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흥타령의 고장 천안에서 듣는 밀양아리랑은 더 흥겹다. 경기민요 전수관에서 들려오는 노랫가락 소리를 들으면서 남산계단을 오르다 화장실에 들렀다. 동지섯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흥흥흥 소맷자락이 들썩이는 신명이 전해질 것 같은 분위기, 계단에는 누군가 먹고버린 막걸리 병이 비닐에 싸인 채 놓여 있다. 화장실에 들렀을 때 좀도둑 주의보라도 내린 것처럼 곳곳이 없어지는 공공기물에 대한 경고문구로 가득했다. 동파우려라고 쓰여진 출입문에는 '문을 닫아주세요'라고 씌여 있었다. 검게 말라 비틀어진 분뇨가 바닥에 붙어 있는 화장실 벽에는 몰지각한 사람들의 시설물 고의 훼손시에 형사처벌을 할 것이란 경고문구가 붙어 있었다. 얼마전 수집가를 통해 용주정의 안내 동판이 없어진 사실을 처음 들었던 터였다.
유리창 파손, 해드드라이기 파손, 수건걸이 도난, 방향제 도난, 점보롤 휴지걸이 도난, 미니 선반의 도난과 파손, 심지어 천정의 조명전구까지 도난을 당한다고 했다.그리고 에티겟벨 도난 및 파손까지. 아리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경기민요 전수관에서는 아라리가 났다는 후렴구가 크게 들려왔다. 딱딱딱 장구장단을 흩으면서 노래 지도를 하던 사람이 주의를 주는 소리가 났다.
"이곳에 오래 사셨어요?"
"왜 오래 살았지."
"예전하고 비교해 보면 지금 많이 변했지요. 도시가."
"그럼. 한 이십 년 사이에 몰라보게 변했어. 예전엔 이 시장 주변이 가장 중심지였는데 말이야."
"가장 두드러지게 변한 게 뭐에요?"
"쇠장이지."
"쇠장요?"
"소장 말이야."
"아 그럼 이전엔 이곳에 소장이 섰군요."
"그럼 대단했지."
백발의 노인은 남산으로 오르는 게 힘든 지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천안이란 하늘 아래 편안한 곳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
"아 그렇군요."
"산이 높은 산지에 자리한 도시니까."
천안의 옛 모습을 기억나는대로 소개 해주었다. 동쪽의 흑성산,이전 능수버들이 도시 곳곳에 가득했다고 했다. 그 버드나무 꽃씨가 눈에 들어가면 좋지 않다고 해서 다 베어버렸어. 예전엔 신작로 마다 대단했지. 온통 능수버들고 가득했으니까.
"특히 이곳은 용의 이름이 붙어 있는 동네가 많은 것 같아요?"
"그렇지.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그래서 용주정이군요."
오룡동, 용곡동, 그리고 남산의 용주정, 용이 다퉈 여의주를 얻어 하늘로 승천을 했다는 곳이 천안이란 도시라고 했다.
"남산엔 왜 큰 나무가 없어요. 큰 나무가 있으면 그늘이 시원하고 좋을텐데요/"
"왜 이전엔 큰 나무들이 있었어. 저기 봐, 저기가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야. 그리고 저쪽은 아름드리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구. 꽃남구 심느라고 베어버려서 그렇지."
이전 신사가 있던 자리에 남아 있던 돌기둥은 어찌나 공구리가 심하게 되었던지 왠만한 망치질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면서 노인은 지금도 그 돌기둥 하나가 어딘가에 뒹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향교가 있는 유량동, 영남루가 있는 천안 삼거리의 흥취와 달리 이곳에도 일제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형님 어디세요?"
"끝 계단 쪽으로 와."
"용주정 뒤편으로 갔을 때 수집가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한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향나무 아래로 바람이 불어왔다. 어젯밤 그가 끌어안고 잤다는 여자인 모양이었다. 그는 그 여자를 분명 꼬셨다고 표현했다. 평소 돈 천원도 아끼던 그가 여인숙을 얻어 잠을 청한 것도 그 여자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잠을 자고 있는 수집가 위로 보이는 여자는 머리를 꾸벅하면서 인사까지 하면서 나를 아는 체 하지 않는가.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수집가가 함께 밤을 보낸 여자가 저 여자란 말인가. 단번에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런 인사를 나누지도 않고 그저 그를 향해 걸아갔을 뿐인데 그녀는 수집가를 깨웠다.
