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러시 (외 2편)
기 혁
사람을 만나는 순간,
중고의 삶을 시작하는 가랑이
광부들의 갱도만큼 어두웠지.
유년의 인디고 물감이 빠진 자리엔
상처마다 덧댄 물고기 패치가
아가미를 뻐끔거려.
엄마의 손을 놓친 것들은 왜 멋이 있을까?
서쪽으로 돌아 나온 것들은 왜
명찰이 없는 것일까?
유령처럼 미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
피 묻은 행려병자의 생애를 빨면
해변의 석양이 배어 나오기도 해.
누군가 먹다 만 데킬라 선셋의 취기,
접어 올리지 못한 그림자의 밑단과
후렴뿐인 유행가의 이별도
뒷모습의 치수로만 슬픔을 표시한다지.
가장 아픈 곳은 사람의 손을 탄 곳일 텐데?
저마다 폼을 잡는 세계에서
이별은 가장 근사한 워싱의 방식.
타인의 상처가 옅어질수록
서로를,
바다를 알고 헤엄쳐 다니려 하지.
나비잠
뭐라고 불러야 하지?
바람을 시련이라 배운 아이들이 커서,
연애를 하면
그 연애 때문에 보아야 할
바람의 핏줄이며
푸른 목젖의 울렁거림을
배를 미는 일이나 풍차를 돌리는 일,
낡은 선풍기마다 널어 둔 속옷을
말리는 소일까지도
누군가에겐 허공을 떠미는 시련
생애의 근대를 한 사람에게 내어 주는 일에는
또 어떤 풍문이 필요한 거지?
토네이도가 지나간 자리에
꼭 껴안은 인형의 주검이 보였어
빌딩과 자동차를 날려 버린 자연보다 더
지독한 풍문이
인형과 인형 사이에 버티고 있었어
바람을 배운 뒤에도
바람과 입 맞출 수 있었던
추운 플라스틱의 꿈결들아,
너희가 나비든 나비가 너희든
노란 리본을 잊지는 말아 줘
허공이 혀끝에 닿으면,
누구라도 외인(外人)을 흘리는 법이니까
인상파
세상의 빛을 모두 섞으면
환해진다.
빨강은 파랑에게 파랑은 초록에게
서로를 양보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기 때문.
무수한 빛깔들,
이를테면 아이를 잃은 여인의 눈물은
보랏빛을 더욱 연하게 만들고
배신당한 악공의 기타는
초록을 연둣빛으로 바꿔놓는다.
보이는 것보다
들려온 빛깔들이 점점 많아지면,
자신에게서 가장 먼 것들의 이름부터
차례로
속을 내비칠 수 있었을 텐데.
맹인의 검은 동자가
미래를 예언하던 시절에도
우리의 구원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선 매번
어두운 주변이 필요하고,
손전등을 비추다 맞닥뜨린 진실은
노상강도를 닮아가는 법.
모든 것을 빼앗긴 끝에
목숨만을 부지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희미해진다.
주황이 남색을 양보하듯이
남색이 노랑을 양보하듯이
색약의 윤리는 모조리,
캔버스 위 사인 속에 감춰 두고서.
—시집『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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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 1979년 경남 진주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2010년 《시인세계》신인상 시 당선. 2013년〈세계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