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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 한국 교회 부부 성인들의 삶과 신앙
최선혜 교수 / 가톨릭대학교 인간학교육원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한국 교회 부부 성인들의 삶과 신앙
최선혜(가톨릭대학교 인간학교육원)
<목차>
들어가며
Ⅰ 기해박해에 피어난 부부 성인
1. 기해박해의 발단과 전개
2. 순교와 배교의 갈림길에 탄생한 성인
3. 기해박해가 남긴 것
Ⅱ 부부의 삶과 한국 교회의 부부 성인들
1. 전통시대 부부의 삶과 신앙
2. 가정공동체와 신앙공동체
3. 부부성인들의 삶과 신앙, 그리고 순교
1) 남명혁·이연희 부부성인
2) 남이관·조증이 부부성인
3) 박종원·고순이 부부성인
맺으며 - 오늘날의 부부성인
<내용>
Ⅰ 기해박해에 피어난 부부 성인
1. 기해박해의 발단과 전개
신유년(1801)의 큰 박해 이후 30여 년간 동안이나 조선 천주교회는 목자가 없이 지내야 하였다. 그 기간 동안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박해는 한동안 잠잠하였다. 조선 천주교회는 여전히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성장을 계속하여 갔다. 전국 각 지역에서 보다 많은 이방인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적어도 천주교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되었다. 천주교우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회장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펴 나갔고, 교회 서적도 간행하였으며 신심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업을 펴 나갔다. 특히 체포와 고문과 사형의 공포 속에서도 천주교우들은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한 운동을 지속해 갔다. 정하상 바울로, 유진길 아우그스티노,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등이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을 전하고 선교사를 보내 줄 것을 청하는 서신들을 북경과 남경, 마카오, 로마 교황청에까지 보냈다. 이들의 노력과 교황청의 관심 및 후원으로 1831년에는 조선대목구가 설립되고, 1836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앵베르, 샤스땅, 모방)이 입국하게 된다.
3명의 신부들의 입국으로 조선 천주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당시 서울의 신입 교우의 수는 천명도 넘었다. 앵베르 주교가 도착한 뒤 새로 3명의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성인만 1,994명이었다. 그리하여 6,000명가량이던 신자 수가 이들이 도착한 뒤인 1838년 말에는 9,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 당시 한국의 인구가 1,577,100호에, 남녀 6,684,191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천주교 신자의 수는 1,000명에 1명꼴이라는 상당한 비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838년 말부터 1839년 초까지 앵베르 주교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시골의 신자들을 돌보았다. 모방 신부는 이웃한 도의 신자들을 순회하였으며, 샤스땅 신부는 남쪽 지방의 신자들에게 가 있었다. 선교사들은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임명하거나 승인하였다. 그리고 어린이 대세(代洗)와 혼인·장례·주일·축일 등의 집회 등에 관한 규칙을 정해 줌으로써 신자들의 모임에 조직을 갖추고 보충하게 해 주었다.
선교사들에게 무엇보다도 괴로운 일은 끊임없이 신자들이 붙잡히고 그들의 신앙을 도전받는 일이었다. 여러 마을에서 몇몇 교우들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지 않고 지나가는 달이 없었던 것이다. 붙잡힌 교우들은 고문에 시달리기도 하고, 배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에 직면하여 선교사들에게 곤란한 문제의 하나는 배교한 신자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선교사로서 신자들이 겪는 괴로움을 위로해 주고, 꺼져 가는 신앙의 용기를 북돋워주어 다시 신앙의 열정이 뜨겁게 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긴박하게 느낀 문제 가운데 하나는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있었다. 이미 모방 신부는 1836년 말에 조선 학생 3명을 중국에 보냈다. 앵베르 주교도 3명의 소년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의도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해박해라는 커다란 풍랑이 일게 된 것이다.
