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룡산(蛟龍山 519m)이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교룡산성이 있어서이다.
교룡산성(蛟龍山城)은 백제시대 쌓은 것으로 남원 지역 20여개의 산성 중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고 있다.
고려말에는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맞아 싸웠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처영이 크게 수축하였다.
약 3km로 높이 4.5m, 성안에 우물 99개, 치첩 1,016개, 그 밖에 군창과 무기고가 있었고, 동, 서, 남, 북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 동문(홍예문)과 동서간 남벽이 남아 있다.
교룡산성의 중심부에 있는 선국사(善國寺)는 금산사의 말사이다.
동학혁명 때는 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관군과 큰 접전을 벌인 역사적인 유적지이기도 하다.
절이름에 ‘국(國)’자가 들어간 것은 나라를 지켜낸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군량미(軍糧米)를 교룡산성에 보관했는데, 이때 선국사는 교룡산성을 지키는 수비대의 본부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때는 300여 명의 스님이 머물 정도로 큰 규모였고, 1960년 보제루에서 발견된 구리도장은 산성을 지키는 승군(僧軍)에게 조정에서 내려보낸 것으로,
교룡산성과 선국사를 나라에서도 중요하게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불법 수행도량으로, 전시(戰時)에는 방어진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흥망을 함께 해온 선국사다.
지금은 허물어진 성벽과 더불어 대웅전의 커다란 북, 백골(白骨)같은 보제루만이 치열했던 시절을 말해주는 상징물로 남아있다.
그리곤 차량에 탑승 덕음봉 산행을 위하여 10여km의 거리에 있는 '안곡마을 입구'로 이동을 한다.
코스는 원점회귀이므로 완전 자율산행이다.
2시간 30분 후인 13:30에 출발할 것이니 시간을 꼭 지켜줄 것을 당부하였다.
4.7km를 2시간 20분 동안 이리저리 오르락내리락 걸었다.
산곡마을
네비엔 '교룡산국민관광단지'를 입력 널따란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장 위에 있는 '월남참전기념비'와...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유적지 교룡산'이라는 표석을 지나며...
아래에 자세히 기록한 안내판도 살펴본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라북도 순창군을 포함하여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을 말한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 갑오농민전쟁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동학란은 동학교도들이 일으킨 난이란 뜻이고, 갑오농민전쟁은 갑오년(1894년)에 농민들이 일으킨 전쟁이란 뜻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이렇듯 여러가지로 불리는 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과 관련이 있고, 또 사관에 따르기도 할 것이다.
처음 1기(1895년~ 1960년)에서는 왕조질서 및 기존체제를 어지럽힌 비적의 소요로 인식하여 '동학란'이라고 불렀다.
2기에서는 농민이 아닌 동학교단을 주체로 보아 '동학혁명'이라고 격상되었다.
3기인 80년대 이후에는 반란도 혁명도 아닌 '동학운동'이라는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다 90년대 들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명칭이 일원화되었다.
복효근 시인의 詩碑 '다시 밝혀드는 동학의 횃불'
아스팔트 끄트머리에 소형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방향 개념이 없는 안내판을 좌로 90도 돌려 바르게 정치하였다. 안내판엔 1~4코스까지 안내되어 있다.
안내판 돌계단을 걸어오르면...
귀여운 동자승 바랑에 걸린 '선국사 300m' 안내판이 귀엽다.
복원이 된 듯 말끔한 성문을 올라...
교룡산성 안내판을 일별한다.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그 후 여러번 고쳐 쌓았으며, 유사시 주민들이 대피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지였다.
동문인 홍예문은 아둔한 문외한이 보더라도 그 축성기법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아치형 무지개를 닮아 무지개 글자를 연거푸 두 개를 쓴 홍예문(虹霓門).
홍예문 위로 여나믄 개의 비석들이 도열해 있다.
가까이 살펴보니 누구누구 영세불망비.
불망비
'별장서령기옥영구불망비' 별장(別將)은 조선시대 각 영이나 청에 소속되어 있던 정삼품 및 종이품의 당상군관 벼슬.
'별장서령상규영구불망비'
'별장이령동효거사비'. 거사비(去思碑)는 예전에 전임 감사나 수령이 베푼 선정을 추모하여 백성들이 세운 비를 이르던 말.
'통정대부별장양령준석영세불망비'
불망비,거사비,선정비 등 가히 비석모듬이라 할 만하다.
대부분 선국사를 통하여 정상으로 올라갔지만...
필자는 '교룡산장' 아래쪽으로 난 성곽을 따라 내려가...
뒤돌아 본 모습.
계류를 건너며 아래쪽 작은 주차장을 내려다 본다.
이 길은 성곽을 따라 이어진 길.
복원이 된 듯 말끔하다.
대밭 옆으로 죽순인가?
작년 처음 먹어 봤는데, 천하 제일 맛없는 게 죽순이더라.
의자를 닮은 바위와 절구통.
성곽을 따라 산길은 이어지더니...
외곽으로 통하는 성문인 듯 보이지만 허물어졌다. 성문밖으론 또다른 등로가 있어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듯.
산길은 조금 가팔라지더니...
연안김씨 무덤뒤로 성곽에서 벗어난다.
이런 묏자리가 명당이라던데...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면 닭알이 있어야 하고, 봉황의 자리면 봉황의 알이 있어야 하는 법.
그래서 작은 바위 덩어리는 알을 의미한다. -반풍수-
봐라~ 돌아보니 조망은 이만하면 되았제? 배산임수(背山臨水)까진 아니더라도...ㅋ
산중턱에 이기 뭐꼬? 보아하니 그리 오래돼 보이지는 않는데...그 시절??
