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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는 바 없는 불사(佛事) / 일타 큰 스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
사람은 누구나 영원하고 자유롭고 편안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끊임없는 행복과 더 큰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고통의 삶을 거부하지 못한다.
고난이 닥쳐오면 피하고 싶어지고, 피하기 위해 도망도 쳐보지만
결국은 무조건 당하고 무조건 받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一切皆苦)."
실로 인생은 괴로움 투성 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대로 괴로움이다.
특히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중생도 피할 수 없는 여덟 가지 괴로움
(八苦)을 말씀하셨다.
태어나는 것이 괴로움이요(生苦)
늙는 것이 괴로움이요(老苦)
병드는 것이 괴로움이며(病苦)
죽는 것이 괴로움이니라(死苦)
미운 이와 만나는 것이 괴로움이요 (怨憎會苦)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이 괴로움이다.(愛別離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求不得苦)
통틀어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이 삶 자체가 괴로움인 것이다(正陰盛苦)
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괴로움이 다가오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자신도 모르게 태어났으니 태어남의 괴로움을 그만두고라도,
늙기 싫고 병들기 싫고 죽는 것은 더더욱 싫다.
왜 우리는 하기 싫은 것을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왜 미운사람과 얼굴을 마주 대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인가? 왜 돈과 명예와 권력 등을 뜻과 같이
얻지 못하고 구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는 것인가?
실로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마음대로 되는 일이란 거의 없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괴롭고 또 괴로울 뿐이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괴롭다고 하여 인생을 포기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서 괴로움을 뛰어넘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받고 있는 이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
현재의 괴로움을 넘어서고 영원 생명과 무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고통의 삶을 넘어 영원 생명과 무한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첫째, 원망하지 않는 삶의 자세를 길러야 하고,
둘째, 인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며,
셋째, 무소유의 도리를 깨우쳐 만족할 줄 알아야 하고,
넷째, 진리에 입각한 수행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다섯째, 마음 깊이 진리를 깨달아 마침내 대자유와 대해탈을 얻어야 한다.
이들 다섯 가지 중, 세 번째 <무소유의 도리를 깨우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인생은 한 바탕 꿈
인간을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누구나 편안하고, 깨어있는 삶을 누리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 속에서 부딪히는 갖가지 사건들이 '나'를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행복하게 살도록 놓아두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살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우리는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그 까닭은 업(業) 때문이다.
'나' 자신이 몸[身]과 말[口]과 생각[意]으로 알게 모르게 지은
좋지 않은 업이 '나'를 얽어매어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나쁜 업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모두가 자기애(自己愛) 때문에 생겨난다.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나에게 맞으면 탐심을 내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성을 내며,
나에게 너무 집착하다보니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삿된 생각을 일으킨다.
나아가 수만 가지 번뇌와 나쁜 말, 심지어는 나쁜 행동까지
거침없이 저지르게 되고 만다.
결국 갖가지 번뇌에 휘말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 이라며
짜증을 내고 괴로워하면서 살게 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번뇌와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번뇌와 고통 속에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벗어날 래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 그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누구라도 좋다. 누구든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인생이 어떠한 것인가를 솔직히 되돌아보는 것이 좋다.
인생! 우리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인생은 꿈속에서 사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대부분 중생들을 스스로가 만든 번뇌라는 이름의 꿈을 벗어나지 못하여
세세생생(世世生生)토록 선악의 인과에 휘말리고 생사의 세계를 윤회하고 있다.
나서는 늙고, 늙어서는 병들고 필경에는 죽어 거듭 태어나
또다시 죽는 무상한 존재이다. 번뇌의 꿈속에서 한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깨어날 줄 모르는 허망한 존재가 중생인 것이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여 실망할 일은 아니다. 바로 '꿈'이라는
이 단어 속에 행복과 평화로운 삶의 비결이 간직되어있다.
꿈과 같이 무상하고 허망한 인생이라는 것을 알 때 새롭게 눈을 떠
꿈을 깬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헤아리니 한바탕 꿈이로다.
좋은 일 궂은 일이 한바탕 꿈이 도다.
꿈속에서 꿈을 헤니 이 아니 가소로운가?
어즈버 인생 일장춘몽을 언제 깨려하느뇨.
과연 우리는 이 옛시조처럼 인생을 한바탕 꿈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 뿐 아니라,
꿈속이라도 좋으니 부귀영화를 누리고 마음대로 살아보았으면 할 것이다.
옛날 중국의 당나라에 노생(盧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큰 부자 되는 것이 원이요,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이 원이요,
예쁜 아내를 얻어 아들 딸 낳고 영화롭게 사는 것이 원이었다.
