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따르려면
(눅 9:51-62)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도 새로워지도다’(고후 4:16)라고 증언합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 변화하는 사람입니다. 변화와 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장이 멈추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퇴보하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날마다 변화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몸의 성장과 변화는 느끼지만 마음과 생각의 성장과 변화는 잘 느끼지 못합니다. 몸이 자라면 생각도 자랄 줄 착각하기도 합니다. 몸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기대하는 만큼, 생각도 건강하게 성장하고 변화해야 합니다. 생각이 굳어지면 고집이 됩니다. 고집은 관계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결혼을 했는데 부모 밑에서 자랄 때 생각만 한다면 좋은 결혼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환경이 변화하면 생각도 달라져야 합니다. 물론 변화는 성장을 위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성장은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굳어지면 위험해집니다. 율법을 강조하는 원리주의 신앙이 위험한 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모든 관계가 변화하고 있는데 수천 년 전 전통과 율법을 고집하면 삶이 퇴보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여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린아이 때 좋아하는 옷이 있다고 자란 뒤에도 그 옷만 입겠다고 한다면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란 몸을 억지로 옷에 맞출 수도 없는데, 맞추려고 하는 것이 원리주의, 근본주의 신앙입니다. 21세기를 살면서 1세기의 삶을 요구하는 것은 성장을 방해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떤 모습입니까? 옛 생각, 옛 모습에 머물러있지 않습니까? 변화하고 성장한다면, 그러한 변화를 느껴야 합니다. 날마다 변화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 나는 이렇게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장케 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달라지지 않고 성장의 열매가 없다면, 그 신앙,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과 소망이 있다면 우리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성장과 변화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진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푳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고 고백합니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신앙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반복되는 것은 없습니다. 삶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든지 멈추어 퇴보하여 멸망하든지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진보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하고 성장하기 때문에 지나간 일과 생각에 매이지 않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앞을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정치에서 보수 정권은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안정’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국가는 퇴보합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여기저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국민의 삶이 힘들어집니다. 요즘 옛날 통치방식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만큼 발전에서 뒤처지는 것입니다. 국가의 발전을 친일과 독재, 이념이라는 과거의 신념들이 발목 잡고 있는 것입니다. 성장과 변화하는 보수정치가 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미래의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정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래를 준비한 지도자가 등장해야겠지요. 과거의 생각, 관행, 고집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미래를 보고 미래의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희망을 말하려면 우리가 변화해야 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말씀,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고, 성숙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도 성장하고, 성숙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를 많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젊었을 때보다 많은 일은 할 수 없지만, 날마다 새로워진 우리 자신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새로워진 것은 예수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이야말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달려갑니다. 오늘 말씀 51절에서도 예수님은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승천하실 때는 부활 후 승천하신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실 때를 의미합니다. 곧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때가 차게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권세와 지지를 얻는 것, 혹은 많은 일을 하는 것에 미련을 갖지 않으시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가십니다.
사마리아를 지나시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부하자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망시킬까요?’라고 말합니다. 주님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주님은 제자들을 호되게 꾸짖습니다. 충성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달라지지 않은 것을 꾸짖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생각을 갖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에 머물러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주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닮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주님을 믿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충성하는 것은 신앙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삶인지 세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그는 서기관이라고 합니다. (마 8:19) 서기관은 율법학자입니다. 신분과 신앙이 좋고 안정적입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을 닮고, 주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누릴 것 다 누리고,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행하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따랐는지는 모릅니다.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는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스스로 따르겠다고 왔지만, 두 번째는 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한 가지 청을 합니다. ‘먼저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아버지께 효도하는 것은 율법에서 선행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자들도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 자기 할 일 다하고, 하고 싶은 일 하고 여유가 있을 때 주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자신의 전 존재, 모든 삶을 걸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에게만 그런 삶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병든 이를 고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며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신 것처럼, 우리 삶이 주님을 닮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지 않는 믿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이 말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습니다만 먼저 내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먼 길을 떠나는데 작별인사는 허락해주는 것이 좋겠지만, 예수님은 거절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야박하게 작별인사고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원망할 수 있지만, 주님은 그가 과거를 되돌아보는 그 욕망을 보신 것입니다. 한번 뒤돌아본다면 두 번, 세 번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다면 바르게 고랑을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들은 일의 중요한 정도에 따라 순서를 정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맨 처음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람만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정도는 가치가 높거나 시간이 급할수록 중요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이 가까이 온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위로와 축복이 있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고 긴급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고 있습니까?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도와주며,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고,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려는 이들처럼, 옛 생활로 돌아가고 자기 생각에 머물러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 주님의 겸손과 사랑, 주님의 친절, 주님의 평화를 가지고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돈이나 시간이나 힘을 내가 쓰고 싶은 데 쓰고 난 뒤에 남으면 주를 위해 살겠다고 하면 주님은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이 세상 걱정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지 못한다고 해도, 날마다 변화하는 모습은 보여야 합니다.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