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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5부 3
“표트르 페트로비치”하고 그녀는 외쳤다. “아아, 당신만이라도 내 편을 들어주세요! 저 짐승 같은 년에게 일러주세요. 불행을 당한 고결한 부인에게 이럴 수는 없다, 이런 무례한 짓을 하면 재판소에서 벌을 받는다고요....나는 총독님께 직접 말씀드리겠어요....저런 년은 경을 쳐야 해요....제발 우리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저 고아들을 보호해주세요.”
”실례지만 부인....실례지만 저 잠깐......“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손을 내저었다.
”부친과는 당신도 아시다시피 한 번도 만나뵐 영광을 갖지 못했습니다......이것 보세요, 부인!(누군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과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끊임없는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나는 내 용무 때문에 왔으니까요. 나는 지금 당신의 의붓딸 소피야....이바노브나에게.....급히 좀 할 얘기가 있습니다....확실히 이름은 그렇죠? 자, 비켜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며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옆을 지나 소냐가 있는 반대편 구석 쪽으로 걸어갔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그곳에 멍청히 서 있었다. 그녀는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어째서 자기 아버지와의 교분을 부정했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일단 이 교분을 생각해낸 후부터 그녀는 그 공상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사무적이며 매정한, 모욕적인 위협에 가득 찬 태도는 그녀를 몹시 놀라게 했다. 그리고 좌중의 사람들도 그가 나타나자 왜 그런지 차츰 조용해졌다. 더구나 이 ‘사무적인 딱딱한’ 사나이는 그 자리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슨 중대한 용건이 있어서 온 것 같았다. 그로 하여금 이런 자리에 나타나게 한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 듯싶었다. 그렇다면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만은 능히 추측할 수 있었다. 소냐 옆에 서 있던 라스콜니코프는 그를 지나 보내기 위해 조금 옆으로 물러섰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잠시 후 레베쟈트니코프의 모습도 문지방에 나타났다. 방안으로는 들어서지 않았으나 역시 특별한, 놀라움에 가가운 호기심을 띤 채 그 자리에 서서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뭐가 뭔지 오랫동안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 방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점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건이 제법 중대하므로.....“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특히 누구에게 말한다기보다는 그저 막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나는 오히려 여러분이 모여 계시는 이 자리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당신은 이 집 주인의 입장에서 지금부터 시작하는 나와 소피야 이바노브나의 대화를 특히 주의해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소냐를 향해서 말을 계속했다. ”실은 나의 친구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의 방에서, 아까 당신이 다녀간 직후에 내 소유인 100루블 지폐 한 장이 탁자에서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는 어떻든 간에 당신이 만일 그 돈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셔서 가르쳐주시기만 한다면, 나는 명예를 걸고, 또 여기 계신 여러분을 증인으로 삼고 맹세하겠습니다만, 이 사건을 불문에 부치고 말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나는 부득이 비상수단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당신은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방 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울고 있던 아이들까지 잠잠해졌다. 소냐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선 채 루쥔의 얼굴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몇 초가 지났다.
”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뚫어지게 소냐를 바라보며 루쥔이 물었다.
”나는 몰라요....아무것도 몰라요.“ 소냐는 갸날픈 음성으로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모른다고? 모르신다고요?“ 루쥔은 되묻고 나서 다시 몇 초 동안 입을 다물었다. ”잘 생각해보시오, 마드무아젤.“ 엄격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이르는 말투로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봐요, 당신에게 좀 더 생각할 시간의 여유를 드려도 좋습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만일 확신이 없다면, 나만큼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 부턱대고 당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모험을 할 리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정면에서 공공연히 근거 없는 죄를 씌운다면 설사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그만한 일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은 오늘 아침 나는 쓸 데가 있어서 액면 총액 3천 루블의 5푼 이자가 붙은 채권을 현금으로 바꿔 왔습니다. 그 계산은 지갑 속에 기록돼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가 그 증인이지만 - 그 돈을 세기 시작해 2천 300루블까지 세어서 지갑에 넣고 그 지갑을 푸록코트 옆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탁자 위에는 지폐로 500루블쯤 그대로 남아 있었지요. 그 가운데 석장은 100루블 지폐였습니다. 당신이 들어오신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내 부름을 받고 말이오. 그리고 거기 있는 동안 당신은 무척 당황하는 태도였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세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웬일인지 황급히 나가려고 서둘렀습니다. 