기해박해의 발단은 벽파 풍양 조씨가 시파인 안동김씨로부터 정치권력을 탈취하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1834년에 헌종이 8세로 즉위하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 오빠 김유근이었다. 이들로 대표되는 안동김씨 정권은 천주교에 대해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김유근은 유진길의 권유로 1839년에 세례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유근이 은퇴하고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게 되었다. 형조판서 조병헌으로부터 그 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 받은 이지연은 1839년 3월에 천주교에 대한 강력한 대책을 건의하였다. 천주교인은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다는 무부부군을 따르는 역적이므로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사헌부집의 정기화도 호응하여 천주교의 근절을 위하여 그 원흉을 잡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1839년(헌종 5년) 4월 18일에 ‘사학토치령’이 공식 반포되어 가톨릭 신자에 대한 대 탄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러한 박해는 1840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교회 내부에서는 김순성(金順性 또는 김여상)이 밀고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교우라는 이름 아래 각종 모임에 참석하면서 교우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면서 포도청에 가장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의 밀고로 인하여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가롤로,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조신철 사롤로,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 조선 교회의 핵심적인 지도자들이 며칠 사이로 속속 체포되었다. 이 무렵 앵베르 주교는 양감이라는 마을의 피신처에서 신자들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소식을 듣고 있었다. 7월 하순 무렵에 앵베르 주교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자신의 거처로 오도록 하여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고, 교우촌의 신자들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김순성은 포졸들을 이끌고 수리산(지금의 경기도 안양시 안양동)으로 몰려가 최양업 토마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 등 여러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이어 김순성은 온갖 계략을 사용하여 앵베르 주교의 거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결국 앵베르 주교는 8월 10일 스스로 포졸 앞에 몸을 드러내었다.
앵베르 주교의 자수는 조성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체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들이 충청도 지역으로 간 것을 알고 충청도에 포졸들을 파견하고 오가작통법을 더욱 엄격하게 지키라는 훈련을 내렸다. 앵베르 주교는 더 이상 교우들에게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어 자수를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두 신부는 9월 6일에 충청도에서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의금부에 국청(鞫廳)이 설치되고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더불어 유진길, 정하상 등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여러 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9월 21일(음력 8월 14일) 3명의 선교사는 군문 효수형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선교사들을 처형한 뒤 조정에서는 나머지 신자들의 처형도 서둘렀다. 이에 선교사의 뒤를 이어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남이관, 김제준(김대건 신부의 부친) 등 여러 명이 처형되었다. 이 때의 박해를 기해박해라고 부른다. 3쌍의 부부 성인(남명혁·이연희, 남이관·조증이, 박종원·고순이 부부 성인)은 이 기해박해 때 순교한 사람들이다.
2. 순교와 배교의 갈림길에 탄생한 성인
기해박해의 초기인 1839년 3월 20일자 형조판서의 보고에 따르면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도는 모두 43명이었다. 그 가운데 15명은 배교하여 석방되었고, 나머지 28명은 감옥에 남아 있었다. 그 뒤에 다시 16명이 배교하여 석방되었고, 나머지 9명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사형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박해가 시작되자 순교와 배교의 두 갈래길만이 천주교 신자 앞에 놓이게 되었다. 자세한 숫자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거나, 그 휴유증으로 사망하거나, 마침내는 신앙을 지키려 죽음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이 배교를 택하였다는 사실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현실적으로 순교는 죽음이고 배교는 삶이었다. 그러나 순교가 사는 길이며 배교가 죽음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순교를 택하였다. 그것이 흔들리는 사람들은 배교의 길을 걸어가 버린 것이다.
기해박해 시기에 순교한 천주교 신자의 정확한 숫자를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현석문의 “기해일기”에 따르면 이 박해로 말미암아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모두 114명이 넘었다고 되어 있다. “기해일기” 한글본에는 78명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78명 가운데 69명이 1925명 7월 5일에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3. 기해박해가 남긴 것
