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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6-27 천안천안시티투어 관광 나들이
☛천안시티투어버스 관광
▷일시 : 2026.6.27.(토)
▷호남선 1422열차 익산8:06-천안역하차9:51
▷출발 시간 및 장소 : 10:10 천안역 기업은행앞 출발-16:30 종료
▷투어요금 : 경노1인당 2,000원
▷코스 : 천안역10:10-태조산공원-중식(유랑음식문화거리)-호두과자체험-이동녕선생기념관-천안역16:30
▷귀로 : 호남선 1505열차 천안역출발17:41-익산역도착19:29
2026/6/27 토요일 천안시티투어 관광여행 아무탈없이 무사히 귀가했음이 다행이라 생각되여지고,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임정수반 이동녕기념관에서 천안시립풍물단의 사물놀이(꽹과리, 징, 장구, 북) 공연을 감상하는 행운을 갖고 왔도다.
작년에는 아산시티버스투어를 실시하며 전원에 참석하여 옛시절의 추억이 그리워 모처럼 만남은 현충사 관광과 온천물에서 옴몸을 담그고 온 잊지못할 추억이 있었지요.
작년에 이어서 2026년 천안시티투어를 하게 된 것은 가홍친구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욕심으로 열차의 교차지점 천안을 생각한 것이, 유형기회장의 몸이 불편한 처지를 생각하지않고, 괜한 욕심이었음을 고백하는바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본인의 과유불급이라는 것을 뼈속깊이 느끼는 바이요.
아무련들 경치좋고 공기좋은곳 찾아 여행하면 즐겁지만 유형기회장님의 걷기가 힘든 불편한 몸을 생각해야지요.
70넘어 황혼의 시간 모였다하면 집에 가기 바쁜 세파를 깨닫지 못한 본인의 큰 잘못이여.
그냥 만나서 얼굴보면 좋은것이고, 야외관광은 향후 삼가하는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천안시티관광시 천안의 명물 호두빵을 모임에서 개인당 2만상당을 구입하여 집에 도착하여 호두빵 봉다리를 내려 놓으니 각시 반응이 아주 좋습디다.
친구들도 좋았는가요?
회 기금도 쪼금인디 쓰잘띠 없이 낭비했다고 한다면 개선해야지요.
노후에는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약도 먹고 병원도 댕기고 현상 유지 잘합시다.
세월을 붙잡을수 없어 나이먹어보니 건강이 최고라는걸 느끼는 시간에 건강관리 잘 합시다.
국립철도학교 전수부5인 친구들!
유형기 고가홍 문한봉 장집천 조동화 인생의 백전노장이 되어 흐르는 세월을 아쉬워 하며, 철도에서 기관사로 한평생을 출퇴근하며 호남선을 질주하던 두갈래 철길 차창을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했지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리운 얼굴들이 보고 싶어 시티버스관광에 기꺼이 동참한 유형기회장님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이여.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되찾을 수 없는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시지 말고 덧없고 부질없는 삶의 여로에서 좋은일 많이 많이 하시고 건강관리 잘 합시다.
시간이 바쁜 친구들 즐겁고 행복한 시간됩시다.
감사합니다.
<⬇고가의 카메라장비를 가지고 와서 장집천사진작가의 수고에 고마움을 느끼는 바이여.
우리들의 친구 장집천사진작가는 한빛사진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매년 전시회도 개최하고 취미활동으로 전국방방곡곡을 누비며 작품을 발굴하는데 온 열정 다하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디 참으로 좋은 작품을 가지고 온 것을 보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도다.
천안시티투어 관광시 천안 이동녕기념관 생가에서 천안시립풍물단 공연중 한 장의 눈에 띠는 사진이 있었네.
쾡과리 치는 젊은 단원의 땀 흘리며 쾡과리 치는 모습을 담아오다니 감히 특별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소.
