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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와 이적의 부흥운동가 김익두 목사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아버지
흔히 알려진 것 것처럼, 김익두 목사가 교인이 되기 전 그렇게 험악하게 살던 깡패나 불량배는 아니었다. 비록 몰락양반 가문이었지만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해 과거에 수차례 응시하였지만 그 시절 서북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상업계에 진출하여 평양을 오가며 장사도 해보았으나 그것도 실패하여 좌절의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 술집과 기생집을 출입한 적은 있었다.
때와 환경이 좋지 않아 자기 꿈을 이룰 수 없었던 그가 마지막으로 기댄 곳이 종교였고 그래서 불교와 선도, 동학에 심취해 ‘참된 진리’를 찾아보려 애를 썼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먼저 믿은 친구 박태환이 “영생을 가르쳐 주는 종교가 있다.”는 말에 그의 인도를 받아 안악읍교회에 나간 것이 기독교인이 된 계기였다.
한번 믿기로 작정한 그는 예배당에 나가면서 그 좋아하던 술을 끊었는데 한번은 세상 친구들의 유혹에 넘어가 장연까지 가서 술에 만취해 집으로 돌아온 후 결심이 무너진 것을 괴로워하던 중 비몽사몽간에 ‘불덩어리가 가슴 속에 떨어지는’ 신비 체험을 하면서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 당시 1년에 한번 선교사가 내려와 세례식과 성찬식을 거행하였는데 김익두는 세례를 받기 위해 1년 동안 부부가 따로 방을 쓰면서 성스런 생활로 준비하였다. 그런데 예정된 주일 선교사가 내려왔으나 교인 중에 분란이 생겨 선교사는 세례만 주고 성찬식은 집행하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결국 김익두는 성찬을 받기까지 또 1년 간 ‘독방 생활’을 하며 기다렸다. 이런 믿음이었기에 그가 받은 세례는 물세례이자 동시에 불세례였고 그가 받은 성찬은 그리스도를 몸으로 모시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뜨겁고 경건한’ 신앙으로 선교사들을 감동시킨 김익두는 스왈른 선교사의 부탁으로 신천지방 개척전도자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이후 별세하기까지 신천읍을 근거로 전국적은 부흥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김익두목사가 본격적으로 부흥사역에 나세게 된 것은 1919년 삼일운동 직후였다. 온 민족이 나서 독립을 외쳤지만 일제의 잔혹한 탄압과 박해로 바랐던 독립은 얻지 못하고 대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교회당과 학교 건물이 불탔다. 좌절과 낙망의 시절이었다. 이 때 김익두목사의 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당대 문필가 김인서 목사의 설명이다.
“대정 9년[1920년] 여름이라. 길[선주]목사는 있지 않었다. 사람들은 새벽기도회에 모이면 회개하여 울고 슬퍼 울었나니 울고 울어 눈물의 집회가 되었고 낮 공부에 모히면 두려운 기운에 잠기었고 저녁에 모히면 웃고 또 울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힌 때문에 다수의 회중은 김[익두]목사의 말을 잘 듣지도 못하면서 김목사의 모양만 보고 웃고 또 울었다.”
김익두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는 웃음과 울음이 반복, 교차되는 특이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라 잃은 설움에 대한 울음이요, 그럼에도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기대감과 확신에서 오는 웃음이었다. 김익두목사는 그런 식으로 1920년대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였다. 그의 치유는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김익두목사 부흥운동의 특징은 ‘기사와 이적’이었다. 1919년 12월 현풍교회 집회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부흥집회에 참석했던 각종 병자와 환자, 불구자들이 고침을 받고 건강을 회복하는 이적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자 그의 주변 인사들이 ‘김익두목사이적명증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그의 이적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을 수집, 《김익두 목사 이적명증》이란 책까지 발간하여 “금일에는 이적을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는 당시 장로교회 헌법을 수정하려는 운동까지 벌였다.