기해박해는 그 어느 박해보다도 전국적인 규모로 자행되었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강원도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1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되어 순교한 사람이 54명이고, 옥에서 교수되어 죽거나 고문으로 죽은 사람들도 60여명이 된다고 한다. 또한 순간적으로 배교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다시 배교를 철회하고 순교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기해박해로 신자들은 교회의 지도자와 선교사를 잃게 되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 속으로 피신하거나 신자임을 감추고 생활해야만 하였다. 또 교리 서적이 부족하게 되었으므로 아직 신앙이 부족한 사람이나 비신자들에게 말로만 교리를 전하게 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 선교사들의 새로운 입국 경로가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기해박해에 대한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해 오던 페레올 신부는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기 전에 쓴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육로를 통한 입국 경로가 발각되었으니 다른 입국 경로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하는 여러 가지 경로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조선 입국의 길은 다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기해박해가 천주교 포교에 미친 영향도 상당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였던 순교자를 직접적, 간접적으로 보고 듣게 되었다. 그들은 순교자들이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서도 지켜나간 종교를 알고 싶은 욕구가 불타오르게 되었다. 천주교인들의 순교 앞에서 비신자들은 비난과 저주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동정과 안타까움 더 나아가 감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천주교인들의 순교를 통해 서울을 비롯하여 모든 지역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나갔고 주요한 교리가 무엇인가도 알려지게 되었다. 박해는 많은 희생자를 초래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탄생시키는 선교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가운데에서 79명을 선택하여 시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황청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시복에 필요한 사항들을 심사하였다. 그 결과 86년이 지난 1925년 5월에 이들에 대한 시복이 확정되어 7월에 복자품에 올리는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이 가운데 1839년을 전후하여 순교한 복자는 선교사가 3명, 남자가 24명, 여자가 43명으로 모두 70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박해는 순교를 낳았고 그것은 다시 천주교의 확산을 낳은 것이다. 순교자들은 복음의 더 깊은 뿌리를 내리게 하였고, 더 풍성한 가지를 뻗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해박해는 그 뿌리와 가지를 만든 귀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Ⅱ 부부의 삶과 한국 교회의 부부 성인들
1. 전통시대 부부의 삶과 신앙
조선시대는 가족제도와 정치제도가 밀접하게 결합된 시대였다. 공·사 영역의 분리개념도 매우 희박했었다. 그러므로 가족은 ‘사적 영역’이라기보다는 통치의 수단과 대상의 단위가 되는 가족이 있었다. 이 점에서 가족 제도는 곧 국가의 주요한 정치제도였다. 조선시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가부장적인 지배구조가 굳어져갔다. 따라서 이 시기 가족제도와 부부의 삶을 이해하는 일은 곧 이 시기의 지배구조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조의 바탕은 말할 것도 없이 유교였다.
조선은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로서 국가에서 국왕의 지위는 절대적이었고,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또한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체제를 유교 이념이 정당화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사회 구조 안에서 가장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권위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존재였다. 유교적인 가르침에서는 가정과 국가가 동일시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국가에서도 다스리는 사람은 어버이요 다스림은 받는 사람은 자녀였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이 ‘君父·臣子’ 라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군신·부자가 ‘君父一體’라 하여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즉 일종의 현실적이고 계약적 관계일 수 있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 天理를 끌어들여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관계로 설명하였다. 현실적인 인간관계인 군신 관계에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부여하여 그 관계의 절대성을 정당화한 것이다. 사회적인 위계질서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처럼 결코 바뀔 수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는 논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념의 강조와 확산 아래 조선왕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적장자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가부장적인 사회로 변모해 갔다. 당연히 그에 따라 가정에서 가장이 갖는 권위도 더욱 공고해져갔던 것이다.
국가는 가장의 절대적 지위를 후원하였으며, 가족 내에서 가장의 권위를 위협할 사람도 없었다. 물론 국왕에게처럼 가장에게도 조선 사회를 유지하는데 요구되는 도덕성이 기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가부장제 사회는 주로 양반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그들을 주축으로 하여 조선 사회의 가부장적인 특징은 점차 더욱 강조되었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호란을 겪은 17세기 이후에 가부장제는 더욱 강화되어 갔다. 자손이나 처첩 등이 가장을 고소하면 그것이 모반이나 역모가 아닌 한 교형에 처하도록 한 것 등이 이를 단적으로 설명한다.
가장은 가의 대표자로서 국가로부터 가족에 대한 공적인 통제권을 인정받았다. 관청에서 명령을 내릴 때 가장에게 한 사실이 이를 상징한다. 이 점에서 가장 중요한 가장의 책임은 국가의 기본 질서가 가정 안에서 지켜지게 하는 일이었다. 국가의 질서와 이념은 곧 가정 내에서 지켜야 하는 家道이기도 하였다. 가족이 국법에 어그러지는 행위를 저질렀을 때, 기본적으로 가장은 이유를 막론하고 함께 처벌되었다. 더욱이 가장은 대개 정작 죄를 저지른 가족원보다도, 또는 기본 형량보다 더 가중처벌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유교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인 질서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신앙의 문제였다. 사실 유교는 국왕과 관료에 의해 짜여진 정치 질서에 동반자와도 같은 성격을 지니면서 초자연적 질서와 연결되는 세계였다. 그러므로 유교적 의식은 개인의 신앙이나 믿음의 표현을 넘어 매우 공적이고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유교는 철학이나 이념, 윤리적인 성격이 보다 강하였으며, 신앙 내지는 종교적인 성격은 상대적으로 약하였던 것이다.
