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동인 목사는 2003년 3월 높은뜻숭의 교회를 찾아가 우리사회 밑바닥 계층의 돌봄 없이는 우리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높은뜻숭의 교회가 밑천 나눔 사업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기독교 복음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시대가 필요한 명동촌과 가나안 농군학교를 향하여!
예수님과 바울같이 노숙자와 조선족과 같이 더불어 살며 신앙생활하는 사역은 청소년기부터 차츰 차츰 강도를 높여왔던 차입니다.
1990년부터 10여년 간 서울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복잡한 일을 부지런히 하며 사는 청계천에 있었던 것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뒤 학교에 복학하고
통일을 위한 거의 모든 이름난 통일학교와 기관과 교회들 찾아가 2003년-2012년 긴 기간동안 공부도 하고 또 근무도 하면서 통합된 울타리를 원하며 협력했습니다. 그러나 각 기관마다 학교마다 교회마다 따로 따로 고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실제 현장과는 심각한 괴리가 있음을 절감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공무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95년부터 2000년 초까지 북한에서는 심각한 기근과 홍수 등으로 수백만이 굶어죽고 국민 대부분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것을 고난의 행군이라 하는데 그 때 대량탈북이 일어나 중국내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관심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3년에까지 우리 정부마저 등을 돌리고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그 해 중국이 골치 아파하는 북한 이탈 주민들을 위해 대규모 농장건설을 하기로 했습니다. 가나안농군학교 기술이사 등을 대동하고 동북삼성을 다 돌았습니다. 그들 중국 사람들에게도 일자리와 산업이 된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그들 공무원들은 기뻐서 도와주었습니다. 그 결과 500만 평의 농축산지와 2만 평의 교회부지를 계약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계약한 이 농축산단지를 국내 대기업들이 독단적으로 하겠다고 하여 무산된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도 대기업들은 사람에 대한 관심 없이 물량으로 자선을 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생략하겠습니다.
2008년에는 저희 새사람 교회는 기존의 노숙자쉼터를 북한 이탈 주민 쉼터로 바꾸었습니다. 매달 새로 들어오는 북한 이탈 주민들과 더불어 같이 살게 되었으며 보다 많은 북한 이탈 주민들과 접촉을 위해 젊은 강사급들로 구성된 난타공연단을 이끌고 매 달 하나원이라는 교육기관을 방문하고 도시체험봉사를 하는 한편 청계천 사역 10년의 특기를 살려 가정들을 방문해서 여러 물품을 나누었습니다.
가정방문 시에는 목사로서 기도와 상담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도시에서의 10여 년 간 북한 이탈 주민의 바른 정착과 사회적 계도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도시는 그 모든 시스템이 북한 이탈 주민들의 생활이나 신앙면 둘 다에서 정착에 대단히 불편한 구조임을 절감했습니다.
보다 변화된 삶과 더불어 보다 큰 울타리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북한 이탈 주민 교육 이전에 한국인지도자들에게 그 교육이 선행되어야한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그리고 현재 도시보다는 농촌이 하나님의 나라가 더 휠씬 가까움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10년 전 북한을 탈출해서 한국에 와서 잘 살아보려고 결혼도 했으나 자신도 유지가 힘든 형편에 가정의 유지가 힘든 것을 알게 되었고 직업을 위해 도시의 공장들과 식당들을 전전도 하였지만 자립에 실패를 한 이들이 그 수에 비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또 새 삶을 찾아 미국, 영국, 일본, 독일, 노르웨이까지 지구를 한 바퀴 돈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가지로 말합니다. 우리에게 맞는 것은 없다. 돈이 적어도 마음이 편하고 인간다운 삶이 있는 정있는 농촌이 좋다고요.
실제 농촌에는 이들에게 줄 정이 남아있습니다.
2010년부터 뜻있는 북한 이탈 주민 청년들을 데리고 전국에서 유리한 공동체자리를 찾아 다니다가 기독교교육의 최고 선배이신 주선애교수님과 여성지도자들의 배려로 양평의 기독교 요양원인 안식관에서 공동체를 시작하였습니다. 2011년 상부 상조 자활의 한민족밀알공동체란 사단법인을 세우기에 이르렀고 이 해 공동체출신인 11명은 한국민보다 더 출중한 모범신앙인으로 활동중입니다. 2분은 작년 선교봉사의 현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 평창, 고창, 제주, 충주 등 최적의 조건 즉 최고의 토지와 최고의 지도자가 준비된 곳으로 가서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훌륭하셨지만 이 땅의 모든 지도자와 농부들까지 급하고 도시의 평가기준에 젖어 있었음으로 모든 소망과 약속은 단 시간에 깨어지는 처참한 결과들을 맞게 됩니다.
전에 한 형제였으나 너무나 달라진 형제들이 만나는
남과 더불어 한 형제로 산다는 것은 피로서 써내려가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의 실패위에 당신의 사람과 땅을 주시고 계십니다.
가나안농군학교와 두레와 한민족복지와 정농회와 전국 몇 백 안 남은 유기농 농가들의 신앙두령들이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신앙의 선배이신 200여명의 목사님들이 20 여 년간 만들었던 에덴동산입니다.
태국을 시작으로 동남아에서부터 중국까지 이웃나라들이 같이 통일을 원할 수 있도록 같이 사는 농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남한 사람과 북한 출신들이 섞인 우리 삶이 통일이란 공동체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한민족 밀알 공동체인 것입니다.
여주4만 7천 평과 요양원건물, 충주 6000 평의 과수원과 전답들과 농가와 음성 1만4천 평과 저택까지. 제주도에는 생명농업이란 토지와 건물도 있고요. 태국도...
다양한 적성에 따라 자연 농업(자연양계, 과수, 약초, 김치 등)을 하시거나 요양을 위해 오시거나 공동체로 서로 위하며 살아보고자 하는 이들을 환영합니다.
위하여 관내에서 개별로 살 수 있도록 하며 필요하면 인근의 별도의 일자리도 소개해드립니다.
물론 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미래계획도 있습니다.
주소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송촌리 245 노아복지원과 제 전화번호 010-4765-0690
후원계좌 농협 301- 0094 6007-21 한민족밀알공동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