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성령의 임재 후에 보고 들은 것을 담대히 전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 변화의 원동력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결코 변화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령과 함께 시작되었고 성도는 성령과 함께 변화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가 달라졌고, 두 번째는 재물을 내려놓는 모습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안과 밖을 다 변화시키는 능력의 영이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위기가 있을 때 모여서 회의를 했지만, 제자들은 풀려난 뒤에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가 있을 때 사람을 만나고 회의하고 연락한다고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모여서 가장 가치 있게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 이상 모인 곳에 기도가 있을 때 모든 모임에 역사가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면 내 생각과 경험과 지식으로 일하지만 기도하면 내 생각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인생이 달라지고 기도하면 기도가 달라집니다. 영적인 기도를 낳고 성령의 기도를 낳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를 가장 잘 꾸미는 방법은 기도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소리를 높여 기도했다는 것은 통성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리를 높일 때는 감동이 있고 기쁠 때입니다. 소리를 높이지 못한다는 것은 별로 기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쁠 일이 없는 사람들은 조곤조곤 얘기하다 갑니다. 또 소리를 높일 때는 너무 슬플 때입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 추악한 모습을 보일 때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것, 애통할 때 소리 지르며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응급 상황이나 급할 때 소리를 지릅니다. '불이야'나 '사람 살려'를 조용하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리 지르는 기도만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평생 조용히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았다 하나 죽은 자입니다. 기쁠 일도, 슬플 일도, 응급 상황도 없는 석고상 같은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쁘고 슬프고 응급 상황일 때 소리 높여 기도하십시오(23,24). 기도를 받으시는 주님은 창조주요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들은 초점을 문제가 아닌 하나님께 두고 소리 높여 기도한 것입니다(시2:1, 2).
세상은 본질이 악하기에 악에서 나오는 것은 분노밖에 없습니다. 분노가 약할 때는 짜증이 납니다. 그럼 자신도 힘들지만, 주변이 힘듭니다. 기도가 나를 분노에서 건져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일은 기도함으로 분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의 평안과 기쁨과 찬송이 넘치게 됩니다.
세상의 또 다른 특징은 허사입니다. 세상은 불의를 깨겠다고 혁명을 하는데 나중에는 혁명한 사람들이 더 악하게 행동합니다. 혁명의 배반. 세상은 그래서 허사입니다. 사람이 만든 유토피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평온함이 없고 요동하는 바다 같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진흙과 더러움이 솟아오릅니다(이사야 57:20). 이게 제자들이 깨달았던 세상입니다(25,26).
성도들이 병든 자에게 손을 내밀면 병이 낫게 해 주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주의 이름으로 드러나게 해 달라고 하늘의 능력을 구합니다. 그랬더니 빌기를 다 할 때 진동이 일어나고 놀라운 능력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빌기를 다했다는 것은 기도하고 난 뒤에 인정을 받았다는 것, 예수님과 묶였다는 뜻입니다(=순비바조). 세상이 아닌 하나님과 묶이십시오. 세상의 꿈과 비전에 묶여서 세상이 멸망할 때 같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묶이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이 ‘빌기를 다하매’입니다. 그랬더니 진동하며 하늘의 능력이 임하게 되어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29-31). 영적인 기도로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재물을 내려놓습니다. 사람은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목숨인데 성공한 인생은 목숨보다 귀한 것을 발견한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숨보다 더 귀한 복음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생명보다 귀한 것을 발견한 사람은 생명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생명 다음으로 귀한 것이 돈입니다. 어떤 이는 돈에 인생을 겁니다. 재물보다 큰 것을 발견한 사람은 재물을 상대화됩니다. 아깝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의지할 것이 돈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며 매국노라 욕하고 불안한 인생이라 돈만 모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시니 더는 불안하지 않아 돈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는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고백합니다.
돈이 나를 지켜 준다고 생각하지만, 더 큰 것을 발견하면 쉽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은 다윗이 도망 다닐 때 고백한 것입니다. 부족함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이 없어서입니다. 재물을 놓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놓지 못합니다.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로 꽉 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는 돈을 의지하지 않습니다(32,33).
기도로 예수님과 묶이면 세상과는 풀립니다. 예수님과 안 묶이니까 세상과 묶여서 돈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것 같이 예수님을 만나면 자유합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은 헌금의 원리입니다. 내 이름으로 도움을 주면 받는 사람의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지만, 교회 이름으로 도우면 받는 사람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 자랑이나 교만으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와주는 사람은 자기 영광을 자기가 받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를 세웠던 바나바는 재물보다 더 큰 가치인 예수님과 묶이게 되니 영혼을 살리는 위로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물질이나 헌금조차도 내가 죽고 예수로 살지 않으면 좋은 일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묶이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변화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