쾡과리로 날카롭고 강렬한 음색과 야무진 소리를 온힘을 다해 쾡과리에 쏟아붙다 보니 땀으로 온 얼굴이 범벅이 되고 만 이 단원이 인상깊게 남았수다.
하늘의 소리인 천둥을 상징하는 꽹과리, 우리나라의 전통악기로서 '쨍'한 소리로 장단을 이끌고 풍물단을 선도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장집천 한빛동호회 사진작가는 보통사람들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작품이로다.
앞으로도 장집천사진작가는 전수부5인회 회원으로서 한빛사진동호회 지구촌 방방곡곡 활동을 하면서 사진을 카메라에 담아와 자연의 아름다움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여유와 낭만으로 살아가기를 비는 바이요.
장집천 사진작가님 향후에도 고가의 카메라장비 휴대하기가 힘들것이나 전수부5인회 회원들을 위하여 카메라 셔터 많이 눌러주기를 부탁하는 바이여.
장집천사진작가님의 무궁한 사진작가 활동으로 더욱 사진기술을 향상시켜 아름다운 작품 자랑 해주십사 건의하며 무궁한 건승을 빕니다.
촬영한 사진을 보면서 감개무량하다는 말을 장집천사진작가님에게 전해드립니다.>
<⬇천안시립풍물단 공연중 또하나 인상깊게 남은 것은 단원의 양쪽손에 쥔 장구치는 빠른 장구채 동작에 넋 나갈 정도로 놀라웠다.
장구치는 천안시립풍물단 젊은 단원의 흥에 도취된 표정은 열정이 가득찬 모습이여.
장구에 미치지 않고는 저런 표정이 나올수 없고 양손으로 장구치는 빠른동작을 연출할수 없을것이다.
Speed로 말한다면 아마 100k/h는 넘을거여.
장구채의 재료는 오른손에 쥔 것이 궁글채, 왼손이 열채라고 하는데 재료는 대나무를 사용하고 있구먼.
천안시립풍물단 장구치는 단원은 쿵덩쿵 장단 맞추느라 장구채를 쥔 양손의 빠른동작은 관광하는 구경꾼들의 흥을 돋구었도다.
또하나의 작품사진 구경시켜준 장집천 사진작가에게 감사는 드리는 바이여.
장구의 가죽은 맑고 경쾌한 소리를 내기 위해 주로 소가죽이나 말가죽을 사용 사용한다네.>
<천안시립풍물단 정식 명칭은 “천안시립흥타령풍물단”입니다.
천안시립흥타령풍물단은 1975년 창립된 '천안 흥타령 농악 보존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천안 쌍용동 출신의 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 기능보유자 故 이돌천 선생을 중심으로 1988년에 창단되었으며 , 2009년 상임화되어 현재까지 천안의 전통 풍물과 창작 풍물극을 계승·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천안시립풍물단원 7명이 독립운동가 이동녕생가에서 공연한 흥타령은 한결같이 시티버스 관광객을 위하여 일심동체가 되어 장구치고 북치고 쾡가리 징치고 즐겁게 하였다.
징은 혼자치고 장구 쾡가리 북은 2명씩 연주하였다.
풍물사진 촬영하여 즐겁게 해준 우리의 친구 장집천 사진작가에 다시한번 감사드리는 바이여.>
독립운동가 석호 이동녕 선생
1869년 2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 이명은 이량(李亮)이다. 『제국신문(帝國新聞)』 논설위원, 독립협회 회원으로 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했다. 망명 이후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 권업회(勸業會)의 의사부 임시의사원 직을 담당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국무총리, 군무총장, 법무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균열이 생기고 약화되자, 국무총리, 국무령, 주석이 되어 세력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데 앞장섰다. 1940년 3월, 지병이었던 폐렴이 악화되어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동녕(李東寧)은 1869년 2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 이명은 이량(李亮)이다. 집안의 전통에 따라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다. 1885년 서울 봉익동으로 이사하였으나, 부친인 이병옥(李炳鋈)이 영해군수로 부임하면서 함께 이주했다. 부친을 도와 선정을 베풀어 ‘작은 군수’라고도 불렸다. 1891년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獨立協會) 간사원이 되어 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이종일(李鍾一)의 권유로 『제국신문』의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이와 함께 독립협회 간부로써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친러세력의 정계 퇴진을 위한 철야상소시위운동, 만민공동회 개최, 독립협회 회원 석방과 정권교체, 의회 설립을 시위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1899년, 개화운동 및 자강운동 단체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 1903년, 청년단체이자 구국운동 단체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김구(金九), 기산도(奇山度), 정순민(鄭淳民), 이준(李儁) 등과 함께 반대투쟁을 주도했다.