유교가 지닌 이러한 특성 때문에 삶에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종교적인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유교 안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이에 사람들은 죽음이나 질병, 앞날에 대한 불안, 초월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 등을 놓고는 여러 가지 민속의식, 음사 등에 눈을 돌렸다. 가장이 아무리 유교 이념에 고취되었어도 거기에서 비껴난 여러 가지의 신앙 행위가 있었던 것이다. 그 주체는 대개 아녀자로 지목되었지만, 사실 사대부를 조차도 짐짓 묵인 내지는 동조하였던 것이다.
2. 가정 공동체와 신앙 공동체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전통시대에 유교에서 벗어나는 민속의식이나 음사의 주체는 여성으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 활동이 여성의 독자적인 행동 내지 선택이었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집안의 가장(아버지나 남편, 또는 장자)의 후원 또는 암묵적인 동의나 묵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여성이 이러한 의식의 주체자로 거론 된 것은 남성들에게 슬며시 음사에 대한 면죄부를 주어 책임을 피하려는 의도가 담긴 주장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가정공동체가 곧 단일한 신앙공동체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이념에 고무된 가장이 있었지만, 그 내부에서 부녀자나 아이들은 다른 이념 내지 신앙을 일상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유교적 체제 아래에서 가정이 신앙이나 의례가 숨쉴 틈도 없이 유교로 강요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유교가 학문이며 정치이념, 또는 종교였다면, 여성들에게는 음사나 민속의식이 보다 일상적인 종교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과 부녀자의 유교의례와 음사가 동조와 분리의 이중구조 속에 지속되고 있는 것이 조선시대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가장이 천주교 신자라고 가족원 모두가 당연히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마침내 순교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인 것이다. 남편의 신앙을 조선시대 여성이라해도 자연히 따르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것이 자신과 자녀들의 목숨까지 위협받는 것이었다면 더욱 그러하였다. 부부이기 때문에 당연히 함께 천주교를 믿게 되었고, 순교하였다고 넘길 문제는 아닌 것이다.
3. 부부성인들의 삶과 신앙, 그리고 순교
1) 남명혁·이연희 부부성인
(1) 성 남명혁(또는 문화) 다미아노
ㅇ 배경
명가거족에서 출생하여 서울 서소문 근처에서 거주
무뢰배와 어깨를 겨누어 잡기를 일삼았다고 전해짐
ㅇ 입교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입국하자 그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유신부는 1834년 1월에 입국하여 활동하다 1836년 12월 본국인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이에 세례를 받은 것)
ㅇ 신앙생활
외교인과 만나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교리를 배워 익혀 집안사람들을 가르치고 냉담자를 권면하고 외교인을 권유하여 많은 사람들을 회두시켰다.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찾아가 대세를 붙이고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찾아 위로하며 격려하였다.
ㅇ 회장으로서의 활동과 체포
자신의 성화와 타인에게 전교하려는 그의 덕행과 열성을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보시고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무엇보다도 교우들이 성사를 받게끔 자기 집에 모이게 하였다.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앵베르 주교는 공소 방문을 중단하고 수원 갓등이에서 급히 상경하여 부활 첨례에 임박하여 성사 집행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다 주지도 못하였고 두 공소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때 남 다미아노 회장이 자신하여 자신의 집에 공소를 차리게 하였다. 부활이 지난 금·토 이틀간을 공소날로 정하고 앵베르 주교는 하루에 30명 이상 성사받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백 명이상씩 모여들었다. 그 중 한 예비자의 밀고로 결국 이날 저녁 포졸들이 남회장 집에 들이닥쳤고,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붙잡혔다. 주교는 날이 새기 전 남 회장 집을 나와 돌아 간 뒤였다. 이 날이 기해년 4월 7일(음력 2월 25일?)이었다.
ㅇ 체포경위
앵베르 주교는 남 회장에게 제의(祭衣)를 안전한 곳에 감춰두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많은 교우를 도우느라 미처 치우지 못한 상태에서 포졸들이 들이 닥쳤다. 더욱이 이 때는 모두 깊이 잠이 들었을 때였다. 남 회장의 형수는 여덟 살난 아들과 침모를 데리고 이광헌 회장집으로 피신했지만 뒤따라 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남 회장과 이 회장의 가족이 모두 잡혔고, 앵베르 주교의 제의·경본·주교관(主敎冠)도 모두 몰수당하였다. 남명혁은 포청에서 특히 서양 선교사의 물건이 그의 집에서 나왔다는 점으로 인해 앵베르 주교의 거처를 알려는 포졸들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성물들은 1801년에 순교한 주문모 신부의 것이라 하고는 모든 형벌과 고문을 참아내었다.