김익두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치유를 받은 사람은 물론이고 은혜 받고 거듭난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신학자 김재준목사와 한국교회 대표적 순교자 주기철목사, 그의 대를 이어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이성봉 목사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런 식으로 김익두 목사는 일제시대 암울했던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다. 다만 일제말기와 해방 직후, 그리고 전쟁기간 중 불투명한 행적으로 그를 바라보던 많은 교인들을 실망시킨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2007. 1. 12. 교회연합신문)
나라 안팎 고통받는 이에 ‘사랑의 부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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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김익두 목사 서울 인사동 초입에는 100년이 넘은 교회 건물이 있다. 승동교회다. 3·1만세 운동 때 학생 대표들이 모여 거사를 숙의했던 역사적인 장소다. 김익두 목사(1874~1950)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못 이겨 그만둔 1938년까지 3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그 훨씬 전인 1920년에도 그는 승동교회에서 부흥회를 이끌었는데 그때 무려 1만여 명이 참석했다. 이 때 김 목사는 무려 2주일 간 금식하며 부흥회를 이끌었다. 예배당에 모두 들어갈 수 없어 마당에 멍석까지 깔고 앉은 참석자들은 그가 토해내는 열변 속에 함께 나뒹굴며 시대의 어둠을 뚫을 빛을 보았다. 과거낙방·빚보증으로 미치광이처럼 살다 승동교회 담임 박상훈(53) 목사는 “김익두 목사의 열정적이고 감동적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큰 은혜를 체험하고, 김 목사가 있는 현장에선 엄청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곤 했다”고 말했다. 김익두는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부잣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해 신동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탄탄대로의 소년을 단련시키려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했던 과거시험에 그만 낙방해 버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었던 익두의 낙방에 충격을 받은 부친이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그는 구월산 패엽사에 들어가 인생의 문제를 풀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산했다. 설사가상으로 친구의 빚보증을 서주었다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까지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그때부터 익두는 술과 기생에 빠져 타인에게 행패를 부리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장꾼들은 장에 가는 길에 성황당에 머리를 조아리며 “오늘은 제발 김익두를 안 만나게 해 달라”고 빌 정도였다. 그런 익두가 어느 날 장터에 나갔다가 서양 전도사가 주는 전도지를 받았다. 집에 돌아가 구겨진 종이를 펴보니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글을 본 순간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때마침 한 친구가 스왈렌 선교사가 이끄는 부흥회에 한번 가보자고 했다. 예전 같으면 콧방귀를 뀌었을 그는 친구를 따라나섰고, 비로소 예수를 영접하기로 했다. 그런데 오랜 습관에 물들어 있던 그는 얼마 못 가 다시 술친구와 어울려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게 됐다. 며칠 뒤 그런 삶으로 빠져들어선 안 되겠다는 자각이 든 그는 술을 마시던 기생집을 박차고 나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산속에서 가슴을 치며 밤을 꼬박 새면서 참회했다. 그리고 새벽에 돌아와 잠을 자던 중 비몽사몽 간에 큰 불덩이가 가슴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는 너무도 놀라 “어이쿠, 불벼락이야!”라고 놀라 소리쳤다. 안방에서 자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놀라 뛰어올 정도였다. 그 일이 있은 뒤 김익두에게 빠져나간 것은 남을 해치는 폭력심이었고, 그에게 들어온 것은 뜨거운 사랑이었다. 그는 교회에 나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했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100번이나 읽었다. 그 뒤 이번엔 깡패가 아니라 전도사로 장터로 나갔다. 그가 찬송을 부르자 과거에 그에게 수없이 맞은 원한을 가진 상인들이 그에게 욕을 하고, 심지어 와서 때려도 오히려 “나를 실컷 때려 달라”며 눈물로 회개했다.
그의 소문을 들은 인근 신천교회에서 그를 전도사로 청빙했는데, 막상 가보니 교인 한 명 없는 빈 교회였다. 그가 빈 교회에서 기도를 한 지 6개월이 넘어서야 절름발이 장애인 여성이 찾아왔다. 그는 그 장애인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뒤이어 남자 걸인이 찾아왔다. 그는 그 걸인도 잘 모셨다. 그 뒤 그가 어떤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차별 없이 진실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교인 한 명 없던 교회는 3년 만에 300명의 교인으로 부흥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가 이룬 부흥의 서막일 뿐이었다. 그는 만주,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776회의 부흥회를 이끌면서 나라 잃고 고통받으며 방황하는 동포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부흥회로 150여 개 교회가 생겨났고, 그의 설교에 감화돼 목사가 된 사람만 200여 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설립자인 장공 김재준과 신사참배를 거부해 순교한 주기철 목사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는 ‘고등 무당’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또 미신적인 신앙과 자의적인 성경 해석, 거친 언어 구사로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그 뒤 한국 교회가 이성을 결여한 지나친 성령주의와 전도주의로 빠져들게 한 사람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김익두가 낳은 치유와 부흥의 기적은 성공과 전도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개인의 회심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었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
