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 한율아!
하루가 다르게 날이 더 선선해지는 듯하구나. 가을이 한층 깊어지기 시작하는 느낌이야. 밤새 찬 이슬이 흠뻑 내리는가 하면 요란스럽게 울어대던 한밤의 풀벌레 소리가 한결 뜸해지는 것 같아. 온갖 풀과 나무들의 잎 색이 다감한 느낌의 가을빛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가을꽃들이 조용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이즈음 핀 가을꽃은 무리를 이룬 노란 눈괴불주머니, 자주와 노랑 물봉선, 그리고 제철은 좀 지났지만 큰 키의 하늘색 개미취 꽃이 아직도 남아있어. 이제 막 한가을 꽃 쑥부쟁이와 산국이 피기 시작하고, 풀숲 사이 파란빛의 용담 꽃 한두 떨기가 서늘하니 시원하게 눈에 들어오는구나. 그런데 할아버지의 눈에 보다 가을다운 느낌으로 선연하게 들어오는 것이 있어. 주황색 열매를 달고 있는 꽈리와 하늘을 향해 활짝 문을 열고 푸른 하늘 속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무리야. 이 두 식물은 할아버지 어린 시절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기에 이곳 농원에서도 자라고 있는 그 모습이 매우 정겹게 느껴지는구나.
할아버지의 오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꽃들은 봄철의 참꽃 진달래, 제비꽃/반지꽃 바이올렛, 싱아와 찔레꽃, 여름의 지난번에 편지에 썼던 봉선화와 맨드라미, 그리고 분꽃과 같은 것들이야. 또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가 생각나. 마치 등불을 켠 것과도 같이 울 밑에 빨간 등황색 열매를 달고 있던 꽈리도 기억에 남아있어. 모두 할아버지의 시골집 뜨락이나 주변의 산자락에서 보던 것들인데 지금껏 잊히어지지 않고 보다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아나는구나.
어린 시절 할아버지 기억 속의 꽃들은 생각해보면 모두가 어떤 놀이나 필요 때문에 가꿨던 것이었어. 오로지 그 꽃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사랑스러움 같은 것을 위해서 그저 심은 것은 아니었어. 그때는 거의 모든 사람이 가난하고 여유가 없었기에 순수하게 꽃을 보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가 않았어. 농작물을 재배해야 할 농토가 늘 부족해서 정원이나 널찍한 화단을 가꿀만한 여분의 땅을 남겨두는 것은 하나의 사치가 아닐 수 없었지. 대부분이 농사일에 시간을 쏟아야 했기에 정원을 가꾸는데 시간을 내기도 어려운 처지였고.
이를테면 여름철에 많이 가꿨던 봉선화, 맨드라미, 분꽃과 같은 것들은 모두 넓은 화단이기보다는 울타리나 담장 밑과 같은 좁은 공간에다 심고는 했어. 봉선화는 여자들이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기 위해서, 맨드라미는 송편이나 술떡을 만드는데 고명을 얹는 재료를 얻는 용도로 심어 가꿨어. 분꽃은 꽃이 지고 나면 까만 껍질을 가진 씨앗이 생겨. 그 씨앗이 잘 익으면 그것을 바싹 말려서 돌절구에 넣고 곱게 갈아서 보드라운 가루를 만들어. 그 분꽃 가루는 여자들의 미용에 쓰는 분가루로 활용되었어.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고급 화장품은 구할 수가 없었지. 그런 때문에 분꽃 씨앗으로 손수 만든 분가루로 얼굴 화장을 했어.