ㅇ 심문과 순교
부인을 권면 : 부인 이 마리아가 학대하고 업신여기는 포졸들을 향해 그 무례함을 꾸짖는 것을 보았다. 이에 큰 소리로 격려하기를, “교우는 주를 위하여 어린양처럼(제물로) 죽어야 합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고 하였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아 그 뒤로는 형벌과 욕을 많이 받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이겨내게 되었다고 한다. 주님을 사랑하여 권면하는 말이 이와 같이 부인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의 고문과 심문 끝에 조정은 모든 신앙 증거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남 회장은 옥에 갇혀있는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 격려하였다.
“이 세상은 잠시 쉬어가는 주막일 따름이고 우리의 본 고향은 천국이오. 천주를 위하여 치명하시오. 영원히 영광의 나라에서 당신과 다시 만나기를 바라오.”
기해년 5월 11일 형조에서는 남명혁을 조정에 주청하였다.
「서울에 투옥된 사교의 각 죄인에 대하여 거듭 문초하고 깊이 사핵한 결과 아래와 같은 사실이 드러났나이다. 즉 남명혁은 사서에 온전히 탐혹되어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존중하며, 더구나 사특한 관(冠)과 사특한 옷(祭衣)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사교의 스승임이 틀립없으며, 그 아내와 딸, 장인, 장모에게 이교를 가르친 증거가 확실하며, 제사는 헛된 일이라 하여 부모의 은덕을 갚아야 할 본분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며, 혼인에 관해서도 배우자는 반드시 같은 교인이라야 된다 하여 인륜을 깨뜨리나이다. 죄인 남명혁은 확증을 얻을 후, 사형을 재가하심을 청하나이다」
조정은 이 주청을 재가했고 남 다미아노는 38세의 나이를 일기로 1839년 5월 24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형조에서 올린 주청문을 보면 남명혁은 부인 이연희 마리아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었음이 드러난다. 또한 마지막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부인을 권면하여 용기를 북돋워주었던 것이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2) 성녀 이연희 마리아
ㅇ 본성이 총명하고 용기있는 여성이었다. 남명혁의 부인인만큼 집안도 우수했으리라 생각된다. 결혼한 뒤 28세 때 남편과 함께 입교하였다.
ㅇ 남편 남명혁이 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자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교우들을 위해 마치 여관처럼 사용하였다. 주교와 신부를 보필하여 자기 집을 공소로 제공하면서 정성으로 모시고 봉사하였다. 교우들을 잘 이끌어 성사를 준비하고 늘 단정하게 섬기었다. 이처럼 독실한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내조자였다.
ㅇ 체포와 순교
남편 남명혁과 함께 체포되었다. 12세 어린 자식과 함께 고통을 겪는 일이 차마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체포된 뒤에 포졸들의 무례함을 보고 그 언동을 준절이 꾸짖었다. 그러나 남편 남명혁 회장이, ‘교우는 천주를 위해 순량한 양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니, 이런 훌륭한 기회를 놓치지 마라.“는 격려의 말을 듣고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참아내었다. 특히 12세된 어린 아들이 모진 형벌을 수차례 당하고 있음을 듣는 것이 몹시도 괴로웠다. 그러나 오직 이 세상은 잠시요 천국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가장 최고의 가치임을 믿어 흔들리지 않았다. 형조로 옮기어 삼차 중형에 결안하고 옥에 있는지 여섯 달만인 1839년 9월 3일(음력 7월 26일)에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 치명하였다. 이 때 나이 36세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2) 남이관·조증이 부부성인
(1)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1779~1839)
ㅇ 배경
양반 집안 출신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교우인 남필요의 4남매 중 막내로 서울에서 출생
14살 때 모친을 여의고 교우 집안의 조증이와 18세때 결혼하였다.
1801년 신유년 박해 때 그의 부친 남필용은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고수하여,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선종하였다.
ㅇ 입교
기해박해 당시 체포된 다음날인 8월 13일 국문에서 - 부친이 천주학을 한 까닭으로 이를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다.