이것도 전부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가 증명해주실 겁니다. 마드무아젤, 당신은 아마 이 사실만은 부정하지 못하고 내 말을 그대로 인정해주시리라 믿습니다만. 내가 안드레이 세묘느이치를 통해서 당신을 부른 것은, 다만 당신의 계모이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나는 추도식장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만- 사고무친이 되신 딱한 형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이분을 위해서 무슨 의연금 모금이나 자선 제비뽑기라도 계획하면 얼마나 뜻있는 일일까 생각해 그것을 상의할 목적에서였습니다. 당신은 나의 그런 의견에 고마워하고 눈물까지 흘렸습니다.....나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째로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요, 둘째로는 아무리 사소한 일도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당신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나는 탁자 위에서 10루블 지폐를 집어서 당신 계모를 위한 생활비 부조라는 명목으로 당신에게 드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안드레이 세묘느이치의 눈앞에서 행해진 사실입니다. 그 뒤에 나는 당신을 문 앞까지 배웅했습니다. 그때도 역시 무척 당황하는 눈치였지요. 그 후에 나는 안드레이 세묘느이치와 단둘이 한 10분 쯤 이야기했습니다. 이윽고 안드레이 세묘느이치도 나갔으믈, 나는 지폐의 셈을 마치고 전부터 생각한 대로 그것을 따로 간수해두려고 돈이 놓여 있는 탁자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돈에서 100루블짜리 한 장이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 여기서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고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를 의심한다는 건....나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상상하는 것조차 부그러울 지경입니다. 그러나 내가 계산을 잘못했다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오기 1분 전에 한 번 죄다 세어본 결과 총액이 틀림없음을 확인했으니까요. 당신 자신도 아시겠지만, 당신이 조마조마해하던 모습이며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조급히 돌아가려던 일, 그리고 당신이 한동안 탁자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본 결과, 더구나 현재 당신의 사회적 환경과 거기 관련된 습성을 고려한 결과, 무서운 일이기는 하지만, 또 나 자신의 의지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한 가지 의심을, 물론 잔혹합니다만, 당연한 혐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단 말입니다! 덧붙여 말합니다만, 나에겐 충분하고도 명확한 학신이 있음에도 이런 고발이 나로선 역시 일종의 모험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시는 바와 같이 나는 그냥 우물쭈물 덮어둘 수가 없어서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가증스러운 배은망덕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는 당신의 가난한 계모를 동정한 나머지 일부러 당신을 불러서, 나로서 할 수 있는 한도, 즉 10루블이라는 돈을 당신에게 희사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당장 그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보답하다니, 될 말입니까! 아니, 이건 정말 좋지 못한 일입니다! 당신에겐 교훈이 필요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나는 당신의 진실한 친구로서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나 이상의 친구는 이 순간 당신에게 있을 수 없으니까요. 제발 정신을 차려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나는 당신한테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습니다“하고 소냐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나한테 10루블을 주셨어요. 자, 도로 받아주세요.“ 소냐는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매듭을 찾아 풀고 10루블짜리 지폐를 빼서 루쥔에게 내밀었다.
”그럼 나머지 100루블짜리 지폐에 대해서는 모르신다는 겁니까?“ 그는 돈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책망하는 어조로 다그쳐 물었다.
소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무서운, 엄격한, 조소하는 듯한, 증오에 찬 얼굴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흘긋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슴에 팔ㄹ짱을 낀 채 벽 옆에 서서 불타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아, 하느님!“하는 외침이 소냐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경찰에 알려야겠으니 수고스럽지만 우선 이 집 문지기를 불러주십시오.“ 조용하고 상냥한 어조로 루쥔은 말했다.
”Gott der Barmherzige!('정말이지 기가 차는 일이군요‘라는 뜻) 나도 저 애가 훔친 것을 알고 있었어요!“하고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손뼉을 쳤다.
”당신도 알고 있었다고요?“ 루쥔은 얼른 말끝을 잡았다. ”그렇다면 전부터 그렇게 추측할 만한 근거가 다소라도 있었군요. 그럼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방금 하신 말씀을 제발 잊지 말아주십시오. 물론 증인도 많이 있지만요.“
갑자기 사방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방 안은 소란해졌다.
”뭐! 뭐라고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소리쳤다. 그리고 마치 묶였던 쇠사슬이 끊기기라도 한 듯이 루쥔에게 덤벼들었다.
”뭐라고? 당신은 이 애를 도둑년으로 모든 건가요? 이 소냐를? 아아, 정말 비열한 사람들이군요!“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소냐 옆으로 달려가서 그 깡마른 손으로 으스러질 정도로 꼭 껴안았다.
”소냐! 너는 왜 저따위 사람한테서 10루블을 받아왔니? 바보 같으니! 그 돈 이리 내라! 어서 그 10루블을 이리 줘, 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소냐의 손에서 돈을 빼앗아 손아귀에 꾸겨 쥐더니 손을 세차게 흔들어 루쥔의 얼굴에다 홱 던져버렸다. 구겨진 종이 뭉치는 루쥔의 눈에 맞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달려가서 그 돈을 집었다. 루쥔은 벌컥 화를 냈다.
”이 미친년을 잡아 묶어라!“하고 그는 고함을 쳤다.