가을의 이즈음에 등황색 열매를 익히는 꽈리는 일종의 장난감 놀잇감으로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었어. 하트 모양의 동그란 주황색 꽈리 열매의 집 안에는 그 껍질 색깔보다 더 짙은 주황빛의 동그란 열매가 들어있어. 또 그 열매 속에는 깨알보다도 더 작은 노란 씨앗이 가득 들어있지. 그 열매의 꼭지 안으로 가느다란 옷핀 같은 것을 조심스레 집어넣어서 열매 속에 있는 씨앗을 끄집어내. 그러면 그 열매는 꼭지 부분에 아주 조그만 구멍이 있는 작은 공이 만들어진단다. 이걸 꽈리라고 부르지. 꽈리를 입안에 넣고 그 속에 들어있는 공기를 빼면서 기술적으로 불면 삑~삑~ 또는 꽈르르~꽈르르~ 소리가 나. 할아버지의 누나인 비와 율이의 왕고모 할머니는 어렸을 때 꽈리를 아주 잘 만들었어. 하지만 꽈리는 열매의 껍질이 약해서 이내 망가져 버리고는 했지. 그래도 누이는 다시 또 새로운 꽈리를 만들어 불고는 했어.
이처럼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 시절의 꽃들은 지금도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단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살아가던 일제시대(1910~1945) 때에는 우리 가까이에 있던 봉선화가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고는 했다고 하지. 또 그 당시 잃어버린 모국을 떠나 해외에서 실향민으로 살아가던 이국의 동포들은 봉선화나 꽈리와 같은 꽃들을 보며 잃어버린 나라를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해. 1920년대에 우리나라를 떠나 독일로 건너간 이미륵이란 사람은 우체국에 다녀오는 길에 빨간 꽈리가 달려 있는 독일인의 어느 정원에 멈춰서서 한동안 고향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겨 있었다고 해. 그를 본 그 집의 주인이 꽈리 가지를 하나 꺾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하고(『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1946년).
할아버지 유년(幼年: 어린 시절)의 꽃 중에서 그것을 열심히 가꾸는데 손을 보탰던 것이 하나 있단다. 코스모스(Cosmos)야. 가을의 꽃 하면 쉽게 연상되는 꽃이 코스모스이기도 하지. 소슬한 가을바람에 하늘하늘 일렁이는 코스모스, 높아진 하늘의 푸른 바다에 빠진 듯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하게 흔들리는 한 무리의 코스모스... 그 자태의 고요함과 청초함, 가녀리고 수줍은 모습의 애잔함과 수수로움... 신이 맨 처음으로 꽃을 만들다 보니 그 손길이 서툴기만 해서 볼품이 없는 어설프고 모자란 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는 꽃이 코스모스지. ‘신의 실패작’인 셈인데 신이 만든 최후의 완성품은 국화라고 하지. 하지만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이 있어.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말인데, 코스모스의 모습은 무엇인가 어설픈고 많이 서툴러 보이지만, 다소곳한 그 모습에서는 담담한 아름다움, 소박한 우아함이 묻어나고, 아련한 애수(哀愁: 가슴에 스며드는 슬픈 마음)가 느껴지는 아주 각별한 꽃이 아닌가 싶구나.
코스모스는 할아버지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해마다 심었던 꽃이야. 다른 화초도 함께 심었을 텐데 기억에 남아있는 건 코스모스뿐. 마을의 벌판 한가운데 자리해 있던 초등학교 한편으로는 아랫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이어지는 신작로 길이 있었어. 우리는 학년별로 구간을 정해서 그 길가는 물론 널따란 학교 운동장 주변과 학교 정문에서 학교 앞 정원에 이르는 곳곳에 코스모스 씨앗을 뿌리기도 하고 모종을 심기도 했어. 코스모스는 10월의 어느날 하루 가을운동회가 열릴 때쯤이면 한창 꽃을 피워.
한편 어린이들 누구나 한번쯤은 예쁜 단풍잎과 코스모스를 책갈피에 넣어 두고는 했지. 단풍잎이야 거의 그대로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책갈피에 눌린 코스모스는 마르면서 그 빛깔은 다소 바래져서 여리고 가녀린 잎과 꽃의 본 모습은 더욱 가볍고 부드러워지지.