어느 날 노생은 한단(邯鄲) 지방으로 가다가,
신선도를 닦는 여옹(呂翁)을 만나 자기의 소원을 하소연하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그 할아버지는 바랑 속에서 목침(木枕)을 꺼내주면서
쉬기를 권하였다.
"고단할 테니 이 목침을 베고 잠깐 눈을 붙이게. 나는 밥을 준비할 테니."
목침을 베고 누운 노생은 금방 잠이 들었고, 그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새롭게 전개되었다. 그의 소원 그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얻고
절세 미모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딸을 낳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참으로 행복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80년의 세월이나…….
그런데 누군가가 '밥 먹게' 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떠보니
모두가 한바탕 꿈이었다. 80년 동안의 부귀영화가 잠깐 밥 짓는 사이에 꾸었던 꿈이었던 것이다.
미국 보스턴주의 뉴포트에 가면 어업에 종사했던 부자가 지었다는
어마어마한 집이 있다. 그는 8년 동안 세계 각처를 다니면서
최고급 대리석을 비롯한 좋은 건축자재를 모았고,
10년 동안 온갖 심혈을 기울여 초대형 호화 별장을 완성 시켰다.
그 뒤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호화별장에서 살았을까?
불과 8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더욱이 그는 뒤를 이를 사람이 없는
독신자였기 때문에, 죽기가 바쁘게 그 호화별장은 보스턴주 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주 정부도 그 집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감당할 수 없어
관광객들에게 집을 공개하여 관광수입을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관광객들이 이 화려한 집을 구경하면서 '와-' 하고 감탄하지만,
사연을 알고 그 집을 나올 때는 하나 같이 말한다.
"2m도 되지 않는 몸뚱이를 겨우 8개월 동안 간직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집을 짓다니……."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이 두 편의 이야기처럼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한평생 꿈속에서 갇혀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꿈처럼 허망한 일에
자신을 내맡기며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마침 내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거늘,
자기에 대한 사랑과 헛된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허망한 꿈을 꾸며 살아서야 되겠는가?
좀 더 잘 살아보면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지 말고,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고,
스스로의 삶이 꿈속의 삶이 아닌지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라.
그럼 꿈같은 삶에서 깨어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냉혹히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나'는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환경을 화택(火宅)이라고 하셨다.
불타는 집 화택! 사람들은 바라던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않을 때
'어이구, 속 탄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러나 이 불은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일으킨 불길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가야산에서 다음과 같은 '불의 법문을 많이 쓴다.
그러나 이 불은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일으킨 불길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가야산에서 다음과 같은 '불의 법문'을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눈이 불타고 있다.
눈에 비치는 형상이 불타고 있다. 형상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불타고 있다.
어떤 불에 의해 타고 있는가?
탐욕[貪]의 불, 분노[瞋]의 불, 어리석음[癡]의 불에 의해 타고 있다.
비구니들이여, 이와 같은 불길들은 왜 일어나는가?
'나' 스스로가 일으킨 망상이 부싯돌이 되고 불씨가 되어
어리석음을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고 탐욕과 분노의 불길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불길은 점점 세차게 타올라 '나'와 중생들은 모두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三毒)의 거센 불길로 인해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세계를 윤회하게 되고,
근심과 슬픔과 고통과 번민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느니라.
비구니들이여, 탐욕과 분노의 어리석음 세 가지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는 것은
오직 '나'에 대한 애착 때문이니, 세 가지 불을 멸(滅)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나'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려야 한다. 나에 대한 애착을
끊을 수 있게 되면 세 가지 불길은 스스로 꺼지고 윤회의 수레바퀴는
저절로 멈추며 모든 괴로움은 자취 없이 사리지게 되느니라.
삼독의 불길은 너희들 안에서 타고 있다. 이것을 빨리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의 깊게 닦아라 하루 빨리 삼독의 불길을 멸하여야 하느니라."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삼독의 불길. 그 불길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를 태우고, 그 불로 '나'의 속을 볶고 끓이고 썩힌다.
'나' 뿐만이 아니다. '나'주위의 가까운 사람들까지 불태워버린다.
그야말로 불의 집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하지만 우리는 집이 불타고 있어 언제 죽게 될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데도
그 집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기에 바쁘다. 만약 이 불이 '나'를 태우고
우리를 태워 죽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누가 그 무서운 불길을 일으키겠는가?
정녕,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탐·진·치 삼독의 불길을 끄고자 하지 않는다.