이때 문가엔 레베쟈트니코프와 나란히 몇몇 얼굴이 더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는 시골서 올라온 모녀도 끼어 있었다.
”뭐라고? 미친년? 내가 미친년이라고? 이 얼간이 같은 놈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외쳐댔다. ”이 바보, 악덕 변호사. 짐승 같은 놈아! 소냐가, 우리 소냐가 네놈의 돈을 훔쳤다고? 소냐가 도둑이라고! 소냐는 도리어 네게 돈을 줄 애야, ,이 날강도 같은 놈아!“ 이렇게 말하더니 그녀는 갑자기 히스테리라도 일으킨 듯이 깔깔 웃어댔다. ”여러분, 이런 바보를 봤습니까?“ 그녀는 모두에게 루쥔을 손가락질해 보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외쳤다.
”아아! 네년도 마찬가지야!“하며 그녀는 갑자기 집주인 여자에게 대들었다. ”이 소시지 같은 년아, 너도 지금 덩달아서 소냐가 훔쳤다고 맞장구를 쳤지, 치마를 걸친 더러운 프로이센의 닭다리 같은 년아! 하나같이 모두, 모두 똑같은 놈들이야! 우리 소냐는 거기서 돌아오자마자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았어, 이 바보 새끼야! 여기 로지온 로마느이치와 나란히 앉아 있었단 말이야!.....그러니 그 애를 조사해봐라! 아무 데도 나간 일이 없으니까 만일 훔쳤다면 그 애 몸에 그 돈이 있을 게 아냐! 어서 조사해봐! 그렇지만 만약 돈이 나오지 않으면 그땐 널 그냥 놔두지 않겠다! 나는 황제 폐하께, 인자하신 폐하께 뛰어가서 용상 발밑에 엎드려 탄원할 테다. 지금 곧, 오늘 당장에라도! 나는 의지할 곳 없는 과부야! 내가 가면 들여보내줄 거다! 넌 내가 들어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잠꼬대 같은 소린 마, 갈 수 있어, 갈 수 있고말고! 너는 우리 소냐가 온순하니까 그걸 약점 삼아 그따위 흉계를 꾸몄지? 너는 그걸 목표로 했지? 그러나 이봐, 난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단 말이야! 이제 그 본성이 드러날 거다! 자, 조사해봐, 조사해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정신없이 루쥔의 손을 잡고 소냐 쪽으로 잡아끌었다.
”나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겠어요. 그러나 좀 진정하십시오, 부인, 진정하세요! 당신이 이렇게 대단한 성질이란 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이건....자, 이건, 어쩌면 좋지?“ 루쥔은 중얼거렸다. ”이건 경찰 입회하에 하는 건데....하긴 지금 여기 증인은 지나칠 정도로 많으니까....내가 해도 좋긴 합니다만....그러나 역시 남자로선 좀 거북합니다....뭣 보다 상대방이 여성이니까....만일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손을 빌려주신다면.....하지만 그럴 수도 없고....대체 어떤 방법으로 조사해야 좋을지?“
”누구든지 좋아요! 누구든지 하고 싶은 사람에게 조사를 시켜봐요!“하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외쳤다.
”소냐, 저 사람들에게 호주머니를 뒤집어 보여라! 자, 자! 쓰레기 같은 놈아, 자세히 봐라, 자, 호주머닌 비어 있다! 손수건 말고는 텅비어 있어! 알았는냐! 이번엔 딴 호주머니, 자! 자, 보이느냐! 보여!“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소냐의 호주머니를 거꾸로 털어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양쪽 주머니 속까지 까서 뒤집어 보였다. 그런데 두 번째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별안간 종이쪽지 하나가 튀어나와 공중에 포물선을 그리며 루쥔의 발 밑에 떨어졌다. 모든 사람이 그걸 보고 있었다. 모두 앗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루쥔은 몸을 굽히고 두 손가락으로 종이쪽을 집어 올리더니, 모두가 볼 수 있게 펼쳐 보였다. 그것은 여덟 겹으로 접은 100루블짜리 지폐였다. 루쥔은 손을 휘휘 내두르면서 모두에게 그 지폐를 보였다.
”이 도둑년!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순경! 순경!“하고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것들은 모두 시베리아로 추방해야 돼! 어서 이 집에서 나가!“
사방에서 외침 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으나 이따금 루쥔 쪽으로 흘긋 시선을 옮기곤 하면서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소냐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었다. 이미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별안간 붉은빛이 얼굴에 확 퍼져 올랐다. 그녀는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녜요, 내가 한 짓이 아녜요! 나는 가진 기억이 없어요!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녀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울부짖음과 함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몸을 던졌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녀의 몸을 얼싸안고, 마치 가슴으로 그녀를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꼭 껴안았다.
