입니다.
하여 답변은 그 시대에서 가장 앞서가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래야 기준이 생기니까요.
다만..각자 질문에 답을 해보면 자신의 생각을 살펴볼 수도 있는 것이어서 나름대로는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또는 모든 종교나 철학에서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는지를 살펴보면 더 명확하게 그 사유체계들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조금은 어설프고 난해한질문들이라고 보이지만, 그 시대에서는 해결이 안되는 문제였을 수도 있는 것이기에 질문을 했다라는 것 그 자체만은 긍정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불교에 대한 질문지는 아니었고, 불교라면 어찌 답할 것인가 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