요즈음 농원에도 코스모스가 한창이구나. 중국말로 코스모스를 ‘秋英(추영; Qui-Ying), 가을꽃이라고 부르는데, 계절이 가을의 한중간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듯해. ‘우주(Cosmos)’라는 의미의 또 다른 뜻을 지니는 코스모스는 우리의 토박이 꽃이 아닌 외국으로부터 들어와서 우리의 땅에 귀화한 식물이야. 이 꽃의 고향인 멕시코의 사람들이 이 꽃을 코스모스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그에게 ‘살사리꽃’이라는 아주 살가운 느낌의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지. 서양에서는 국화과 식물의 하나인 이 코스모스를 ‘멕시코 애스터(Mexican Aster)’라고 불러. 3만 2천여 종(種)에 이르는 국화과 식물 중에서 약 170종에 이르는 애스터 속(屬) 식물의 하나인데, 이 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의 노랑코스모스(Yellow Cosmos)도 있어. 코스모스의 느낌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이름은 베트남 사람들이 코스모스를 부르는 이름인 듯해. 그들은 코스모스를 ‘Hoa Bướm(호아 부엄; 나비꽃)’이라고도 부르기도 해. 그들이 발행한 우표를 보면 알 수 있어. 나비는 아니지만, 분홍과 연분홍의 코스모스 꽃 모습이 꼭 나비를 닮지 않았니?
오늘은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가까이에 있던 정감이 어린 꽃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구나. 찬 바람이 불며 쓸쓸해지기 시작하는 가을의 길목에서 그립워지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다음 주에는 이들 못지않게 서정적인 가을의 기운을 느끼게 하고, 쓸쓸한 마음에 따스하게 들어와 주는 들국화 이야기를 해보고 싶구나. 요즘 아침저녁의 기온 차이가 무척 크더구나. 더욱 쌀쌀해질 텐데 감기 걸리지 않도록 건강 잘 돌보기 바란다. (2022.9.29)
첫댓글 어린 시절로 돌아가 봉선화, 코스모스, 꽈리꽃의 향수에 젖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잊혀져가는 기억을 되살려 기록으로 남겨 주니 기념비적 글로 남을 것 같군요. 어비동천에는 화초가 별로 없는데 마음의 정화를 위하여 다년생 화초씨를 곳곳에 뿌려두어 내방객들과 봄 ,여름, 가을 꽃향기를 함께 흠향하고 싶군요.
서울에 살면서도 시골 향취를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서양에서는 170여종의 코스모스, 중국에서는 가을꽃, 베트남에서는
나비꽃등 많이 배웁니다.
실로 오랫만에 꽈리 구경을 합니다!
별다른 놀이기구도 없던 시절에 어쩌면 그다지도 소중했던지! 그나저나 다양한 종류의 우표 수집 역시 대단한 취미활동이군요~
아! 가을이군요. 통학길에서 보았던 코스모스 꽃, 아련한 추억이 되었네요. 김상희 ㅋㅗㅅㅡㅁ ㅗ ㅅ ㅡ 한들한들
꽈리를 본지 오래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생각에 젖게 하는군요.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핀 코스모스도 참 아름답습니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가는 고향 길에 핀 코스모스에 설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봉선화,맨드라미,코스모스,꽈리,분꽃 등, 타임머신처럼 옛시절로 데려가 주네요.
어렸을 때 꽈리를 잘 불고싶은데, 매번 찢어져서 속상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추억의 시간에 잠시 머물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푸르고 맑은 하늘이 너무 보기 좋아요. 이곳에는 우기철이라 가을이지만 우리나라처럼 천고마비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기온도 쑥 내려가 새벽 기온이 5도 내외로 쌀쌀하여 바람이 부는 날이면 체감온도는 초겨울입니다. 우중충한 날씨를 보다가 사진으로나마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산들산들 바람에 흔들흔들 코스모스. 가을을 만끽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