불의 무서움을 잊은 채 자기들의 놀이에만 몰두할 뿐,
불을 끌 생각도 하지 않고 불타는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냥 불타는 집에 태어나 죽고 또 죽고……. 이것이 윤회하는 중생의 모습이다.
적어도 우리 불자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화택(火宅)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불타는 집을 벗어나고자 하거나 불을 끄고자 노력해야 한다.
알고 노력하면 능히 벗어날 수 있는 곳! 그곳이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불타는 집, 화택인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살펴보자.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이다. 이 몸과 마음을 자동차에 비유하면,
몸은 자동차요 마음은 운전사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운전사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데 운전사인 마음은 소홀히 하고 자동차인 이 몸만을 중요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때가 되면 폐차장으로 보내야 할 이 몸을 갈고 닦고 가꾸고 사랑하는 데 몰두하여
진짜 주인인 마음 가꾸기를 게을리 하게 되면 끝없는 윤회와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몸을 일러 사대색신(四大色身)이라고 한다.
이 몸이 땅 기운·물 기운·불기운·바람 기운 등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의 기운이
합하여져 잠시 현재와 같은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하나의 도자기로 만드는데 비유해보자. 도자기는 흙으로 만든다.
그러나 흙으로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적당량의 물을 섞어야 한다.
흙과 물을 잘 반죽하여 일정한 형태로 만든 다음 불기운을 가하여
잘 구워야 도자기가 완성된다. 곧 흙(地)·물(水)·불(火)만 있어도 도자기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움직이는 사람의 몸은 한 가지가 더해져야 한다.
움직임의 기운인 바람(風)이 합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수·화·풍 네 가지의 큰 기운(四大)이 적당하면서도 조화롭게 합하여지면
사람의 몸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나의 몸을 이룬 다음에도 지·수·화·풍 네 가지 구성요소는
각각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어 애착과 번뇌를 불러일으키고 마침내는
'나'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고 하여, 불교에서는 사대를 네 마리의 뱀,
곧 사사(四蛇)라고 부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을 설하시면서
'한 광주리 안의 뱀 네 마리[일협사사(一篋四蛇)]'라는 비유 담을 들려 주셨다.
한 임금님이 아주 신임하는 신하에게 광주리 한 개를 주면서 명을 내렸다.
"이 광주리 속에는 각각 성질이 다른 네 마리의 뱀이 들어 있다.
이 뱀들을 한 광주리 안에서 키우되, 한 마리라도 성나게 하거나
죽게 해서는 네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왕의 명령을 받고 광주리를 들고 온 신하는 첫날부터 고민에 빠졌다.
네 마리의 뱀은 그 모양에서부터 색깔·습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각각이라서,
한 광주리 안게 넣고 키운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하는 우선 뱀들이 머리 모양부터 살펴보았다. 방원장단(方圓長短),
한 마리는 모가 났고(方), 한 마리는 동그란 공과 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圓),
한 마리는 길쭉하면서도 가늘고(長), 한 마리는 짧고 통통하였다(短).
또한 몸의 색깔도 청황적백(靑黃赤白)으로,
각각 파랗고 노랗고 빨갛고 흰색으로 되어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네 바리 뱀이 지닌 독 또한 각각이어서
견허촉교(見噓觸交)의 독을 내뿜는 것이었다. 쳐다보기만 하여도(見)
그 독 기운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뱀, '후-' 하고 김만 쏘여도(噓)
그 독 기운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뱀, 몸에 닿기만 하여도(觸)
상대방이 독이 올라 죽는 뱀, 상대방을 물어서(交) 죽이는 뱀이
다 모인 것이다.
네 마리 뱀의 성질은 더욱 각각이었다. 곧 견습난동(堅濕煖動)으로서,
딱딱한 것(堅 : 地)을 좋아하는 놈, 습기 차고 물렁한 것(濕 : 水)을
좋아하는 놈, 따뜻한 것(煖 : 火)을 좋아하는 놈, 요동치는 것(動 : 風)을 좋아하는 놈이 함께 모여 있었다.
신하는 자기를 신임하는 임금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정성껏 광주리 속의 뱀을 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네 마리 뱀의 특성이
서로 달라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정성껏 돌보아주는 자기를 틈만 나면 죽이려 하였다.
날이 갈수록 뱀 키우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깊어지자, 신하는 어느 날
높은 벼슬을 버리고 피안의 세계를 향해 길을 떠났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독사에 의해 죽음을 당하거나 왕의 손에 목숨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열반의 경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이 이야기에는 다섯 명의 포졸, 여섯 채의 빈 집, 여섯 명의 도둑, 주막집 여인, 강, 뗏목 등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한참 동안 더 계속되지만 지면관계상 여기까지만 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비유 담에서 네 마리 독사 이야기를 가장 앞에 둔 까닭이 있다.