20세 이후 청년시절에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싸움과 술주정을 일삼아, 인근 고을에서 '개망나니 김익두'로 불릴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27세 되던 1900년 봄에 김익두는 친구 박태환(朴泰煥)의 전도로 안악군에 있던 금산교회에 갔다. 여기서 그는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Swallen, W.L.)의 '영생'(永生)이라는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신약성서를 1년에 100번이나 독파하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변모하였다. 그후 1901년 7월에 김익두는 부인,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스왈렌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친구의 강권에 못이겨 술을 마시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뛰쳐나온 김익두는, 산에 들어가 대성통곡하며 회개기도를 하는 가운데 큰 불덩이가 몸에 떨어지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이 때 '가슴을 칼로 찢는'것 같은 성령의 내적 임재(臨在)를 경험한 그는 다시는 약해지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김익두는 1901년 10월 재령(載寧)교회 전도를 위해 헌신하라는 스왈렌의 권유를 받고 교역사업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스왈렌으로부터 전도실력과 신앙을 인정받은 그는 1903년에는 신천(信川)지역의 개척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신천에서도 그는 새벽기도, 신약과 구약을 하루에 각각 2장씩 숙독, 냉수마찰, 가정에서 하루 3번 예배 등 스스로의 원칙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항상 손에 성경을 들고 틈 나는대로 읽었으며, 길을 걸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습관이 생길 정도로 열중하였다. 김익두는 1906년 3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한 다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1년 어느 날 김익두는 마가복음 9장 23절의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는 말에 홀연히 확신을 얻고, 신유(神癒)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힘써 기도하다 마침내 신유의 기적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보혈에 의한 속죄, 회개에 따른 중생(重生) 체험, 부활과 천국의 영생복락 등이 중심이었는데, 설교에 나타나는 신비스런 능력과 매력에 청중들이 도취되었다. 1919년 가을부터 김익두는 서울의 남문밖교회에서 이재형과 함께 시무하였다. 이곳에서 김익두의 겸손한 태도와 기도생활, 능력있는 설교, 성경사랑과 해박한 지식 등이 믿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는 여러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1919년 10월 강동(江東) 염파교회의 사경회에서 본격적인 신유의 능력을 갖춘 그는 그뒤 많은 난치병을 고쳤다. 기록상에 나타난 최초의 이적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군 현풍교회 사경회 때 턱이 떨어진 박수진(朴守眞)이라는 걸인을 낫게 한 일이다. 이후 1920년 4월 영남지방 집회 때에는 많은 병자들이 치유받는 집단적 기적현상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그는 '권능(權能)의 사자(使者)'로서 전국에서 부흥회를 열면서, 도처에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을 일으켰다. 1920년 6월 31일 평양의 연합부흥회에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6,000여명이나 몰려 들었다. 이후 그가 제 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된 후 그 해 10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2주일간 열린 연합부흥회에는 연인원 1만여명이 참석하여 철야기도를 올리며 통회자복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김익두는 '신유와 기적을 수반한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걷고, 17년 된 혈류증 환자가 쾌유되며, 소경이 눈을 뜨는' 이적을 일으킨 인물로 소문났다. 한편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수족이요 자본주의의 주구로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반기독교운동을 벌이던 사회주의자들은 김익두 등의 부흥사들을 '고등무당'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22년 5월 9일자 동아일보는 김익두의 부흥회가 십자가의 정신을 체현하는 것보다 미설(迷說) 기적을 추구한다고 비판하는 사설을 썼다. 한편 황해노회에서는 1919년부터 임택권(林澤權) 목사가 중심이 되어 '김익두 목사 이적증명회'를 구성하고 3년동안 그를 통해 치유받은 자들의 신상과 기록을 사진과 함께 정리하여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1921.7)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를 근거로 황해노회는 1923년 총회에서 "금일에는 이적(異蹟)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고 규정된 장로교 헌법 3장1조를 수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 건의는 1924년 총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이 총회를 계기로 김익두의 부흥회는 고비를 맞았다. 총회의 '이적 불인정'은 그가 여는 부흥회의 의미를 감소시켰고 당시 교회내 지식계층이나 일반 사회주의계층의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반기독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김익두의 부흥운동은 급격히 냉각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사태를 주시한 그는 이후로는 병을 고치는 이적을 삼갔다. 1940년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익두는 일본경찰에 강제로 연행되어 교인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를 기독교인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선전자료로 삼았다. 