”소냐! 소냐! 나는 믿지 않는다! 알겠니, 난 믿지 않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미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는데도) 이렇게 외치고는, 소냐를 두 손으로 아기처럼 흔들며 수없이 키스를 한 다음 손을 잡고 빨아대면서 손에도 키스를 퍼부었다.
”네가 남의 돈을 훔치다니! 어쩌면 사람들이 이렇게 모두 바볼가! 아아, 당신들은 바봅니다. 바보예요!“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며 외쳤다. ”그래요, 당신들은 아직 몰라요, 몰라....이 애가 어떤지, 이 애가 어떤 애인지 모른단 말이에요! 이 애가 훔쳤다고요, 이 애가? 알겠어요, 이 애는, 만일 당신네들이 필요하다면 입고 있는 단벌옷이라도 팔아서 자기는 헐벗고 다닐망정 죄다 줘버릴 애예요. 이 애는 노란감찰가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내 아이들이 굶어 죽게 됐으니까 우리 식구들을 위해 제 몸을 희생한 것뿐이에요! 아아, 돌아가신 우리 주인, 여보! 세묜! 세묜! 이걸 보시나요? 보고 계세요? 이게 당신의 추도식이군요! 아아! 하느님! 이 애를 보호해주세요....아니, 당신네들은 왜 거기 멍하니 서 있죠!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까지도 그렇게 믿고 계시나요? 당신들은 모두, 모두, 모두 이 애의 새끼 손가락만도 못해요! 못해! 아아, 하느님! 제발 이 애를 보호해주옵소서!“
사고무친의 애처로운 폐병환자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눈물은 모두에게 깊은 감명을 준 모양이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뼈와 가죽만 남은 병든 얼굴, 피가 말라붙은 메마른 입술! 정신없이 외쳐대는 목쇤 음성, 어린애의 울음과도 같은 애절한 흐느낌, 믿음에 가득 찬 어린애처럼 순진하게, 그러면서도 절망적으로 보호를 구하는 애원, 이것은 누구나 이 불행한 여자를 측은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가련하고 안타까운 정경이었다. 적어도 소냐의 죄를 고발한 루쥔은 곧 동정의 빛을 나타냈다.
”부인! 부인!“ 그는 달래는 듯한 어조로 외쳤다. ”이건 당신과 조금도 관계없는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이 나쁘다거나 공모했다고 감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당신 손으로 호주머니를 뒤집어서 범행을 폭로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 명백합니다. 만약에 가난이 소피야 세묘노브나로 하여금 그런 짓을 하게 했다면 나는 동정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드무아젤, 왜 당신은 자백하려고 하지 않았죠? 치욕이 무서웠던가요? 처음 저지른 일이기 때문인가요? 혹은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하지만 무엇때문에 이런 짓까지 할 생각이 났을까요? 여러분!“ 그는 모두를 향해서 말했다.
”여러분! 나는 말입니다, 지금 개인적인 모욕까지 받기는 했습니다만, 동정하는 뜻에서 기꺼이 용서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드무아젤, 오늘의 치욕은 좋은 교훈이 될 겁니다.“ 그는 소냐에게서 몸을 돌렸다.
”나도 더는 추궁하지 않기로 하고 이걸로 끝맺겠습니다. 자, 그만둡시다!’
루쥔은 곁눈으로 라스콜니코프를 흘긋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탁 마주쳤다. 라스콜니코프의 불타는 듯한 눈초리는 그를 곧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미 아무런 말도 귀에 들리지 않는 듯싶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냐를 껴안고 키스만 퍼붓고 있었다 아이들도 조그만 손으로 사방에서 소냐에게 매달렸다. 폴레치카는 아직 무슨 영문인지 잘 모르면서도 눈물로 부어오른 귀여운 얼굴을 소냐의 어깨에 파묻고 흑흑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비열한 짓이야!” 이때 갑자기 문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루쥔은 재빨리 뒤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비열한 짓이야!” 레베쟈트니코프가 그를 노려보면서 되풀이했다.
루쥔은 찔끔해서 몸을 떨기까지 한 듯 싶었다. 모두 그걸 알아차렸다. (훗날 사람들은 이때 일을 상기했던 것이다). 레베쟈트니코프는 한 걸음 방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은 뻔뻔스럽게도 나를 증인으로 세우겠다고 말했지요!” 그는 루쥔 앞으로 다가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 자넨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루쥔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이 중상가란 말입니다. 이게 내 말의 뜻이죠!” 레베쟈트니코프는 시력이 약한 조그만 눈으로 상대방을 날카롭게 노려보면서 열띤 어조로 말했다. 그는 몹시 격분한 표정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받아서 저울에라도 달아보듯이 뚫어지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새로운 침묵이 방 안에 군림했다. 루쥔은 특히 처음 한 순간 몹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내게 무슨 말이.......”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야? 자넨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나는 멀쩡한 정신이지만 당신이야말로....진짜 사기꾼입니다! 어쩌면 그토록 비열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었소. 나는 모든 걸 정확히 이해하려고 여태까지 기다렸던 거요.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돕니다. 대체 당신은 무슨 속셈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나로선 영문을 모르겠군요.”