1906년 5월,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만주로 이동하였다. 5개월 후 북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은 만주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민족교육기관이었다. 1년 뒤,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임명되면서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이갑(李甲) 등과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 설립에 앞장섰다. 1909년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설립에 참여하였고, 다음 해에는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신민회 회원 및 가족들과 함께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甫) 추가가(鄒家街)로 이주하였다. 1911년, 이석영(李石榮),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상룡(李相龍) 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 설립을 주도했다. 이와 함께 군사교육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권업회(勸業會)의 의사부 임시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즈음 대종교에 가입하였다. 다음해에는 대종교 서도본사(西道本司)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 최초의 망명정부였던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수립에 앞장섰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과 러시아가 동맹국이 되면서 일본을 대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려던 본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개최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朝鮮人政治亡命者會議)’에 참석했다. 같은 해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 회장 문창범(文昌範)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여운형(呂運亨)등과 만났으며, 파리평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중국 상해에 독립운동 ‘최고기관’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9년, 길림(吉林)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다. 같은 해 3월 하순 경, 북경을 거쳐 상해로 이동하였다. 이 때 독립임시사무소 ‘8인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독립임시사무소는 독립운동을 위한 ‘최고 지도기관’수립을 준비하기 위해 결성된 기관이었다. 이동녕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10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5개월 뒤인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되었다. 이후 「임시지방연통제(臨時地方聯通制)」를 개정하고 시행했으며, 「내무부포고(內務部布告) 제1호」를 발표하여 ‘3·1독립선언기념식’을 진행하자고 주장했다.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놓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이동녕은 이를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1921년 1월 국무총리 임시대리로 선임되었으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2년 7월에는 ‘대동단결’을 주장하며, 임시정부 전 현직 각료 및 임시의정원 의원들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였다.
1924년 4월, 국무총리로 정시 취임하였으며, 2개월 후에는 군무총장을 겸직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임시대통령 직무도 대행하게 되었다. 1925년, 임시의정원의장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제도로 개정되자 국무령이 되었으며, 법무총장도 겸임하였다. 1927년, 「대한민국임시약헌(大韓民國臨時約憲)」을 개정·공포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바꾸었다. 같은 해 8월 주석 겸 법무장에 선출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유지하는 데 앞장섰다.