ㅇ 유배의 시련
신유박해 때 남이관은 처가로 피신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부친은 전라도 강진으로, 자신은 경상도 단성으로 각각 유배되었다. 여기에서 무려 30년간의 귀양살이를 해야 했고, 50이 넘어서 1832년에야 대사면으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아내 조증이 바르바라는 남편이 유배되자 어쩔 수 없이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동생을 데리고?) 살았다.
유배지 단성은 교우가 없는 지방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남이관은 교리를 접하지 못한 채 아침 저녁으로 주모경을 외우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차차 냉담하게 되었고, 첩까지 얻어 자식을 낳게 되었다. 그런데 남이관의 나이가 약 50세가 되었을 무렵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 때 이웃 지방에 귀양 온 교우가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 일을 기회로 남이관은 첩을 멀리하고 대세를 받고 교우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뒤 5~6년이 더 흘러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우선 처가로 가서 지냈다.
ㅇ 신앙생활
- 신부 영접 운동
처가는 신유박해 때 순교자를 낸 교우집안으로서 정하상과 외척 간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남이관은 이때부터 정하상과 더불어 신부를 영접하는 일을 도모하였다.
1833년 말 중국인 유 신부가 입국할 때 위험을 무릅쓰고 정하상과 함께 의주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였고, 그 뒤로는 서울에 교회집을 마련하여 신부에게 봉사했다. 유 신부로부터 세바스티아노란 세례명으로 영세하고 견진까지 받았다. 신부를 위해 모든 의무를 맡아 보며 기도생활을 독실히 했다. 그 뒤 유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남이관은 서울에 집을 따로 마련하여 아내와 딸과 함께 지냈다.
- 기해박해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 초기에 남이관은 서울을 떠났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미 유명한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수색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을 알아 신변에 닥칠 위험을 예측하여 진천을 거쳐 이천으로 피신했다. 그 해 6월 9일에 포졸이 남이관을 체포하러 왔으나, 그는 잡지 못하고 부인과 15세의 딸만을 잡아갔다. 이 때 그의 집에서 많은 성서, 성화, 성상이 발각되어 압수되었다.
시골로 피신한 남이관은 치명을 예견하며 기도로 장차의 고통을 준비하였다. 결국 이천의 ‘금죄’라는 곳에 있을 때 한 교우가 포졸을 데리고 와서 그를 체포하였다. 포청은 그가 평범한 천주교인이 아님을 알고 즉시 형조로 이송했고, 이어 김제준과 함께 의금부로 보내져 유진길, 정하상 등과 함께 국문을 받았다.
ㅇ 순교에 이르기까지
- 입교경위에 대해 : 8월 13일 국문에서 - 부친이 천주학을 한 까닭으로 이를 배우게 되었는데, 신유년 이래 30년 동안 봉교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5~6년전 집에 있던 십계에 관한 책과 기타 서적을 보고 비로소 그 요지가 매우 좋아서 아내와 함께 배우고 익히게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 선교사 영접에 관해 : 선교사를 영접함으로써 조선에 천주교가 널리 퍼질 수 있게 되어 다행한 일이라고 하였다.
- 천주교를 금하는 국가 방침을 반박 :
“천주교를 금한 것은 도의 본질을 살피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명령이 그러하듯이 나라의 명령도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 옳고 옳지 않은 것을 제대로 분별하여 금했다면 제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 천주교가 옳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사실 :
“하나는 천지의 주제자를 존중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을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하는 것입니다.”
- 순교
심문과 곤장 끝에 국청은 8월 15일에 사설(邪說)을 강습하였으며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니 당일로 서소문 밖에서 부대시참 한다고 결안했다. 처형은 4일간 연기된 뒤 9월 26일(음력 8월 19일)에 60세의 나이로 서소문 형장에서 김제준, 조신철 등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치명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아내에 대한 당부
형장으로 가는 수레에서 한 군사에게 부탁하기를 옥중에 있는 아내에게, “같은 날 같이 죽자(동일동사)고 했는데, 이는 못해도 같은 자리에서 같이 죽읍시다(동지동사).”고 하였다.
-함께 순교하자는 이러한 말들이 옥중에 있는 조증이에게 격려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2)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1781~1839)
ㅇ 배경
경기도 양근의 양반인 조 프란치스코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6살이 되던 해에 남이관에게 출가하여 4년 만에 한 아들을 낳았지만 곧 잃었다.