“내가 뭘 어쨌단 말이야! 그다위 어리석은 수수께끼 같은 말은 집어치워! 혹시 자네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건가?”
“그야 당신같이 비열한 속물이라면 술에 취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소! 나는 보드카 따위는 아직 입에 대본 일도 없소. 그건 내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이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 사람은 자기 손으로 저 100루블 지폐를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이 눈으로 봤어요. 내가 증인입니다. 나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레베쟈트니코프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되풀이했다.
“정말로 미친 모양이군. 애송이 같은 놈!” 루쥔이 기를 쓰며 외쳐댔다. “지금도 그 장본인이 여기 자네 앞에 있어. 저 여자가 방금 여기서, 여러 사람 앞에서 자백하지 않았느냐 말이야. 10루블 외엔 나한테 받지 않았노라고. 그렇다면 받지도 않은 돈을 내가 어떻게 주었다는 거야?”
“나는 봤소, 봤단 말이오!” 레베쟈트니코프는 되풀이해서 외쳤다. “이런 일은 본시 나의 신념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나는 당장에라도 재판소에 나가서 어떤 선서든 다 하겠소. 당신이 저 아가시 호주머니에 슬쩍 돈을 찔러 넣는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단 말이오! 그때만 해도 나는 바보라 당신이 자선을 베푸는 줄로만 알았소! 문 앞에서 저 아가씨와 작별할 때, 아가씨가 되돌아석 당신이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당신은 다른 손, 즉 왼쪽 손으로 아가씨 호주머니에 살짝 돈을 찔러 넣었어요. 나는 그걸 보았소! 똑똑히 보았단 말이오!”
루쥔의 얼굴은 갑자기 창백해졌다.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그는 맹렬히 외쳐댔다.
“자넨....창 옆에 서 있었는데 어떻게 돈을 알아보았다는 건가? 자넨 착각을 일으키고 있어. 어떻게 그런 근시안으로, 자넨 지금 잠꼬대를 하고 있어!”
“천만에 착각이 아닙니다! 나는 좀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모든 걸, 모든 걸 똑똑히 보았소. 물론 그 창가에서 그게 돈이라는 걸 분명히 알아보기는 어려웠소. 그건 당신 말대로요. 그러나 나는 다른 특별한 이유로 그것이 100루블 지폐임에 틀림없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10루블 지폐를 줄 때, 나는 잘 보고 있었소만, 그때 당신이 탁자 위에서 100루블 지폐도 집었기 때문이오. 그땐 내가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똑똑히 보았소, 그때 내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올랐으므로, 당신 손에 지폐가 쥐어져 있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당신은 그 100루블 지폐를 접어서 손에 쥔 채 죽 갖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나는 그 일을 거의 잊다시피 했는데,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걸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 쥐면서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한 것을 보고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 또 아까와 같은 생각, 즉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저 아가씨에게 자선을 베풀려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어때요, 내가 그걸 주시하고 있었으리라는 건 상상하실 수 있을 테죠. 그래서 나는 당신이 아가씨의 호주머니에 슬며시 돈을 찔러 넣어주는 걸 보게 된 겁니다. 나는 봤어요, 똑똑히 보았단 말이오. 나는 맹세해도 좋습니다!“
레베쟈트니코프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여러 가지 외침 소리가, 무엇보다도 놀라움을 나타내는 외침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나 위협적인 어조를 딘 외침도 섞여 있었다. 모두 루쥔한테로 몰려들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레베쟈트니코프한테로 달려갔다.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 나는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습닏! 제발 저 애를 보호해주세요! 저 애의 편은 당신 뿐입니다! 저 애는 불쌍한 고아예요!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주셨습니다!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이렇게 말하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허튼소리 작작 해라!“ 미칠 듯이 격분한 루쥔은 정신없이 소리쳤다. ”자넨 언제나 헛소리만 하고 있어. ‘잊었다, 생각났다, 잊었다’가 뭐냐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지폐를 넣었다는 건가?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도대체 나하고 이 여자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무슨 목적으로? 그렇습니다, 내가 모르겠다는 건 바로 그 점이에요. 그러나 내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내가 잘못 볼 리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더러운 범죄자군요. 더구나 그때 내 머리에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올랐던 걸 지금도 분명히 기억할 정도니까요. 당신에게 감사를 하고 당신의 손을 잡았던 발 그때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사람은 아가씨 호주머니에 몰래 돈을 집어넣었을까? 다른 것은 고사하고, 몰래 집어넣은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내가 반대의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근본적으로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개인적인 자선을 내가 부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저 내게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것뿐일까? 그래서 결국 내가 보는 앞에서 그런 큰돈을 희사하기가 거북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 그 밖에도 어쩌면 이 사람은 그녀에게 뜻밖의 선물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가서 자기 호주머니에 100루블이라는 큰돈이 들어 있는 걸 발견케 해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죠. 