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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어린 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성경 본문: 고린도전서 13:11
1. 설교의 목적을 생각하며…
2.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목적
3. 하나님의 계시가 가르쳐 주는 것들
4. 계시를 통해 드러나는 소명의 참된 목적
5.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병폐
6. 어린 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1. 설교의 목적을 생각하며…
한세대학교 신학대학원은 나에게 1997년의 입학으로부터 졸업까지의 시간을 생각나게 한다. 그 시절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사명감에 불타서 열심히 공부하던 나는 이제 26년이 지나 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나는 30대 초반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제 신학대학원 학생들에게 설교를 할 예정이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감회가 새롭다.
이번 설교에서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가 그토록 알고자 했던 진리를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가르치시고 계시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지속적으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매 순간 진심으로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려는 것이다. 이 두 사실은 나에게 특별히 중요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작업은 진리를 알아가는 것인데, 그 진리는 우리에게 우리와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렸을 때의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는 청년기를 지나고 장년기를 지나오면서 매우 달라진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듯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정도에 따라 세상과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수준과 깊이와 폭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사실은 귀하고 귀하다. 이 말은 우리가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자라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과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깨닫고 그 깨달음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교우들과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의미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목회의 정의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1.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어떻게 계시하실까?
2.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3. 진리를 통해서 발견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2.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목적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때마다 사람을 부르신다. 하나님이 누구를 부르실 때는 그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계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의도로 제시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단지 소돔성에 대한 계획만이 아니라 그와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리라는 원대한 계획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한 사람의 삶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온 세상과 관련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한 사람에게 주어질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공동체와 세계를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 큰 민족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국 그 민족을 통해서 열방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명은 세계를 위한 소명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소명이다.
아브라함의 소명이 다시 확인된 것은 시내산 언약이라 할 수 있다. 시내산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계획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 세계 만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중보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들은 온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덕을 나타내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
마태는 하나님의 이 원대한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복음서 시작과 끝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록한다.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게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그 민족’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과 연합하여 하나님 앞으로 한 가족처럼 나아가라고 권면했다.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성전으로 지어질 때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 놀라운 계시를 모르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사도 바울은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에 의해 좌절되지 않는다. 유대인이 거절하고 배척하더라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들어서 자기의 뜻을 이루신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 만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아브라함의 복과 사명에 동참하고 있다.
밧모섬의 요한은 하나님의 이 원대한 계획이 마침내 완성되는 환상을 보았다. 그 원대한 계획이란, 천하만민이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세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 환상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5:9~10
전에는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레위지파 중 아론의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계시가 더 명확하게 드러날 때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 가운데서 제사장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세상 전체가 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예언자 이사야는 미리 바라보고 ‘물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충만할 것이라’고 노래했다.
3. 하나님의 계시가 가르쳐 주는 것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계획은 한 가문에 대한 것이며, 한 나라에 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은 이미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만국의 경영자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말 찬송가 11장에 있는 것처럼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천하만민 경배하라 만국 왕을 다스리고 온 세상 만민 기르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한 개인을 통해서 한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며, 한 나라를 통하여 세계 열방을 새롭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계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다. 그런 점에서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문제나 자기 가문 또는 자기 민족의 행복에만 갇혀 있을 경우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일깨워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게 하신다. 구약성경에서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예언자 요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삶은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가장 열정적으로 전한 복음전도자의 투혼이라고 할만하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가 자기 백성에게 점점 명확하게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다. 그래서 피의 제사를 드리던 구약의 전통은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 자비와 정의를 행하는 삶으로 발전한다. 신약성서를 기록한 사도들은 자비와 정의를 행하시다가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처럼 구약의 모든 피의 제사를 대체하시고 완성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어린 양의 죽음으로 이해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며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깨달았다. 즉, 하나님은 피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백성이 자기 앞에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면서 살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창조를 완성하신 후에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으로 인간을 들이신 것 아닌가!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바라신 뜻은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공동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앞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경배하면서 얻는 지혜와 은총으로 이 세상을 통치할 때 세상이 질서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기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계속하여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셔서 세상을 맡기시고 그들을 통하여 일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은 시편 2편에 나오는 바로 이 말씀이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편 2:7~9).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시내산에서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 제사장의 나라가 맡아서 관리하고 사역할 대상이 바로 이방 나라들 아닌가! 그리고 예수님이 교회를 부르시고 교회를 통하여 세상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 것도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백성을 세우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관리하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자기 백성에게 계시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동참하는 특권을 깨닫고 감격하고 즐거워한다.