좌측으로 조망이 열리기 시작한다.
남원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고...
더 멀리 아스라한 산들.
우측으론 지리산인 듯.
조망좋은 복덕봉(484) 정수리에 이 왠 시설물. 아마도 포진지인 듯한데, 필자는 군시절 '케레바50' 사수였다.
이제 수수께끼는 풀렸다. 아까본 그 막사는 군부대 초소였다.
남원시내 건너 아슴한 지리산.
복덕봉의 삼각점.
건너 보이는 교룡산의 실제 정상인 밀덕봉.
시설물이 정상에 우뚝하다.
살짝 내려섰다...
성주 배씨 묘소를 지나고...
휀스 쳐진 시설물(내려갈 땐 이 이정표를 따른다) 옆으로 돌아...
이 지점의 이정표
정상에 올라서지 일행들은 모두 점심자리를 펴고 앉았다.
교룡산(밀덕봉) 정상에서 누리는 조망.
살짝 당겨보았지만 시간이 지나 도무지 방향감각을 상실. 수려한 산세인 이 산은?
아까 지나온 복덕봉. 건너 멀리는 견두지맥(?)
교룡산에서 막걸리부터 벌컥벌컥.
교룡산 시설물을 돌아 나오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산이 나를 부른다' 상곤씨 시그널이...
삼거리에서 직진을 해야만 은적암터를 곧장 갈 수 있는데, 필자는 우측 내리막으로 내려가 보았다(자료가 없었으니.ㅉ).
선국사 대숲이 보이더니 좌측으로 이정표(동그라미)가 있다.
좌측 오르막으로 되올라가라는 방향의...
이정표는 헥헥...
은적암터가 200m란다.
어쨌거나 올라가야지. 100m 접근.
그리고 만난 은적암터.
터만 남은 이곳을 굳이 찾아오는 이유는 무얼꼬?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명인백용성 대종가 출가한 곳이고, 수운 최제우가 은적암에 머물면서 동학을 포교했다.
터만 남은 은적암은 최제우가 동경대전, 용담유사, 논학문을 짓고 포교활동을 하는 등 동학이 완성된 곳이다.
이때 포교로 남원 지역에서는 한때 수만의 동학 교인이 있었지만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운봉과 여원치에서 전투를 치른 이래 동학은 남원 지역에서
점점 쇠퇴했다.
덕밀암(德密庵)을 은적암(隱蹟庵)으로 바꾸며 머물렀다는 은적암터 안내판.
그리고 빈 터 옆 깎은 듯한 바위엔 산신단( 山神壇 산신께 제사를 지내는 장소))의 흔적인 '산신지위(山神之位) 음각자.
비석엔 '경인 지부 권철(庚寅 知府 權徹)'로 남원부사 권철,1830년에 새김. 그 옆엔 아들(子) 명규(命奎).
또다른 비석은 '교룡산 산신단 유래비'
능선에 올라서 건너 너른 터로 다가가 보았더니...
장고(漿庫)터. 장고터는 장단지를 파묻은 곳.
능선을 따라 다소 거친 길을 내려서 우측 성곽을 따랐다. 선국사를 다녀오기 위함이다.
아까 올라갔던 홍예문이다.
홍예문 위로 돌아...
선국사 포장길로 줄곧 올랐다.
석축 바로 아래의 이정표를 보고...
돌계단을 올랐더니...
2층누각인 보제루.
부처님 탄신일을 앞두고 형형색색의 봉축등이 달렸다.
1960년 보제루에서 발견된 구리도장은 산성을 지키는 승군(僧軍)에게 조정에서 내려보낸 것으로, 교룡산성과 선국사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뒷면에서 보는 보제루의...
현판을 살짝 당겼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양 옆으로 두 석주.
절이름에 ‘국(國)’자가 들어가는 사찰들은 대부분 나라를 위해 큰 역할을 담당해왔던 것처럼 선국사도 나라를 지켜낸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배롱나무 옆 7층석탑.
단청 등 꾸며지지 않은 대웅전.
선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에 처음 지었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 3년(1803)에 다시 지은 것이다.
받침부는 비교적 낮고, 위아래 굵기의 변화가 없는 반듯한 기둥을 썼다.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14호>
대웅전 편액.
대웅전 열린 옆문으로 합장.
대웅전 안엔 지방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된 큰북과 조선시대 승병대장의 인장(印章)이 있어, 이곳이 임진왜란(1592) 때 승병의 주둔지 였음을 알려준다.
배롱나무 옆 선국사7층석탑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보이고...
그 옆 빈터에도 석물들이 보인다.
비석은...
사리탑.
계단위 대숲방향이 은적암 방향인 듯..
선국사의 문화재는 일괄 지정되었단다.
'교룡산성승장인'
대북 등이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대웅전
돌아본 보제루.
절문을 나와 우측으로 해우소와 등산로.
이제 13:30까지 주차장에 도착을 해야만 한다. 그 때까지 도착하지 않은 사람은 택시타고 오라고 하였다.ㅋ
도착~도착~ 10분 전 도착이다.
체게바라와 같은 조선의 혁명가 김개남(1853년 9월 15일 ~ 1894년 12월 13일)
원래 이름은 김영주(金永疇)였으나 동학농민운동당시 조선의 남쪽을 새로 열자는 의미에서 '개남(開南)'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는 전라감사 이도재에 의해 즉결 처형 효수되었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에 묶여 가다니
그게 웬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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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 유시(遺屍) 했노."
그가 잡혀갔을 때 백성들이 부른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