왜냐하면 어떤 자선가들은 자기의 선행을 그런 식으로 희롱하기를 퍽 좋아하니까요. 나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이렇게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아가씨의 마음을 시험해보려는 것이다, 돈을 발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오는가 안 오는가를! 그리고 또 이른바 ‘자기 오른손에도 알리지 마라’는 식으로 이 사람은 감사를 피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해봤죠. 아무튼 한마디로 말해서....그때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으므로 나는 모든 것을 나중에 다시 잘 생각해보기로 했던 겁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이러한 비밀을 알고 있음을 당신 앞에 드러낸다는 것은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또 하나의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즉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그걸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혹시 그 돈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나하고 말입니다. 실은 내가 여기 오기로 결심한 것도, 그녀를 불러내어 호주머니에 100루블이 있다고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리 오는 도중에 우선 <실증적 방법의 일반적 추론>이란 책 한 권을 전하고 특히 피데리크의 논문을, 바그너 것도 함께 소개하기 위해 잠시 코브일랴트니코바 부인 방에 들렀었습니다. 그 후 여기 와보니 벌써 이런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겠어요! 자, 어때요? 만약에 내가 저 아가씨 호주머니에 100루블 지폐를 넣는 걸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상상이나 판결을 내릴 수 있겠소!“
레베쟈트니코프는 이러한 논리적 해석을 결론으로 한 기나긴 고찰을 마치자 심한 피로를 느꼈고, 얼굴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아, 그는 러시아 말로도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하기는 다른 나라 말 역시 하나도 몰랐지만)! 그는 이 변호하는 대업을 성취하고 나자 단번에 기력이 쇠진하여 피골이 상접할 만큼 수척해진 것 같았다. 그래도 그의 연설은 놀랄 만한 효과를 가져왔다. 그는 비상한 열의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말했으므로 모두가 그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루쥔은 형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네 머리에 무슨 바보 같은 의문이 떠올랐든,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가!“ 그는 외쳤다.
”그런 건 증거가 될 수 없어! 그건 모두 꿈속에서나 봤겠지! 꿈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단언하건대 자네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자넨 나한테 어떤 악의를 품고 거짓말로 나를 중상하고 있는거야. 내가 자네의 자유사상적인, 무신론적인 사회사상에 공명하지 않는다 해서 원한을 품고 그 앙갚음을 하려는 거라고. 틀림없어!“
그러나 이런 변명은 루쥔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사방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일어났다.
”아니, 이야길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레베쟈트니코프 쟈트니코프는 외쳤다.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군! 순경을 불러라, 나는 증인 선서라도 하라면 할 테니까! 다만 한 가지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이 작자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비열한 짓을 했는가 하는 점이야! 정말이지 가련할 만큼 비열한 인간이군!“
”무슨 목적으로 저 사람이 그런 대단한 짓을 했는지 내가 설명하죠. 만일 필요하다면 나도 맹세하겠습니다!“ 마침내 라스콜니코프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침착하고 단호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언뜻 보기만 해도 좌중에게는 어쩐지 그가 실제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침내 이 사건도 결말에 다다른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제야 나는 모든 것을 분명히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레베쟈트니코프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실은 이 사건이 시작될 때부터 여기엔 무슨 비열한 간계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것은 나만이 알고 있는 어떤 특별한 사정 때문인데, 그것을 지금부터 얘기하겠습니다. 모든 비밀은 거기에 들어 있으니까요!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 당신이 말씀하신 귀중한 증언으로 모든 게 근본적으로 명확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잘 들어주십시오. 저 양반은 (그는 루쥔을 가리켰다) 최근에 어느 처녀에게, 정확하게 말하면 내 누이동생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라슬콜니코바에게 청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에 온 후에, 그저께 나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리 두 사람은 싸움을 했고 나는 저 사람을 방에서 쫓아냈습니다. 여기엔 증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뱃속이 시커멓기로 유명한 인간입니다. 물론 그저께만 해도 나는 저 사람이 이 집 셋방에서 안드레이 세묘느이치와 함께 묵고 있다는 건 전혀 몰랐습니다. 따라서 싸움을 한 바로 그날, 즉 그저께 내가 돌아가신 마르멜라도프 씨의 친구 자격으로 그 미망인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장례식 비용에 보태 써달라고 부의금 얼마를 드린 것을 저 사람이 다 알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그 사실을 곧 우리 어머님한테 편지로 고해바치기를, 내가 갖고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아니라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소피야 세묘노브나의....그 성질에 대해서 지극히 비열한 말을 써 보냈습니다. 즉 나와 소피야 세묘노브나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라도 있는 듯이 암시한 겁니다. 