4. 계시를 통해 드러나는 소명의 참된 목적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폐쇄적인 유대주의처럼 우월주의적 선민사상에 붙들리면 병들게 된다.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믿는 자인 우리 만을 구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생각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우리를 자기 아들로 삼으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 말은 세상에 하나님의 덕을 나타내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우리의 구원은 ‘세상으로부터’(form the world) 건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for the world) 건짐을 받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스라엘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목적은 그들에게 단지 가나안 복지를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열방을 새롭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옳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첫걸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만민에게 은혜를 베푸시기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첫걸음을 옮긴 것뿐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은 전적으로 은혜로 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을 건져내신 후에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신다. 그것은 세상을 그들에게 맡기신다는 제안이었다. 사실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맡아 섬기는 것이고 돌보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축복하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 부부에게 위임하신 바로 그 일을 다시 하셨다.
이스라엘은 옛적에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영광을 입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만물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았던 것처럼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 아담이 부르는 것이 곧 그의 이름이 되었다는 성경의 표현은 아담이 모든 짐승들을 다스렸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고 궁창 아래의 물을 바다라 하시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 그 부르신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처음부터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유지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이며 성막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만민의 왕으로 살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였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는 온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릴 특권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성막은 하나님이 그들 곁에서 그 일을 이루시려고 동행하심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이며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율법은 도리어 그들을 억누르는 짐이 되었고, 성막과 성전은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공연장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백성들과 함께 뼈아픈 고난을 겪은 후에 비로소 율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해했다. 예언자들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결국 세상을 비치는 등불의 나라가 되어야 했다고 백성들에게 외쳤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자기 백성들을 새롭게 하신 후에 이제는 돌판에 새기지 않으시고 그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새겨 그들을 빛나는 나라와 백성으로 만드실 것이라고 격려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이 정말 소중하다고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율법의 근본정신은 먼저 대접하는 선한 마음이며,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진실한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을 수 있으며 인생을 진리의 반석 위에 든든하게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결국 세상에 빛으로 등불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고자 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가르침을 보고 들은 제자들은 교회를 바로 그렇게 새 이스라엘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보면, 교회란 어떤 존재인가?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실 때는 자기의 나라인 이 세상을 맡기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한다. 그 율법의 핵심은 진실과 자비, 그리고 겸손이라고 예언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미가 6:8 등). 예수님도 그렇게 가르치셨다. 교회가 예배를 통해서 갈고 닦아야 할 정신이 바로 이것이며, 이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을 때 비로소 세상에 희망과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찌 기쁨과 보람이 없겠는가! 이런 삶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17).
5.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병폐
그러므로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보다는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원인이 된다. 예를 들면, 구원을 세상을 위한 봉사와 섬김으로 이해하기보다 이 세상을 벗어나 저 세상으로 가는 것으로 이해할 때마다 이단 사이비 사상이 독버섯처럼 일어난다. 그런 구원을 받기 위해서 상식도 팽개치고 윤리도 저버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된다. 기독교 신앙을 빙자한 이단 사이비 집단이 활개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 바로 구원과 천국을 이런 의미로 이해하는 장소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이단이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또 하나의 병폐는 배타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점이다. 세상을 위한 구원이라는 성경의 대원칙을 이해한다면 예수님처럼 누구나 품으며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길은 오직 하나라고 믿으며, 기독교 외에는 모두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독선에 빠지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에 길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곳에 길이 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대접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길 외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 갇혀서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문제 있다고 낙인찍는다! 우스울 뿐이다!
6. 어린 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나는 위에 언급한 모든 과오를 범한 사람이다. 나는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신앙에 빠져 있었고, 나는 이원론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삶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청춘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폭 좁고 편협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경건한 신앙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아왔다. 그때 즐겨 부른 노래는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였다. 이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희망과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더 멋진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과 비전을 갖지 못한 채로 그렇게 ‘위에 있는 세상인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나에게도 새로운 빛으로 다가왔다. 그런 계시는 성경을 많이 연구한 다른 학자들의 책을 읽을 때 나에게 조금씩 열렸다. 그것은 나의 생각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고, 위대한 학자들의 큰 생각을 만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편협함과 작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반가운 경험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경험이었다.
이제 돌아보니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 13:11). 어릴 때는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처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성장한다.
이런 이유로 사도 베드로도 교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모습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격려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서, 여러분이 자라나기를 빕니다.’(베드로후서 3:18, 표준새번역성경). 아이에게 어서 자라라고 말한다고 해서 더 빨리 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도 자라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양식을 먹어야 잘 자라듯이, 바른 말씀을 먹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사귀면서 자신을 열어야 더 잘 자랄 것이다. 닫힌 생각과 고루한 생각에 갇혀 있으면 신앙의 성장판을 스스로 닫아 버리는 셈임을 기억해야 한다.
다행스럽고 감사한 점은 우리를 새롭게 하고 자라나게 하는 고난이 인생에는 있다는 것이다. 고난 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의 말과 글에 더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는 어린 아이의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의 생각을 갖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는 더 명확해지고 더 풍성해진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 깨우침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강단에 설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인생길을 더 힘 있게 걸을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 말을 후배들에게 꼭 해 주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