1930년 1월에는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여당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초대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독립당의 당의(黨義)와 당강(黨綱)을 입안하기 위한 기초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범무장직을 연임하게 되었다. 1932년 1월, 4월 김구와 함께 이봉창의 ‘동경의거’,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진행되는 데 협의하였다. 이후 절강성 가흥(嘉興)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11월, 다시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무정부 상태에 놓인 임시정부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같은 해 11월 김구, 이시영, 양우조(楊宇朝), 엄항석(嚴恒燮), 차리석(車利錫), 조성환(曺成煥)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결성하고 이사로 선임되었다. 일제의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진강, 장사(長沙), 광주(廣州), 유주(柳州), 기강으로 이전하는 것을 주도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존속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7년 7월, 노구고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한국국민당 대표의 자격으로 한국독립당 홍진(洪震), 조선혁명당 이청천(李靑天, 지청천) 등과 남경에서 회의를 가졌으며, 3당 합당을 내용으로 한 결의안 작성에 앞장섰다. 1939년 11월에는 조성환을 단장으로 한 군사특파단을 서안으로 파견하였다. 1940년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었고 급성폐렴으로 순국하였다. 해방 이후 사회장으로 봉환식이 거행되었고 효창원에 인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는 이동녕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큰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네 삶에 밀려와
마음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
가장 소중한 것들을 네 눈에서 영원히 앗아갈 때면
네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끝없이 힘든 일들이
네 감사의 노래를 멈추게 하고
기도하기에도 너무 지칠 때면
이 진실의 말로 하여금 네 마음에서 슬픔을 사라지게 하고
힘겨운 하루의 무거운 짐을 벗어나게 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네게 미소 짓고
하루하루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근심 걱정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의 기쁨에 젖어 안식하지 않도록
이 말을 깊이 생각하고 가슴에 품어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너의 진실한 노력이 명예와 영광 그리고 지상의 모든 귀한 것들을 네게 가져와 웃음을 선사할 때면 인생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일도, 가장 웅대한 일도 지상에서 잠깐 스쳐가는 한 순간에 불과함을 기억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랜터 월슨 스미스(Lanta Wilson Smith, 미국, 1856~1939)===
인생(人生)이란 무엇인가?
인생? 지금 살고 있는 오늘이 소중한 것은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원했던 내일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인생? 암에 걸려서 3개월 후에 죽는다는 판정을 받은 친구가 와서 손을 잡고 울고 위로하고,
그 불행을 슬퍼해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한 시간밖에 못살 사람이 3개월이나 살 사람을 불행하다고 위로해 주고 갔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 수많은 인생에 대한 명언 중에서도 막시무스가
최고의 명언 5개를 골라보았다.
1. 인생이란 불충분한 전제(前提)에서 충분한 결론을 끌어내는 기술이다.
인생이 충분한 전제에서 결론을 내리는 일이라면, 우리가 사는일이 이렇게 서툴고 실수투성이는 아닐 것이다.
인생은 도대체가 전제(前提...먼저 내세우는 것)가 없는 놀이다.
막시무스가 인생에 대한 최고의 명언으로 꼽는 영국의 소설가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 1835~1902)의 말이다.
2. 인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어차피 당신은 살아 나가지 못할 테니까.
막시무스가 세상의 짐을 혼자 다 짊어진 것 같은 표정으로 사는 사람을 볼 때마다 해주고 싶은 얘기다.
아무리 심각해도 인생에서 살아 나간 사람은 없다.
넥타이 풀고 살자.
미국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엘버트 허바드(Elbert Hubbard, 1865~1915)가 남긴 멋진 말이다.
3. 당신은 여기 잠깐 들른 것이다.
서둘지 말고 걱정하지도 마라.
그리고 가는 길에 꽃향기도 꼭 맡아보아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하늘로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고 쓴 천상병의 세계관과 비슷한 인생관을 담고 있는 글이다.
우리는 여기 잠시 들른 사람들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여행자처럼 살자.
살아 있을 때는 지금의 타이거 우즈만큼 유명했던
하겐(Walter Charles Hagen, 1892~1969)이라는 미국의 프로 골퍼가 한 이야기다.
4. 인생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비워서 행복해진 사람은 많아도 채워서 행복해진 사람은 별로 없다.
살면서 욕심이 날 때마다, 그리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뭔가 부끄러운 짓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생각하는 말이다.
인생에는 소유하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 있어야 한다.
미국의 작가 겸 삽화가였던 모리스 센닥(Maurice Sendak, 1928~ )의 말이다.
5.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일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고 그게 전부다.
다른 사람 볼 것 없이 막시무스의 생활만 돌이켜 봐도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을 기억하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노력해 본다.
단 하루라도 제대로 말이다.
독설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65~1950)의 인생 관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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