"왔어. 일어나."
다시 향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한참을 멀뚱하게 그녀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시원하네요."
"그렇지. 다른 곳에 갈 필요 없다니까. 술 한 잔 해야지."
그는 바람이 시원한 곳이 또 있다면서 용주정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은 조금 전 노인이 알려준 정말 시원한 다리 밑이었다. 온양으로 향하는 다리 밑, 전주 남문시장 옆 다리밑처럼 도시의 노인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해병회관과 자율방범협회가 있는 곳, 노인들은 편안한 슬리퍼를 신고 술을 마시거나 대화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내가 전기 통닭 구이를 하나 사올테니까, 자네는 맥주 1. 6리터짜리 하나 사와. 지금 세일 중이니까. 마트에 가면 싸게 살 수 있을 거야."
그는 이전 자신이 술을 마시고 싶을 때 얻은 노하우대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그는 실실거리는 섬머스매 같은 짧은 머리의 여자를 데리고 봉이 우는 동네로 향했다.
시원한 맥주가 뜨뜻해지도록 오래 그들을 기다렸다. 노인들이 모인 공간은 인생의 격전지처럼 느껴지다가 서서히 시원함을 잃어가는 맥주처럼 신선함을 잃어갔다. 그건 무언가 늙고 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처럼 두꺼운 벽에 갇혀 있었다. 수집가는 오백원으로 옷을 사입고, 천원으로 신발을 사는 곳을 알고 있다. 그는 절대 빈 돈을 쓰지 않는다. 아니 빈돈이 아니라 정도 이상으로 빈티를 냈다. 이건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험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부침개 한 개에 천원짜리 두 개를 사서 막걸리를 마실 때부터 알아봤다. 천원이면 튀김이 네개인 곳으로부터, 맥주 세일 하는곳, 또 일본직수입 구제복 사는 곳 등 도시 곳곳의 싸구려 물건들 취급하는 곳의 전문가였다. 맥주를 사러 가는 길, 의류전문점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사랑한 날이 사라져가고, 슬픔만 남아 있었나.꽃잔디와 옛날 뻥튀기점을 지난 뒤였다. 박서팬티, 비치 슬리퍼를 파는 곳 옆이 바로 시장 속에 자리잡은 마트였다.
"마트도 이젠 지쳤나?"
좌판을 벌인 할머니가 물었다.
"우린 토요일하고 일요일날이 피크에요. 평일은 파리 날리잖아요,"
"그런가."
골목을 돌아오는 길, 징소리가 들려왔다. 통천암 왕꽃 선녀집이었다. 굿하는 소리가 오래된 골목을 울려왔다. 곳곳이 보살집이요 산당이었다. 매화산당, 옴보살, 백운산 산신보살... 징소리는 커졌다 작아진다. 얼마나 힘들어. 날만 새면 무섭게 일어나 일 허느라고. 시장에서 일을 하는 아주머니를 위로해 주려고 하는 말이 징소리에 묻혀 전해온다.
한 중국인이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안서동 대학촌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바라본 현상공고에 난 죽은 이의 사진을 보았다. 광대뼈가 불거진 장년 여자의 사진, 윗 옷의 상품 로고가 확대되어 있었고 전신사진이 다른 종이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현상금 천만원의 공고였다. 신원미상의 중국인 여자의 죽음을 떠올렸다. 그 소름 끼치는 죽은 이의 뜬 눈동자를 떠올리면서 나는 용곡동 다리 밑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중심이 빠져나가는 흔적이 역력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벌이는 술판처럼 처연한 풍경이었다. 그 술판에 끼어들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 수집가와 실실녀, 그리고 나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피트병 속의 맥주는 냉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몸이 두툼해지고 중년의 티가 역력해져가는 모습을 거울로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불쌍해, 못 봐주겠다. 철지난 모자를 쓴 자신을 거울 속으로 응시했다. 과장하지 않는 사건들, 절제된 사건들, 회향이란 말을 떠올렸다. 이글이글 삶이 끌어오르는 현장이었다. 유리벽이 깨지고 있었다.