그러나 1942년에는 신사참배에 적극 반대하다 종로경찰서에서 15일간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일제는 함구령을 내려 그를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직전리에 있는 과수원에 가두고 목사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했다. 광복후 북한에서는 1946년 11월에 어용기구로 기독교도연맹이 만들어졌다. 당시 김익두는 이 단체에 강제로 가입되었고 1949년에는 그를 기독교도연맹 총회장에 임명하였다. 이는 그의 제자이자 김일성의 이종사촌인 전 목사 강양욱(康良煜)의 강권과 감언이설에 의한 것이었다. 1950년 10월14일 새벽 김익두가 신천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후퇴하던 인민군이 난입하였다. 인민군들은 쫓기는 화풀이로 그를 총살시켰으며, 이 때 이를 말리던 신도 5명도 함께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교회정원에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29일 신천군 제직회 주최로 신천지역 50여개 교회가 모여 서부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무려 50여년 동안 김익두는 국내,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총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150여 곳에 새로 교회당을 세웠다. 또한 2만 8000여회의 감동적인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을 뿐만아니라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아울러 그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에 이르렀다. 그가 남긴 저작으로는 부흥회 설교 13편을 모은 '부흥회설교집'(1940년)이 있다. 김익두는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가로서 한국교회의 부흥회를 대표하는 '이적의 부흥사'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3·1운동 뒤 민족적 좌절을 겪고 사회변화와 각종 이데올로기의 대두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던 폐허의 한국교회에 영적인 재각성을 도모하여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며, 신유의 신앙운동으로 재기의 에너지와 열기를 주었던 목사였다. 아울러 그는 19세기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Moody, D.L.)에 비견하여 '한국의 무디'로 평가되었다. 또 안수기도로 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여 '과학을 초월한 불가사의를 행한 자' '신비의 잠을 깨운 자' 등으로 불리며 이후 한국교회의 독특한 부흥회의 전범을 마련한 영적 능력을 지닌 목사로 기억되고 있다.
/김 탁 <철학박사>
<사진>김익두 목사. |
김익두목사의 설교모음집 「성도의 즐거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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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CDNTV/ 이지폴] 최선교수 편저, 한국교회 제2의 성령운동 기대
이 책은 김익두목사가 일제의 압박 가운데서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아픔과 피곤에 찌들어 있을 때 철저한 성경 중심과 소망의 메시지로 생명을 걸고 강단에서 선포했던 설교 모음이다. 총신대학교 사회교육원, 칼빈목회연구원 연구교수인 최선목사는 김익두목사의 마음을 갖고 역사에 묻힐 뻔했던 설교를 정리했다. 최교수는 초기 한국교회에 부흥과 회개를 역설하고 신유의 기적을 현현하였던 생동감 넘치는 내용들이기에 지금의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읽어도 그 영적인 말씀의 깊이를 함께 공유할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한국의 초대교회와 같이 심령과 교회 부흥의 운동이 성령의 강한 역사를 통해 다시 회복될 수 있길 기대하며 이 책을 내놓았다. 또한 현대인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김익두목사의 메시지 핵심을 전달하려는 초점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기본 원고를 수정 보완했다. 최선 교수는 “한국교회 초기에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부족하고 심히 어려웠던 그 시절에 목회자로서 부흥사로서 전국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김익두 목사님의 설교집을 21세기에 대하게 되어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최교수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지금의 한국교회에 놀라운 부흥운동을 소망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면서 “성도들은 부흥의 염원을 담고 20세기 초 이 땅에 임했던 부흥의 역사적인 현장을 이 책을 통해 경험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성도의 즐거움」에는 서로 사랑하라, 성령을 받으라,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 기도의 종교, 십자가의 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등 총 17편의 설교가 담겨있다. 이와 함께 김익두목사의 출생에서부터 그의 업적에 대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김익두목사는 철저한 기도중심과 말씀중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역사와 임재를 갈망했고 또한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고 그대로 행한 인물이다. 총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설교횟수는 2만8천여 회에 이른다. 또 그를 통해 치유 받은 사람은 1만여명이며, 전도하여 믿고 목사가 된 사람은 200여명에 달한다. 한편 이 책의 서두에는 박신환목사(심곡제일교회)의 특별간증이 실려 있어 감동을 더한다. 박목사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배경을 비롯해 목회자로 결단하게 된 계기, 수많은 기적과 영적인 체험 등을 진솔하게 전했다. 박목사는 “이 책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며 영적인 체험들이 있길 기대한다”며 “김익두목사의 영적인 설교를 읽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나타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크고 작은 인생의 여정 속에서 겪었던 신앙적인 면들을 간증했다”며 “앞으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한 사람도 신앙의 낙오자가 없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