바로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이는 무엇보다 먼저 네 마리 독사로 비유된 사대,
곧 이 몸에 대한 애착부터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야기 속의 네 마리의 뱀과 같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도
그 성질이 매우 고약하다. 조금만 열 기운이 있어도 다른 요소들은
'나 죽는다'며 야단이고, 물기가 조금만 없어도 탈수 현상을 일으켜 병이 든다.
또한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만 바람이 들어 풍(風)이 오게 된다.
나아가 이 몸에서 숨이 끊어지면 머리카락· 털· 손톱· 치아의 발모조치(髮毛爪齒)와
피부·살·힘줄·뼈의 피육근골(皮肉筋骨), 골수· 뇌 및 빛깔과 모양이 있는 것들은
전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침· 콧물· 고름· 피 등과 몸에서 생겨나는
갖가지 액체는 모두 물로 돌아간다. 또한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몸을 움직이는 힘은 바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기운 중에서 삶이 죽으면 바람 기운이 제일 먼저 빠져나가게 되므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몸이 먼저 굳어지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따뜻한 기운이 없어지게 되어 몸이 싸늘하게 식어간다.
또한 죽고 나서 사흘 이내로 몸의 모든 물기가 빠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코·입·항문 등의 모든 구멍을 솜으로 막아 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 기운이 모두 빠지고 나면 몸이 홀쭉하게 줄어들어서 껍데기와 뼈만 남게 되고,
마지막으로 온 몸은 썩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처럼 사람의 몸은 모두 흙·물·불·바람으로 돌아가고 마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몸을 함부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몸은 감로수를 담고 있는 감로병과 같다.
감로병에 구멍이 뚫리면 감로수를 보존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이 몸을 학대하거나 무참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오욕락(五慾樂)에 빠져드는 것이 이 몸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 이상 더 큰 착각도 없다.
오욕 락에 빠지면 몸은 더욱 빨리 망가지게 된다. 맛있는 음식,
이성과의 잦은 관계. 밤낮을 잊고 행하는 노름·도박 등…….
그 결과는 사대의 부실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사대의 붕괴로 끝을 맺게 된다.
사대의 붕괴. 그것은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나를 위하고 쾌락을 위하여 남의 희생을 자초하게 한 데 대한 업(業)만을 걸머지고
삼악도로 향한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부디 네 마리 뱀. 이 몸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자.
그냥 감로수를 담고 있는 감로병 역할만 제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을 돌보자.
그리고 욕심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을 비워보자. 이렇게 몸을 돌보고 마음을 비우면
삼악도는 우리들 주위에서 얼씬도 할 수 없다. 또한 도심(道心)은 저절로 자라게 된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
정녕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과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가? 앞에서 꿈같은 인생, 불타는 집 속에서 사는 인생,
사대로 구성된 이 몸의 노예가 되어 사는 인생을 이야기할 때
은근히 답을 밝혔지만, 그 방법은 참으로 간단하다.
애착을 비우고 소유욕을 비우는 것이다. 처음부터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을 기르고 무소구행(無所求行)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나'의 것으로 만들려는 생가에서부터 시작된다.
곧 구(求)하고 소유하려고 하면 괴로움이 뒤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구하고 더욱 많이 소유하고자 한다.
사람도 내 사람, 물질도 '나'의 것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자연히 모든 것을 '나'쪽으로 끌어당기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욕구는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도 내가 원하는 것을 잡아당기게 된다.
이렇게 양쪽에서 서로 끌어당기니 경쟁심이 불 붙고, 경쟁을 하다가 이기면
승리했다며 뽐내게 되고 지게 되면 실망과 패배감에 젖어 괴로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놀음이다. 이러한 중생놀음을 벗어나려면 한 쪽에서 놓아버려야 한다.
놓아버리고 살아야 한다. 죽으면 죽, 밥이면 밥, 형편대로 인연에 맞추어 살 일이지
무리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무리하게 살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기고,
부작용이 생기면 괴롭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인과응보요 과거 전생의 업연(業緣)따라 될 뿐이다.
욕심대로라면 못 이룰 일이 없지만 현실은 전혀 달리 나아간다.