뿌레카로 콘크리트를 깨던 노인의 말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힘으로 하는 게 아니여. 요령부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검은 얼굴이 더 검게 그을렸다. 또 기차가 지나갔다. 초점을 맞추었다. 천천히 기차소리를 들었다. 결기와 매듭짓고 오르기. 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몸매를 닮아갔다. 이겨내는 것이 관건이었다.그저 가볍게 연상하고 건너가는 일이 아니었다. 문제에 직면하고 그 문제를 풀어내는 일이었다. 추리와 해결구도로 연결된 문제였다. 인생의 풀이도 정답이 있었다. 상상력이 부족해 몸으로 그 상상력을 체험해야 하는 일은 번거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모든 걸 겪어내야 하는 것처럼 부담스러운 것도 없다. 어리석게도 손에 다 쥐어주어야 하다니. 반응을 보고 선택한다. 길 찾기다. 사람들이 쓰지 않는다는 건 분명히 다른 점이다.인생막장의 꿈틀거림들을 본다. 살아 있다. 일그러진 사람들, 긴 머리의 홍당무, 사내 같은 아주머니들, 늙고 병들고, 모자라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곳곳에 금이 가 있다. 인생의 원칙이 없이 무너진 사람들, 이리저리 휘둘린 흔적들, 상처받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넘친다. 걸음걸이, 침, 말, 눈빛 등 온통 무너진 자국들이다.
어색한 관계의 끝, 解産이 아닌 解散이었다. 모순으로 가득한 다리밑, 인생의 끝자락을 바라보면서 까뮈와 카프카를 떠올렸다. 모순의 빛, 실없이 분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초라한 매몰, 노는 사내들, 편하고 쉽다고 인생 막장에 기대는가. 곳곳에 비상구를 찾기 위한 절규가 가득했다. 벼랑 끝이었다. 원칙이 무너진 사람들, 의지 없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다. 흥겨운 한판에 흥이 빠진 꼴이었다. 그저 맹목적인 의지만이 살아 있을 뿐이었다. 이 도시의 감성, 그 매마름을 풀어라, 누군가 소리쳤다. 로고스와 휘몰아치는 페이소스. 말 안되는 이야기들의 억지주장들, 그저 말을 만들어내기 위해 억지로 소리치는 사람들이 몰려온다. 절제된 흥과 신명을 떠올리면서 바라본, 이마 한 가운데에 난 흰 머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구원은 가능한가. 허망한 게임, 비극적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그 구경찾기다. 위험 고압가스. 종합가스.
솔잎 위에 앉아서 나뭇 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수집가에 딱 붙어서 덧니를 드러낸 채 술잔을 꺾었다. 단무지 두개를 싸게 사왔다면서 단무지 예찬을 늘어놓는 수집가와 함께 솔바람 맞으며 술잔을 부딪친다. 그는 돈 많은 사람 부럽지 않다고 몇 번이나 강조를 한다. 낯선 도시, 그의 옆에 있는 여자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녀는 개미가 자신을 물어 뜯는다면서 전기통닭을 뜯어 먹다 말고 펄쩍펄쩍 뛴다. 개미도 먹고 살게 내버려 둬. 사람은 통닭을 먹고 개미는 사람을 먹고, 잘 됐네. 산들산들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지나는 바람을 느끼며, 남산의 남쪽 언덕 그늘에 앉아 오랜만의 망중한을 느낀다. 그녀는 술이 취할수록 그에게 더 달라붙었다. 저녁에 짜장면 사줄까. 짜장면, 짜장면 몰라. 짜장면 알아. 수집가는 취기가 오르자 나를 먼저 보내고 그들끼리 남아 있겠다고 했다.
계단을 타고 다시 정자에 오른다. 남산 용주정기를 본다. 寧城舊誌를 보면 고려 태조때 아방지사언에 천안고을 산형이 五龍爭珠之勢라고 했다.주란 남산을 말한다. 그래서 남산에 정자를 지었다. 용주정이다. 이곳에서 勝景을 볼 수 있다. 동남쪽으로 水湖山, 서쪽으로 魯泰山, 그리고 서남쪽으로 광덕천원이 식수원이 되고, 공주접경에 광덕 태화산이 자리해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온양의 逢江이 흐른다. 그 중심에 용주정이 있다. 곳곳의 산형이 다섯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형상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도시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산을 볼 때마다 꿈틀거리는 도시를 본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움직이는 용의 역동적인 모습이 남산을 향해 몰려온다.