그때 신유박해가 일어나 아버지(조 프란치스코)는 순교하였다. (조동섬 유스티아노도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었고, 동섬의 아들 토마스는 양근군의 옥에서 옥사하였다. 3년 뒤에는 양근에서 다시 조동섬의 일가인 조숙이 참수 치명했다고 한다.)
조 바르바라의 할아버지는 박해 때 성물을 땅에 묻으며, 바르바라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당시의 증언에 따르면 박해가 지나자 바르바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물을 파내어 잘 말려 소중히 간직해 서울로 가지고 올라갔다고 한다.
바르바라의 남편 남이관 세바스티아노도 잡혀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었다. 남편이 귀양가게 되자,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수 없어 부득이 경기도 이천의 친정으로 돌아와 지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시련과 고초를 겼었다.)
ㅇ 신앙생활
- 미지근했던 시절
조 바르바라의 신앙 생활은 이 때까지만 해도 냉담자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천주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데다가 박해로 인해 교우들과의 접촉도 자연히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냉담 상태는 10여년 계속되었다.
- 뜨거운 신앙인으로
1811년 30세 되던 해에 서울의 한 교우 일가 집으로 와서 거처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점차 교리를 깨우치고 열심히 수계하게 되었으며, (그 동안의 시간을 만회하고자) 신심 생활에 전념하였다. 무엇보다도 조선에 하루 속히 선교사를 모시려는 열망에서 외가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가 추진하는 선교사 영접 계획이 실현되도록 힘껏 도왔으며, 열심히 벌어서 정하상 바오로의 북경 여비를 충당하였다.
1832년에는 남편 남이관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정하상의 일에 참여하고 나서, 이듬해에 중국인 유 신부를 맞아들이는데 성공하였다. 바르바라는 유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시고 남편과 마찬가지로 신부를 정성껏 모셨다.
3년 뒤 유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따로 집을 마련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지냈는데, 여기에서도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여 지성으로 섬겼다. 그리하여 그의 집은 종종 교우들이 와서 기도하고, 고백하고, 미사에 참례하는 공소로 활용되었다.
ㅇ 고초에서 순교에 이르기까지
기해박해가 일자 남편은 이천으로 피신하고, 집에는 바르바라와 15살 된 딸과 둘만이 남았다. 6월 9일 남편을 체포하러 온 포졸들은 조 바르바라 모녀를 잡아갔다. 이 때 집에서 많은 성서와 성물이 발견되어 교우인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포장이 배교하고, 가장이 간 곳과 다른 교인을 대라고 심문하였지만, 바르바라는 신앙을 지키며, “만 번 죽어도 나의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고 대답하였다.
심문을 당하고 있는 사이에 남편 남이관도 이천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왔다. 그러나 불과 10일 만에 남편은 ‘동일동사 하지는 못해도 동지동사하자’는 유언을 남기고 먼저 순교하였다. 조증이는 옥에 있는지 6개월, 심한 고문 끝에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12월 29일 58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최창흡 등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동지동사하자는 남편의 예견대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형장으로 나아갈 때에 옥중 교우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나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형장으로 떠날 시간이 되자 황겁함이 없이 고요하게 나아갔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방한 중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3) 박종원·고순이 부부성인
(1)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1793~1840)
ㅇ 배경 : ‘이선’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서울에 살던 중인계급의 교우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겸손하고 온순하며 친절한 성품에다 뛰어난 재주와 학식을 지녔다고 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약방에서 거간일을 하며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생활했다. 가난하지만 어머니에게 효도하며, 어머니와 더불어 수계하며 교우로서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순교자의 자손인 고순이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세 남매를 두고 다 같이 열심히 봉교하였다. 신공과 묵상을 부지런히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교리 지식이 깊고 밝아 교우와 외교인을 가르치고 인도하며, 외교인 어린이를 찾아 열심히 대세를 붙였다.
ㅇ 신앙생활
한국에 전교 신부를 영접하려는 준비가 일어날 때 박종원도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여행을 하며 이 중대한 일에 힘껏 기여하였다. 마침내 입국한 유 신부는 박종원의 열심함을 높이 사서 내포(內浦) 지방에 파견해 그곳의 교우들을 가르쳐 열성과 용기를 북돋우게 했다. 1837년에 앵베르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이에 박종원은 회장직을 성심껏 이행하며 신앙생활을 해 나갔다. 외교인을 개종시키고, 교우집을 두루 다니며 성사를 무난히 받을 수 있도록 권면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교우들뿐만이 아니라 외교인들에게도 박종원은 알려져,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해야만 하였다.