이 일 저 일을 기웃거리지만 뜻과 같이 되지를 않는다. 돈벌이가 될 일이라고 하면
너도나도 달려들지만 많은 돈을 번 사람은 과연 몇이며, 명예를 얻고자 하는 이는 많지만
후세에까지 길이 명예로운 이름을 남긴 사람은 몇이며,
권좌에 오르고자 하지만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는 자가 어디에 있던가?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처처(處處)에 탐착(貪着)하여 구하고 소유하고 이루고자 하지만,
결과는 전혀 엉뚱한 데로 귀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뿐만이 아니다.
구하는 것이 크면 클수록 탐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괴로움도 크게 돌아오는 법이다.
왜 뻔한 결과를 직시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며 살아가는가?
지혜롭게 마음을 닦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하늘이 자기 먹을 것 없는 사람을 내어놓는 법이 없고
땅이 이름 없는 풀을 자라나게 하지 않는다.(天不生無錄之人 地不長無名之草)"는 이치를 알고 있다.
누구든지 분수를 따라 먹고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등바등 산다고 하여 더 잘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 지혜롭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 생각 잘 돌이켜 탐착을 벗어버리는 것이 지혜이다.
흔히 말하는 부자들은 세상 돈을 모두 '나'의 것으로 만들어도 만족하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먹고 쓰고 남은 것은 다 남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을 만큼 먹고 쓸 만큼 쓰면 그뿐, 더 이상 탐착 할 까닭이 없다.
오는 것을 애써 막으려 할 것도 없고 가는 것을 굳이 잡으려 하지도 않는다.
애써 구하려는 생각이나 소유하는 생각 없이 인연 따라 마음을 편안히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편안히 분수대로 만족할 줄 알라
욕심이 적으면 유쾌하고 행복하여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부귀이니
언제나 청빈 속에 편히 머물지니라
安分知足 小欲快樂
知足富貴 安住淸貧
행복이란 결코 아등바등하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있으면 더 크게 다가온다. 자유도 마찬가지요. 부귀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꼭 '나'에게로 오도록 되어 있다.
참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부귀를 누리고자 한다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탐착을 버리고 본분을 지키며 살면 꼭 필요하고 좋은 것들은 저절로 찾아든다.
내 나이 17세 때인 1946년 정월 27일, 은사스님이신 윤고경(尹古鏡) 노장 님이 입적하시자
절 살림을 동화스님이 맡아서 살았다.
그때 외삼촌인 영천스님이 오셔서 선 수행(禪修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셨는데,
마침 동화스님이 열 개도 더 되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춤에 차고 '철거덕'거리며 지나갔다.
그러자 영천스님께서 물었다.
"일타야, 저 쇳대 꾸러미를 보고 뭘 생각했노?"
"뭘 생각해요?"
순간, "재물 쌓고 색 밝히면 염라대왕이 감옥을 열고 청정행자는
아미타불께서 연화대로 모셔가네"라는 <<자경문>>의 구절이 떠올랐다.
'아, 저것이 지옥문을 여는 열쇠다. 저 열쇠가 염라대왕의 감옥 문을
여는 것이다. 나는 결코 살림살이하는 중이 되지 않으리라.'
그때 살림살이를 하지 않기를 결심한 이래
오늘날까지 절 살림 사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실로 출가수행자의 할 일이 무엇인가?
공부밖에 없다. 취할 것은 오직 공부뿐이다.
승려가 재물을 관리하고 모으는 것은
염라대왕의 감옥과 인연을 맺는 것 이상의 성가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승려이므로 승려의 본분대로 수행하면 그뿐이다.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면 수행의 결실은 물론이요,
먹을 것 입을 것 등은 저절로 찾아들기 마련이다.
모름지기 우리 불자들은 각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구하는 바 없는 불사(佛事)를 행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눈길 닿는 것마다 몸이 가는 곳마다 탐착하는 삶이 아니라, 근본을 돌아보고 본분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행복과 자유와 부귀가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시절이 없다고 하여 결코 방황하여서는 안 된다.
이러한 때일수록 욕심을 비우며 마음을 가다듬고 정법(正法)으로 살아야 한다.
더욱 더욱 기도하고 참선하고 좋은 불서를 읽으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야 한다.
고요한 마음으로 탐착심을 떠난 불사(佛事)를 이루어 보다.
모든 괴로움과 불행은 저절로 사라지고 자유와 행복이 깃 들게 된다.
하찮은 듯한 이 말이,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이념과 정반대 편에 있는
이 무소유의 가르침이 꿈을 깨우고 불을 끄고 사대색신(四大色身)을
다스리는 비결이 된다.
바라옵건대 우리 불자들이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오유지족(吾唯知足) 속에서
구하는 바 없는 불사를 행하고,
이 어려운 시절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복되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여지리다.
출처 :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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