이것은 누구나 추측할 수 있겠지만 내가 육친이 마련해준 귀중한 돈을 좋지 못한 목적에 낭비해버렸다고 중상함으로써 나를 어머니와 누이동생한테서 이간시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젯밤 나는 저 사람 앞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돈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장례식 비용으로 주었지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준 것이 아니며, 소피야 세묘노브나와는 그저께만 해도 알지 못하는 사이였고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는 걸 증명해서 그 일의 진상을 명백히 했습니다. 그때 나는 거기서 덧붙여서, 이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에게 너 따위는 모든 장점을 다 긁어모아도 네가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는 소피야 세묘노브나의 새끼손가락만 한 가치도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내는, 그럼 너는 네 누이동생을 소피야 세묘노브나와 한자리에 앉힐 용기가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날 이미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중상을 해도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나하고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저 사람은, 우리 어머니와 누이동생에 대해서 용서할 수 없는 무례한 언사를 함부로 뇌까려서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결렬이 일어났고, 저 사람은 집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어제 저녁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기서 특히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은, 만약에 지금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도둑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면, 저 사람은 우선 우리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자신의 의심이 정당했음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즉 내가 소피야 세묘노브나와 누이동생을 동등하게 취급한 데 대해서 저 사람이 분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나를 공격한 것은 내 누이동생, 즉 자기 약혼녀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됩니다. 요컨대 이 사건을 통해서 저 사람은 다시 한 번 나를 가족과 이간시킴으로써 우리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환심을 사려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개인적인 복수를 기대했다는 건 세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왜냐하면 소피야 세묘노브나의 명예와 행복이 나에겐 지극히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저 사람은 갖고 있으니까요. 이것이 저 사람이 노린 목적의 전부입니다. 나는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것이 원인의 전부이며, 이외에 다른 원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대충 이렇게 자기의 설명을 마쳤다. 물론 그의 말은 열심히 듣고 있는 사람들의 외침으로 여러 번 중단되긴 했으나, 그런 방해가 있음에도 그는 끝까지 침착한 태도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날카로운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그의 날카로운 음성과 신념에 가득 찬 어조와 준엄한 표정은 모든 사람에게 색다른 감명을 주었다.
”맞습니다, 맞아요!“ 레베쟈트니코프는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우리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에게, 당신이 여기에 와 있는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손님 가운데 당신이 보이는지 물었거든요. 저사람은 일부러 나를 창가로 불러서 슬그머니 그걸 물어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사람은 당신이 이 자리에 꼭 있어주어야만 했던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틀림없어요!“
루쥔은 말없이 경멸의 미소를 디었으나 그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이 자리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그 기회만 노리는 눈치였다. 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시바삐 이 자리에서 도망쳐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자기에게 가해진 비난이 모두 사실이며, 정말로 자기는 소피야 세묘노브나를 중상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술까지 마신 사내들은 대단히 흥분한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식량국 관리는 취중에 내용을 잘 모르면서도 누구보다 떠들어대면서 루쥔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몇 가지 처치 방법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방이란 방에서 구경꾼들이 모여든 것이다. 폴란드인은 셋 다 몹시 분개해서 끊임없이 그에게 ‘저 악당!’이라는 욕설을 퍼붓고 있었으며, 그대마다 뭔가 위협적인 말을 폴란드어로 중얼거렸다. 소냐는 긴장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마치 졸도했다 깨어난 사람처럼 아직도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라스콜니코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의 구세주라고 느꼈기 대문이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괴로운 듯이 씨근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누구보다도 얼빠진 얼굴로 입을 떡 벌린 채 영문을 모르고 서 있었다. 그녀는 다만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어째선지 몹시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만을 보고 알았을 뿐이다.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모두 욕설을 퍼붓고 위협하면서 루쥔의 주위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쥔은 겁내는 기색도 없었다. 소냐를 더 죄인으로 만들려던 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닫자, 그는 느닷없이 뻔뻔스러운 태도로 나왔다.