피신한 박종원은 위험을 무릅쓰고 밤이 되면 감옥을 찾아가 잡힌 교우들의 동정을 살피고 그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며 교우들과 상통하였다. 이러한 그의 위험을 무릅쓴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로 이 무렵의 순교자에 대한 상세하고도 많은 사실이 후세에 길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말했다. “오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오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를 위해 치명함이 마땅합니다.”하며 치명을 예견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ㅇ 체포와 순교
피신해 다니면서도 열심히 활동하던 박종원은 결국 8개월 만인 10월 26일(음 9월 20일)에 포졸에게 붙잡혔다. 이튿날 밤에는 그의 아내 고 바르바라도 잡혀, 부부는 포청에서 만나게 되었다. 부부는 문초와 고문이 반복되는 어려운 시간을 함께 용감하게 이겨내었다.
포청에서도 박종원의 열성은 갇혀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사람들은 박종원의 얘기 듣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포졸들까지도, ‘오늘 저녁엔 이선의 교리 얘기를 들으러 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혹독한 고문 끝에 아내와 더불어 형조로 이송되었고,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다. 아내가 먼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박종원은 부인이 순교한 뒤에도 한 달 남짓 더 있다가 옥에 있은 지 4개월 만인 1840년 1월 31일 48세의 나이로 당고개(堂峴, 현 용산구 원효로 2가 8번지)에서 6명의 교우들과 함게 참수 치명하였다. 박종원은 죽음을 무릅쓰고 배교를 거부하였다. 더 나아가서 천당과 지옥은 엄연히 존재하며 제사는 헛된 예식이어서 지낼 필요가 없다는 호교도 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2) 성녀 고순이 바르바라(1798~1839)
ㅇ 배경
고순이 바르바라는 1798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는데, 1801년 신유년에 순교한 고광성(古光晟)의 딸이다.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잃은 뒤,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18세 때 한 외교인이 고순이에게 구혼하였지만,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기를 잘 넘기고 교우인 박종원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고순이 보다 한달 뒤에 순교한)
ㅇ 신앙생활
부부가 함께 열심히 계명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어려운 살림 중에서도 화목하게 지냈다. 삼 남매를 낳아 모두 신자로 길렀다. 유 신부가 입국한 뒤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남편의 회장 직무를 거들었다. 자신도 냉담자를 권면하고 교리를 잘 모르는 교우들을 가르치며 가난한 이를 위로하고 병자를 간호하였다.
ㅇ 체포와 순교
기해박해가 일어나 남편은 즉시 피신하였다가 8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지만, 결국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평소에 박해를 무서워하던 고순이였지만, 남편이 잡혀가자 스스로도 치명을 예비하였는데, 바로 이튿날 포졸이 들이닥쳐 고순이도 체포하였다.
감옥에서 부부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부부는 그러한 은혜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서로 축복하고 바야흐로 닥칠 고난의 길을 같이 용감히 걸어가자고 격려하였다. 이에 고문과 형벌을 인내하며 감수하였고, 형조로 보내져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고순이는, “전에는 순교 이야기만 들어도 떨렸었는데 성신이 은총으로 나 같은 죄인을 감싸주시니 지금은 아무 두려움도 도리어 기쁩니다. 죽는 것이 이렇게 쉬운 줄을 전에는 몰랐습니다.”고 하며 평온한 가운데 옥 중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1839년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들과 함께 42세의 나이로 참수 치명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맺으며 - 오늘날의 부부성인이란?
2001년 10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Luigi(1880~1951)와 Maria(1884~1965) 부부에 대한 시복식이 참고된다. 이 부부에 대한 시복식은 그의 자녀들(2남 2녀 중 생존한 2남 1녀 참석)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자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진실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 18,8)라는 그리스도의 질문에 이 부부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 참고문헌
최석우·안응렬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1980.
편집부 편,『기해일기』, 가톨릭출판사, 1984.
박노연 편저, 최석우 감수,『103위 성인전』, 을지출판공사, 2004 개정판.
한국교회사연구소 편,『기해·병오박해 순교자증언록』(상)·(하), 2004.
William H. Woestman, O.M.Ⅰ, Canonization―Theology, History, Process, St.Paul University, Ottawa, 2002. pp. 6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