”잠깐만, 여러분, 잠깐만. 이렇게 밀지 말고 길을 좀 내주시오!“ 그는 군중을 헤치면서 말했다. ”그리고 제발 그런 위협은 하지 마시오. 아시겠어요.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요, 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위협에 넘어갈 사람도 아니니까요. 당신들은 오히려 폭력으로 형사사건을 은폐한 죄로 법 앞에 책임을 져야 할 거요. 여자 도둑의 범행은 완전히 폭로되었으니까 나는 끝까지 추궁하겠소. 재판관은 그렇게 장님도 아니며....주정뱅이도 아니니까, 이 두 친구들, 악명 높은 무신론자, 선동자, 자유사상가인 이 친구들의 말 따위엔 귀 기울이지도 않을 거요. 이자들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내게 복수하려 하고 있소. 이자들은 바보이기 때문에 그걸 자인하고 있어요.....자, 좀 비켜주시오!“
”다시는 내 방에서 냄새도 나지 않게 지금 당장 나가주시오. 이것으로 우리의 관계도 끝난 겁니다! 아아, 생각만 해도 더럽군, 나는 그래도 온갖 힘을 다해서 열심히 설명해주었건만....꼬박 두 주일 동안이나......“
”이봐,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아가 자네가 한사코 만류했을 때도 나는 딴 데로 이사하겠다고 분명히 말해두지 않았느냐 말이야. 이젠 다만 자네가 바보라는 것만 덧붙여둘 뿐이야. 마지막으로 나는 자네의 그 대갈통과 보이지 않는 눈깔을 잘 치료하길 바라겠네. 자,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여러분!“
그는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식량국 관리는 단순한 욕설만으로 그를 놔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탁자 위의 컵을 집자마자 루쥔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빗나간 컵은 보기좋게 여주인에게 명중했다. 그녀는 앗 하고 비명을 질렀다. 한편 식량국 관리는 팔을 휘두르는 바람에 몸의 중심을 잃고 탁자 밑에 쿵 쓰러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서 루쥔은 자기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30분 후에 이미 그의 모습은 이 집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부터 겁이 많은 소냐는 자기가 누구보다 가장 희생되기 쉬운 존재라는 것, 그리고 누구든지 거의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자기를 모욕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바로 이 순간까지 그녀는 모든 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착한 마음씨와 순종하는 태도로 그럭저럭 불행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이번의 환멸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물론 소냐는 무슨 일이든, 심지어 이런 재난까지도 거의 아무 불평 없이 꿋꿋이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순간은 너무나 야속했다. 그래서 지금 자기의 결백함이 증명되어 승리를 얻었음에도, 최초의 경악과 실신 상태가 가신 후 모든 것을 똑똑히 이해하고 깨닫게 되자 자기의 의지할 곳 없는 무기력함과 모욕의 쓰라림이 참을 수 없게 가슴을 억눌렀다.
마침내 그녀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 자기 거처로 달려갔다. 그것은 루쥔이 나간 바로 직후였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컵에 얻어맞고 여러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자 이제는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미친 듯이 악을 쓰면서 덤벼들었다.
”집을 내놔! 지금 당장! 어서 나가!“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 그녀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서 마룻바닥에 내던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칠 대로 지쳐서 금방 졸도할 듯이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이던 가련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그녀는 녹초가 되어 침대 위에 쓰러져 있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쌍방의 힘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마치 새털이라도 불어버리듯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떼밀어버렸다.
”뭐라고!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으로도 부족해서, 이 망할 년이 나한테까지!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남편 장례식 날에, 배가 터지도록 얻어 처먹고선 애들과 함께 거리로 내쫓다니! 나보고 어디로 가란 말이야!“ 가련한 여자는 울부짖고 숨을 헐떡이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오오, 하느님!“ 갑자기 그녀는 눈을 빛내면서 외쳤다. ”이 세상에 정의란 없는 것입니까! 우리 같이 불쌍한 고아를 보호해주시지 않고 누구를 보호하시렵니까? 그러나 두고 봐라! 이 세상에는 반드시 심판도 있고 진리도 있을 게다, 있고말고, 나는 그걸 찾아내겠다! 천벌을 받을 더러운 년아, 어디 두고 보잔 말이다! 폴레치카, 동생을 데리고 여기 있어라, 나 좀 나갔다 올 테니.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밖에서라도 좋으니! 난 나가서 찾아봐야겠다, 이 세상에 진실이 있는지 없는지를!”
이렇게 말하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마르멜라도프가 언젠가 이야기 끝에 말하던 그 녹색 모직물 숄을 머리에 쓰고 아직도 방 안에서 주책없이 서성거리는 셋방살이 주정뱅이들을 헤치면서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으려 거리로 뛰쳐나갔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해서든지 정의를 발견하려는 막연한 목적을 품고서. 공포에 질린 폴레치카는 아이들과 함께 방구석 궤짝 위에 웅크리고 앉아 두 동생을 껴안고 오들오들 떨면서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방안을 뛰어다니면서 울며불며 닥치는 대로 마구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광태를 부렸다. 셋방 든 사람들은 제각기 멋대로 떠들어대며, 지금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저마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가 하면 자희들끼리 욕설을 주고받으며 싸움을 하는 자도 있고, 그중에는 노래까지 부르는 자도 있었다.
‘나도 이젠 가봐야지!’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자, 소피야 세묘노브나, 어디 들어 보자, 이번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는 소냐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